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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프란츠 카프카가 20세기 중반에 태어났다면 그는 소설을 쓰는 대신 찰리 카프먼처럼 영화를 만들고 있을 것이다. 작은 키에 사교성 없고 소심한 남자 카프먼은 늘 불안하고 외롭고 창작에 골몰하는 자기 자신을 상상해 작품 속에 집어넣는데 그의 독특한 작품세계는 카프카를 닮았다.


찰리 카프먼


뉴욕대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잠시 기자생활을 하다가 영화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 그는 독특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존 말코비치 되기>(1999) 각본을 써서 관객과 평단의 극찬을 받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과 8층 사이에 내리면 연기파 배우 존 말코비치의 두뇌 속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있다는 기발한 설정의 이 영화는 매번 완벽하게 연기 변신하는 대배우인 말코비치에 대한 헌사이자 나르시시즘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영화로 아카데미 각본상에 노미네이트되며 카프먼 세계의 시작을 알렸다.


<존 말코비치 되기>


그는 멋지게 첫 발을 뗐지만 첫 작품의 성공으로 인한 부담감이 큰 짐이 돼 다음 작품의 시나리오를 한 줄도 쓰지 못하는 '소포모어 증후군'에 빠진다. 필모그래피 상으로는 과거에 써둔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한 영화(온몸에 털이 나는 소녀가 털 난 짐승을 학대하는 과학자와 사랑에 빠지는 <휴먼 네이처>(2001))가 개봉하며 후속작을 이어갔지만 실제로 그는 차기작 시나리오를 7개월 동안 한 글자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어댑테이션>


카프먼이 이를 돌파한 방식은 자기 자신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는 글을 쓰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직접 작품 속에 집어넣어 이야기를 만들었다. <어댑테이션>(2002)의 주인공은 <존 말코비치 되기>로 스타 작가가 된 뒤 후속 작품을 고민하는 카프먼 그 자신으로 이름까지 똑같다. 영화 속에서 그는 허구의 인물인 쌍둥이 동생을 만나는데 작가가 되고 싶다던 동생은 할리우드 공식대로 시나리오를 써서 대박을 치고 카프먼은 동생을 질투한다. 스토리텔링 과정 자체를 스토리로 만든 이 영화 역시 아카데미 각본상에 노미네이트되며 카프먼은 이름만으로 영화를 보증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시나리오 작가로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이터널 선샤인>


이처럼 카프먼은 실제 자신과 허구의 자신을 작품 속에 뒤섞어 넣고 카프카적인 상상력의 근원과 경계를 탐구하는 작품을 계속 만들고 있다. 그 자신의 경험이 바탕이 되기에 작품에는 오리지널리티가 살아 있다. 카프먼의 기발한 상상력이 상업적인 성공으로 이어진 작품은 <이터널 선샤인>(2004)이다. 기억을 지워주는 기기를 발명한 과학자를 찾아가 사랑의 아픈 기억을 지우려는 남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 영화는 창조적인 로맨스 영화로 전세계에서 큰 사랑을 받았고, 마침내 카프먼에게 아카데미 각본상 트로피를 안겨주었다.



이후 그는 감독으로도 데뷔한다. 허무주의에 빠진 연극 연출가인 주인공이 인생을 무대에 올리는 과정을 담은 영화 <시네도키, 뉴욕>(2008)은 비록 흥행에서는 참패했지만 평단으로부터는 21세기 최고작이라는 극찬을 받았고, 이어 그가 두번째로 연출한 영화가 바로 <아노말리사>(2015)다. TV시리즈 <커뮤니티>를 만든 듀크 존슨과 공동연출했다.


이전까지 그가 함께 작업한 감독들은 스파이크 존즈, 미셸 공드리 등인데 넓게 보면 비슷한 세계를 공유한다고 볼 수 있다. 스파이크 존즈의 <그녀>(2013), 미셸 공드리의 <무드 인디고>(2013) 역시 카프먼의 영화세계처럼 외롭고 상처받기 쉬운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하기 때문이다.



<아노말리사>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다. 그런데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에 대한 일반적인 선입견을 완전히 깨는 전혀 새로운 작품이다. 인형이 등장하는 애니메이션 하면 떠오르는 동화같은 판타지와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카프먼 세계에서 보여줬던 기발한 상상력도 이 작품에선 접하기 힘들다. 그대신 <아노말리사>는 아주 사실적인 캐릭터와 배경 묘사로 현실적인 성인의 이야기를 한다. 중년의 고독, 권태, 불륜, 삶의 공허함, 자아찾기 등이 주제다. 이를 위해 영화는 심지어 베드신까지 정교하게 묘사하고 있다. 실사영화였다면 오히려 평범하게 느껴졌을 주제지만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을 통해 전달함으로서 영화는 오리지널리티를 얻는다.



영화의 주인공 마이클 스톤은 고객 서비스를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는지를 주제로 책을 쓴 베스트셀러 작가다. 그가 강연을 위해 신시내티로 오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활기차게 고객에게 최선을 다하라고 말해야 할 것 같은 남자는 오히려 지금까지 헛살아왔다는 표정으로 삶의 소회를 늘어놓는다. 그는 10년전 헤어진 애인을 만나 호텔방으로 가자고 말하다가 차이고 우연히 리사라는 이름의 여성팬을 만나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영화의 제목인 ‘아노말리사’는 이례적이라는 뜻의 ‘아노말리(anomaly)’와 '리사'의 합성어다. 스톤이 묶는 호텔 이름은 ‘프레졸리’인데 스톤은 이를 자꾸만 '프레골리'로 발음한다. ‘프레골리(Fregoli)’는 모든 사람을 같은 사람으로 인지하는 정신병리학적 증상을 뜻하는 용어다. 삶이 권태로운 스톤에게 모든 사람은 같은 사람처럼 보인다. 그래서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의 대사는 한 사람의 목소리로 들린다. 여성이든 어린이든 모두 톰 누난이라는 배우의 목소리다. 단, 리사만은 예외다. 방금 만났을 뿐이지만 스톤에게 그녀는 특별하다. 제니퍼 제이슨 리가 연기한 리사의 목소리는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다른 인물과 구별되는 음성이다. 하지만 설레임으로 시작한 사랑도 반복되면 흥분이 가라앉는 것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리사의 목소리 역시 평범해져만 간다.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에 쓰인 인형은 이 영화를 위해 3년 동안 만든 것이다. 인형은 그 자체로 존재감이 있어서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인형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거의 들지 않는다. 얼굴 표정이나 동작이 실제 사람처럼 정교할뿐만 아니라 그들이 표현하는 감정, 친밀함과 거리감, 그리고 얼굴에 떨어지는 빛의 각도 등이 서정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단 한 부분 사람과 다른 곳이 있다. 모든 인물의 눈 주위에 실선이 그어져 있는 것이다. 영화 중반부에 그 비밀이 밝혀지기 때문에 스포일러가 되지 않은 선에서 첨언하자면 이 영화는 고의적으로 등장인물들이 인형임을 드러냄으로써 인형과 인간의 경계에 대해서도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인간은 자신과 닮은 인형에 친근함을 느끼다가도 어느 순간 너무 비슷하거나 혹은 뭔가 하나 근본적으로 다른 점을 발견할 때 섬뜩함을 느끼는데 그때 급격하게 친밀도가 감소한다. 이 현상을 ‘언캐니 밸리’라고 하는데 이 영화에서 언캐니 밸리가 가동되는 지점은 평이하게 진행되어온 스토리가 갑자기 기괴하게 바뀔 때다. 카프카의 ‘심판’에서 주인공 요제프 K가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비난받는다고 느끼는 것처럼 <아노말리사>의 스톤 역시 낯선 사람들에게 갑작스레 쫓기는 상황에서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할만한 물체를 떨어뜨리고 만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타인과 자아의 경계, 관계와 소외의 경계를 묻는데 그 방식이 세련됐다.



<아노말리사>는 지금까지 어떤 영화와도 다르기 때문에 이 영화를 처음 접하면 매우 이질적이라고 느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식의 영화가 말이 되는지 안되는지를 계속 생각하게 될 것이다. 41세에 <존 말코비치 되기>로 데뷔한 이래 카프먼은 57세가 된 지금도 계속해서 스토리 실험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실험의 결과물은 경이롭다. 호불호는 갈릴지언정 완성도에 대해 지적하긴 힘들다. 그만큼 참 이례적(anomaly)인 영화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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