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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여의 제작기간, 155억원의 총제작비, 한국영화 크라우드펀딩 최다액 8억원 모금, 한국영화 첫 넷플릭스 전세계 배급 등 화제를 모은 올겨울 첫 대작 '판도라'가 7일 개봉한다. '판도라'는 2012년 450만 관객을 동원한 깜짝 흥행작 '연가시'의 박정우 감독이 다시 한 번 시도한 재난영화다. '연가시'가 변종기생충으로 인한 감염 공포를 다뤘다면 '판도라'는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모티프로 울산 인근 지역 강진으로 인한 원전폭발을 가정한다. '연가시'보다 더 큰 스케일로 더 강력한 한 방을 날리는 영화 '판도라'에서 눈여겨봐야 할 세 가지 이유를 짚어봤다.



1. 강력한 핵펀치 같은 재난영화


재난영화 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이 있다. 가족간의 생사확인, 우왕좌왕하는 정부, 떠오르는 영웅 등. 특히 한국의 재난영화는 '해운대' '괴물' '감기' '부산행' 등 대개 소시민이 사건을 해결하는 스토리가 많다. '판도라' 역시 이 계보를 잇는다.


'판도라'는 플롯이 새로운 영화는 아니다. 위기에 처한 원전 하청업체 직원(김남길), 가족이 전부인 엄마(김영애), 고부갈등 며느리(문정희), 아들밖에 모르는 아버지(강신일), 막무가내 총리(이경영), 무능한 대통령(김명민) 등 맡은 역할만 봐도 어떤 이야기가 전개될지 예측가능한 스테레오타입형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예측가능성은 관객이 순식간에 영화에 몰입하도록 돕는다. 영화 초반 압축적인 몇 개의 대사만으로도 이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짧은 인물소개가 끝나면 지진이 발생하면서 본격적인 재난 상황이 시작되는데 이때부터 영화는 원전 현장, 피난민, 청와대의 삼각축을 교차하며 쉼없이 내달린다.



'잊을 수 없는 콘텐츠 만들기' 저자인 뇌과학 전문가 카먼 시몬은 "90% 같은 내용에 단 10%만 달라도 사람들은 그 콘텐츠를 독창적으로 인식한다"고 말하는데 '판도라'가 딱 그 경우다. 원전사고라는 무시무시한 10%는 강력한 핵펀치처럼 스토리의 90% 익숙함을 빨아들인다.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참혹함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이 영화는 설정 그 자체가 악몽이다. 원전은 일촉즉발 폭발 위기에 직면하고 도로, 공항, 항구는 대피하는 사람들로 아수라장이 되는데 이 상황을 제어할 컨트롤타워는 전무하다. 제작진은 실제 원전 어느 곳에서도 촬영 허가를 받지 못해 대형 세트를 짓고 컴퓨터 그래픽으로 대부분의 장면을 완성했지만 그 디테일은 실제상황 못지 않게 리얼하다.


박 감독은 오락영화의 틀 안에 자신이 말하고 싶은 메시지를 분명하게 담았다. 그 메시지는 우리나라는 결코 원전 안전국가가 아니라는 것, 원전 사고는 자연재해로 시작하지만 결국 이것을 키우는 것은 인재라는 것이다. 감독은 타협하지 않고 마지막 장면의 자막까지 뚝심 있게 밀어붙인다. 그래서 영화가 끝나고 나면 크게 한 방 얻어맞은 것처럼 묵직한 울림이 남는다.



2. '터널'에 이어 또다른 현실 비판


'판도라'는 제작부터 개봉까지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박 감독은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문화예술인 중 한 명이다. 그 때문인지 투자자들 중 일부가 투자를 철회해 제작이 지연되기도 했고, 외부 압력으로 개봉 시기가 계속 연기되기도 했다. 판도라의 상자가 과연 열릴 수 있을지 회의론이 일 정도였다.


박정우 감독


세월호 참사 이후 여러 감독들이 이를 모티프로 한 작품을 기획해왔다. 개봉 스타트를 끊은 것은 '터널'이었다. 경제적 이유를 들어 터널에 갇힌 시민 구조를 포기하는 영화 속 정부는 많은 관객의 공분을 샀다. 이후 '가려진 시간'은 은유의 방식으로 산사태 이후 돌아오지 않는 아이들을 다루었고 그 다음은 '판도라'다.


원전 안전에 대한 우려를 무시하는 낙하산 소장, 원전 폭발이 임박했음에도 하청업체 직원들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문을 막는 관리자, 자발적으로 목숨을 걸고 생존자 구조에 나선 사람들이 오히려 죽어나가는 과정, 진실을 숨기고 보도 통제를 지시하는 정부, 상황파악을 못하고 관저에 칩거하는 대통령 등 재난 이후의 상황은 영락없는 세월호 복사판이다. 그나마 영화는 대통령의 각성으로 사건 해결을 위한 반전을 도모한다.



공교롭게도 미루고 미룬 영화 개봉 시기가 박근혜 대통령의 범죄 혐의와 세월호 7시간 동안의 무능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는 촛불정국과 맞물려 영화는 더 큰 폭발력을 갖게 됐다.


영화보다 더 흥미진진한 뉴스가 쏟아지고 있어서 오죽하면 영화 '내부자들'이 현실 비판이 아닌 현실을 미화한 영화라는 푸념까지 나오는 시국이지만 '판도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잿더미 속에 묻힌 판도라의 상자 안에 아직 나라를 일으켜세울 희망이 남아 있다고 말하는 영화다.



3. 신인 배우 김주현의 발견


영화의 제목인 '판도라'는 그리스 신화에서 신이 만든 최초의 인간 여성의 이름이다. 그는 제우스가 절대 열어보지 말라고 한 상자를 여는 바람에 인류를 고통에 빠지게 한 '민폐녀'로 인식돼 왔지만 최근 들어서는 다른 해석도 나오고 있다. 선물을 주면서도 열어보지 말라고 한 제우스가 나쁘지 판도라의 호기심은 죄가 없다는 것이다. DC코믹스는 최근 판도라 캐릭터를 바탕으로 여성 캐릭터를 만들었는데 이 여성은 호기심이 강해 다방면에 지식이 많고 전투능력도 세다.


이 새로운 해석을 영화 '판도라'에 대입해 보면 영화 속에서 판도라 역할을 하는 인물은 김남길이 연기한 주인공 재혁의 여자친구 연주다. 고아로 자라 위기대처 능력이 몸에 밴 연주는 재난 상황에서 침착하게 대처하면서 마을 주민들의 대피를 이끈다. 정보가 부족할 때 한발 앞서서 현장으로 향하는 행동파이면서 모두가 패닉에 빠져 있을 땐 슬기롭게 길을 뚫고 나가는 리더 기질도 갖췄다.


연주 역의 김주현


한국 재난영화에서 보기 드물게 진취적인 여성인 연주를 연기한 배우는 데뷔 9년차 중고 신인 김주현이다. 1987년생으로 올해 30세인 그는 한동안 한주현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면서 영화 '기담', 드라마 '모던파머' 등에 출연했고 한가인 닮은 꼴 외모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런데 그는 올 봄 석연찮은 사건 때문에 무명 배우로서 냉정한 현실의 벽을 절감했다. 드라마 '엽기적인 그녀' 전국민 오디션에서 18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주연 발탁됐지만 인지도 높은 배우에 밀려 하차당한 것이다.


영화 '판도라'는 김주현에게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듯하다. 김남길과 함께 주연급 비중으로 출연한 그는 자신이 원래 연주였던 것처럼 능숙하게 배역을 소화해낸다. 단아한 외모와 친근한 경상도 사투리 연기 덕분에 연주는 극을 주도하면서도 오버스럽지 않게 보인다. 거의 모든 캐릭터가 감정 과잉 상태인 이 영화에서 김주현의 연주는 절제할 줄 아는 유일한 인물이다. 단연 충무로 올해의 발견이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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