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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온 영화 <토니 에드만>은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입니다. 장난치는 것을 좋아하는 아버지가 성인이 되어 진지하게 일에 몰두하는 딸을 찾아가 벌어지는 소동을 다루고 있습니다.


뒤죽박죽 코미디와 부녀 사이의 가슴뭉클한 드라마가 합쳐진 이야기가 아닐까라고 생각한다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나머지 절반 가량을 영화는 드러내지 않고 여백으로 내버려둡니다. 그래서 관객이 그 비어있는 부분을 계속해서 채워가게 합니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뻔한 이야기를 전혀 뻔하지 않게 한다는 것입니다. 독일의 여성감독 마렌 아데는 바덴-뷔르템베르크 영화학교에서 시나리오를 가르치는 교수이기도 한데요. 7년만에 직접 연출한 <토니 에드만>으로 그녀는 독일 영화로서는 오랜만에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하며 독일 영화의 새 희망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토니 에드만>에는 세 가지가 없습니다. 첫째, 대단한 대사가 없습니다. 인생의 의미랄까 이런 것들에 대해 아버지 빈프리드(페테르 시모니슈에크)는 귀에 팍 꽂히는 말을 하지는 않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강요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대신 그는 행동으로 자신이 믿는 것들을 보여줍니다.


둘째, 아버지의 행동에 이유가 없습니다. 빈프리드가 자주 쓰는 말은 “지나던 길에 들렀다”는 말입니다. 그는 우연히 딸이 사는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 들르고, 또 우연히 명함을 받은 여성의 집에 들러 피아노를 치고 노래까지 합니다. 이런 우연들이 모여 풍부한 에피소드를 이루고 결국 감동까지 이끌어냅니다.



셋째, 뻔한 결말이 없습니다. 딸 이네스(산드라 휠러)는 점점 변화해갑니다만 그 방식은 서서히 스며드는 것이 아니라 다소 충격적입니다. 마치 물이 서서히 끓다가 임계점이 다다르면 형태가 아예 변해 수증기가 되는 것처럼요. 그래서 영화는 2시간 42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지루하지 않습니다.


영화 속 세 장면을 바탕으로 이 영화 속 부녀에 대해 더 살펴보겠습니다.



#1

이네스는 친구들에게 아빠와 보낸 주말이 얼마나 최악이었는지 털어놓는다. 이때 토니 에드만으로 변장한 빈프리드가 갑자기 등장해 너스레를 떤다. 그는 딸과 친구들이 만나고 싶어하는 비즈니스맨의 코치라고 자신을 소개하더니 이렇게 말한다.

“그 사람은 지금 큰 슬픔에 잠겼어요. 45년간 기르던 거북이가 죽었거든요. 그런데 나에게 그건 그냥 죽은 거북이일 뿐이잖아요.”



이 장면은 영화가 1시간쯤 지났을 때 나옵니다. 그때까지 영화는 ‘민폐’ 아빠가 몰래 해외여행 와서 다 큰 성인 딸을 졸졸 따라다니는 이야기의 틀을 벗어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네스는 도움이 됐다가 안됐다가 하는 아빠가 불편하기만 한데 드디어 그가 떠나겠다고 하자 비로소 웃습니다. 하지만 떠난 줄 알았던 아빠가 토니 에드만이라는 정체 불명의 남자로 돌아왔다는 것을 알게되는 순간이 바로 이 장면입니다.


토니는 딸 앞에서 농담처럼 거북이 이야기를 꺼냅니다. 45년간 주인과 함께 살다가 죽은 느린 거북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비유처럼 보입니다. 영화에는 죽음에 대한 언급이 여러 번 나오는데 빈프리드가 가족처럼 키우던 개 빌리의 죽음, 마지막 장면 할머니의 죽음 등이죠. 거북이는 이 죽음들을 연상시킵니다.


세상의 모든 죽음들은 어떤 사람에겐 특별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그저 거북이일 뿐입니다. 자신에게는 가장 소중한 존재이지만 남들이 보기엔 그저 한 마리의 거북이일 뿐인 거죠. 부모와 자식의 관계 역시 이렇지 않을까 싶네요. 부모가 나이가 들어갈수록 관계는 점점 소원해지고, 심지어 누가 보지만 않으면 내다 버리고 싶은 존재가 가족이라고도 하잖아요. 한 사람에게만 소중한, 그러나 모든 사람의 이야기인 가족에 대한 비유로 거북이가 등장한 장면이었습니다.



#2

이네스는 빈프리드를 데리고 공장을 찾아간다. 빈프리드는 철거 위기에 놓인 루마니아 주민에게 이렇게 말한다.

“유머를 잃지 마세요.”

그러자 딸 이네스가 그렇게 하면 안 된다며 아빠에게 면박을 준다.

“곧 집을 잃을 사람들에게 유머를 잃지 말라니, 조롱하는 거예요?”



영화의 배경은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입니다. 이네스와 빈프리드는 독일 사람이죠. 이네스의 직업은 맥킨지의 기업 경영 컨설턴트입니다. 한 마디로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최전선에서 경영자가 직원들을 해고하는 일을 대행해주는 사람입니다. 경영자가 직원에게 해고를 통보하는 일이 껄끄럽고 또 노조의 반발도 우려될 때 이 일을 아웃소싱하는데 이때 이 일을 맡는 ‘전문가’가 바로 이네스입니다.


그래서인지 이네스의 표정은 시종일관 심각합니다. 그녀는 잘 웃지도 않습니다. 농담이 삶의 전부인 아버지와 딴판이죠. 어쩌면 아버지가 독일에서 부쿠레슈티까지 몰래 찾아온 것도 이런 딸이 안쓰러워서였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빈프리드는 딸에게 도대체 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묻지는 않습니다. 그 대신 영화는 이런 에피소드로 두 사람의 사고방식 차이를 드러냅니다.


이네스는 토니로 변장한 아버지를 회사 직원이라고 속이고 자신이 해고해야 할 직원들이 있는 공장에 데려갑니다. 왜 데려갔을까요? 보디가드가 필요했을 수도 있고, 갈 곳 없는 아버지를 위한 배려였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곳에서 무자비하게 사람을 자르는 모습과 힘들게 살고 있는 마을 사람들을 보고 토니는 충격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돈을 주면서 유머를 잃지 말라고 말한 겁니다.



‘1984’의 저자 올더스 헉슬리는 이런 말을 한 적 있습니다. “당장의 봄을 즐기지 못하는 사람이 만약 유토피아에 간다면 그곳에선 즐길 수 있을까?”


세상을 너무 비관적인 측면으로만 바라보지 말고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여건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라는 말이었죠. 토니가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주며 유머를 잃지 말라고 한 행위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합니다. 꼭 유토피아가 아니어도 지금 우리 주변에 이미 와 있는 봄을 즐길 수 있는 자만이 더 나은 세상을 꿈꿀 수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네스의 생각은 전혀 다릅니다. 그녀는 자신이 하는 일이 이들의 집을 부숴 이들을 더 비참하게 만드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거리를 두려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 몇 푼 쥐어줘봤자 그게 무슨 도움이 될까, 더 큰 혼란만 남길 뿐이야.”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거죠.



이제 이 영화의 배경을 부녀가 살던 독일이 아닌 굳이 부쿠레슈티로 설정한 까닭을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과거 공산주의 국가였던 루마니아 사회는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뒤 급속도로 변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딸은 의뢰인인 자본가와 만나 잘 보이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고, 반대로 아버지는 철거민에게 동질감을 느낍니다. 아버지와 딸이 살아가는 세상은 이처럼 다릅니다. 사회 시스템이 다르고, 바라보는 계층이 다릅니다. 비단 세대 간의 차이, 늙고 젊음의 차이를 떠나서 말입니다.


혹자는 이를 두고 68혁명 세대인 자유분방한 아버지와 신자유주의 세대인 경직된 딸의 갈등이라고 표현하는데요. 뭐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저는 꼭 그렇게 못박고 싶지는 않습니다. 한 가지 프레임으로만 보면 유럽의 모든 아버지와 딸은 68혁명과 자본주의의 대립으로 볼 수 밖에 없거든요. 68혁명은 실패한 혁명이었고, 딸이 살고 있는 세상은 아버지가 꿈꾸던 유토피아는 아닙니다. 세상이 바뀐 거지요. 어떤 방향이 좋고 나쁜지는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관객이 판단할 몫이겠지요. 다만 그 와중에도 다가온 봄을 즐기자는 헉슬리의 주장만큼은 언제든 유효합니다. 그러니 이 영화의 유머를 마음껏 즐겨보자고요.



#3

집에서 자신의 생일파티를 준비하던 이네스는 드레스를 힘들게 입은 뒤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벗으려는데 지퍼가 잘 내려가지 않아 옷이 몸에 낀다. 벗지도 못하고 다시 입지도 못하는 사이에 누군가 초인종을 계속 눌러댄다. 이네스는 힘들게 옷을 벗어버리고는 아예 발가벗고 문을 열어준다. 그녀는 깜짝 놀란 손님에게 이렇게 말한다.

“오늘 파티는 누드로 진행돼요. 안 벗을 거면 들어오지 마세요.”



이 장면은 갑작스럽게 진행됩니다. 드레스를 벗지 못해 낑낑댈 때만 해도 자신의 생일파티에서마저 흐트러지지 않고 격식을 갖춰야 하는 이네스의 모습 이면을 보여주려나보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갑자기 옷 입는 것을 잊어버린 것처럼 나체로 돌아다니기 시작합니다.


초대받은 손님들은 직장 동료들입니다. 그녀가 옷 다 벗고 들어오라고 하니 난감할 수밖에요. 가장 먼저 들어오는 사람은 루마니아인 여직원 앙카(잉그리드 비수)입니다. 충직한 그녀는 자본주의가 벗으라면 벗어야 한다고 믿는 순진한 공산주의 국가 국민처럼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옵니다.


다음으로 들어온 사람은 사장 게랄드(토마스 로이블)입니다. 그가 들어오면서 이 기발한 생일파티는 직장 내 위계질서가 사라진, 그러나 여전히 어색하고 적응 안 되는 사교의 장으로 변합니다. 옷을 입고 있을 때야 사장님이지 이곳에서는 서로 부끄러워 눈도 마주치지 못 합니다.


이 장면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굳이 페미니즘을 들먹일 필요까지는 없겠죠. 센 여자 이네스의 페미니스트로서의 면모는 그가 호텔 방에서 남자친구를 어떻게 다루는지만을 봐도 알 수 있으니까요. 이 생일파티 장면은 그저 진행과정 자체만으로도 엄청나게 웃기고 당황스럽고 그래서 더 기발한 코미디입니다.



마침내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 털복숭이 쿠케리(루마니아 민속 인형)를 온몸에 걸친 토니가 들어옵니다. 온몸이 털인 이 사람은 정체를 알 수 없지만 이런 장난을 칠 사람은 자신의 아버지밖에 없다는 것을 이네스는 잘 압니다.


이 장면은 좁은 공간에서 벌어짐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이미지로 대비를 이룹니다. 세 사람의 누드 사이에 얼굴도 드러내지 않은 털복숭이가 서 있습니다. 모든 것을 가리거나, 혹은 모든 것을 보여주거나. 이렇게 아버지와 딸은 또 다릅니다. 아버지는 변장하고 우스꽝스런 틀니를 끼워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속이는 데서 재미를 찾는 반면, 뒤늦게 장난에 눈 뜬 이네스는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알몸이 되는 것에서 농담거리를 찾습니다. 빈프리드는 병든 엄마를 모시며 평생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살아왔기에 변장을 해야만 비로소 농담할 기분이 나는 반면, 이네스는 감추는 것을 직업으로 살아왔기에 모든 것을 드러내야만 비로소 장난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아버지의 장난이 못 마땅했던 이네스는 이제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아버지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아버지와 정반대의 방식이지만 거기 옳고 그름이 있을까요. 딸이 아버지를 받아들였다는 게 중요하죠.


마지막 장면에서 이네스는 집 밖으로 나간 쿠케리를 따라가 그에게 안깁니다. 영화의 포스터에도 쓰인 이 장면은 꽤 긴 여운을 남깁니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와 딸들이 느낄 감정의 진폭이 이 장면에 남아 있습니다.



아버지의 쓸쓸한 표정과 무심하지만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계속 눈물 흘리는 딸이 이국 땅에서 티격태격하는 여정을 가벼운 장난과 우스꽝스런 코미디를 엮어 솜씨 좋게 버무린, 그러나 직접적으로 설교하지 않고, 꽤 심심한 면도 있는 이 영화는, 아마도 나이를 먹어갈수록 가슴으로 더 이해하게 될 영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토니 에드만 ★★★★☆

서로 다른 세계에서 온 부녀 이야기. 결국은 사랑. Greatest Love of All.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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