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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두 남자가 있다. 한 명은 정치권에 줄대다 배신당한 깡패고, 한 명은 끈 떨어진 검사다. 두 남자는 구원이었다. 그러나 복수를 위해 힘을 합친다. 영화 <내부자들> 이야기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내부자들>은 윤태호 작가의 미완결 웹툰을 원작으로 한다. 웹툰은 한겨레 사이트에 2012년 연재됐는데 지금은 작가의 요구로 사이트에서 내려져 책으로만 볼 수 있다.



웹툰과 영화는 상당히 다르다. 일부 캐릭터와 상황만 겹칠 뿐, 캐릭터의 결도, 스토리 진행도, 리듬도 다르다. 우민호 감독은 원작을 재해석했다. 원작과 작가의 유명세를 빌려와 자기가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든 것처럼 보일 정도다.


웹툰이 묵직한 분위기로 정치인들의 실명이 고스란히 등장해 칼날 위를 걷는 듯했다면, 영화는 단순하고 낭만적으로 복수와 정의를 외친다. 웹툰이 복잡하게 이야기를 나열했다면, 영화는 이를 최대한 단순화시켜 단 두 명의 주인공에게 집중한다. 그런데 이 전략이 꽤 그럴 듯하다. 이병헌과 조승우를 캐스팅한 덕분이다. 두 짐승의 연기 호흡은 마치 알 파치노와 로버트 드니로의 대결을 보는 것처럼 눈을 뗄 수 없다.


결과적으로 웹툰과 영화, 어느 편이 더 좋다고 단정지을 수 없다. 미완결 웹툰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한 우민호 감독의 배짱 역시 윤태호 못지 않다. 그런데 우민호 감독의 재해석은 과거 윤태호가 했던 방식에서 빌려온 것이다. <이끼>에서 구원이던 두 남자는 결국 힘을 합쳐 구악을 몰아냈었다. 영화 <내부자들> 역시 이 방식으로 윤태호 작가가 미완성으로 남겨뒀던 스토리를 마무리한다. 그래서 웹툰이 갈팡질팡하는 것처럼 느껴졌던데 반해 영화는 매우 직설적으로 내달린다.



내부자들을 만든 한 장면


개인적으로 웹툰을 보면서 인상에 강하게 남았던 장면이 있다. 30회에 유력 대선후보, 대기업 회장, 보수 일간지 논설주간이 강남의 은밀한 장소에 모여 여성 접대부들과 벌거벗은 채 폭탄주를 마시는 모습이다. 사실 룸살롱과 폭탄주는 한국의 정치 드라마에 클리셰처럼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그다지 새롭지는 않다.


하지만 윤태호 작가가 그린 이 장면에는 한 가지 특이한 설정이 있다. 바로 남성의 성기를 골프채처럼 이용해 맥주잔 위에 올린 양주잔을 차례로 쓰러뜨려 도미노주를 만드는 장면이다. 그동안 권력자들의 폭탄주 문화에 대한 지저분한 이야기는 많이 회자됐지만 이렇게 적나라한 방식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만화에서 이 장면은 단지 몇 컷에만 등장한다. 그들만의 놀이문화의 단면을 보여주는 장면일 뿐이다. 하지만 이 장면이 강렬하게 인상에 남았던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우민호 감독이 영화화를 구상할 때도 이 장면이 창작의 모티프가 됐음에 틀림없다. 영화에선 이경영, 백윤식, 김홍파 등 중년 남성 연기자들이 웹툰에서보다 더 큰 스케일의 술자리에서 천연덕스럽게 엉덩이를 흔들며 연기하고 있다. 도입부에 배치된 이 장면은 이후 영화의 고비마다 반복 등장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윤태호 작가는 10일 영화 시사회가 끝난 후 관객과의 대화에서 이 장면을 그린 의도를 이렇게 설명했다.


“흔히들 남성에겐 성기 사이즈에 대한 컴플렉스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을 가진 권력자들에겐 그런 컴플렉스마저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다 가졌기에 발가벗고 있어도 아무런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 장면을 통해 수치심이 거세된 사람을 표현하려 했다.”


그러니까 윤태호 작가는 ‘수치심이 거세된 사람들’을 우리 사회 권력자들의 숨겨진 본모습으로 보고, 그들이 만든 정치-경제-언론의 단단한 카르텔을 하나씩 추적하려 한 것이다. 이 술자리는 거세된 수치심을 표현하기 위한 상징적인 장면이었던 셈이다.



내부자들에 대한 다른 정의


아무런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파렴치한 권력자들을 상대하는 자는 누구여야 할까? 과연 누가 대적이나 할 수 있을까? <내부자들>은 제목 그대로 조직 내의 내부자들이 내부고발자가 되어 지저분한 카르텔을 깨야 한다고 말한다. 송곳처럼 하나쯤 뚫고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부자들을 정의하는 지점에서 웹툰과 영화는 미묘하게 다르다.


웹툰은 지저분한 카르텔에 속해 있으면서도 그들과 철학이 달라 조직 내에서 갈등을 겪는 사람들을 ‘내부자들’이라고 지칭한다. 여기서 내부자들을 규정하는 단어는 철학이다. 즉, 보수언론에서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기자, 진보언론에서 보수적인 생각을 가진 기자가 내부자다.



하지만 영화는 이 지점을 개인의 문제로 만들어버린다. 즉, 우민호 감독이 새로 만든 캐릭터인 우장훈 검사(조승우)는 ‘흙수저’로 태어난 가정환경과 지방대 출신이라는 컴플렉스를 극복하려 사건에 매달리는데 이는 윤태호 작가가 아마도 의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철학이 아닌 구체적인 환경이 동기가 됨으로써 영화는 웹툰보다 도식적이 됐다. 영화의 중반부에 우장훈은 깡패 안상구(이병헌)에게 자신의 동기가 ‘정의에 대한 갈망’이라고 말한다. 이는 윤태호 작가가 차마 웹툰에 적지 못한 말이다. 우민호 감독은 우장훈이 ‘정의’라는 단어를 내뱉게 함으로써 영화가 도식적이지만 낭만적으로 보이길 바랐다. 웹툰에서 가장 적나라한 장면을 모티프로 삼았으니 그것을 가장 충격적으로 뒤엎는 방법은 도식화라고 생각한 듯하다.


결국 영화가 노린 도식화라는 승부수는 성공했을까? 직설은 즉각 효과를 발휘하지만 효과가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는 법이다. 영화를 보고 나면 시원한 기분이 들지만 이게 우리 주위의 실현가능한 삶이라는 생각에는 미치지 않는다. 영화의 엔딩이 판타지처럼 보이는 이유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민호 감독의 선택을 탓할 수는 없다. 웹툰의 애초 의도와는 달랐지만, 영화는 웹툰이 가지 않은 길을 과감하게 만들었고, 그 길에서는 정말 잘 해냈기 때문이다.



웹툰 영화화의 좋은 예


지금까지 만들어진 웹툰 원작 영화는 대개 웹툰을 콘티처럼 활용해왔다. 밥상 차렸으니 숟가락만 들면 된다는 생각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은밀하게 위대하게>, <그대를 사랑합니다> 같은 영화들이다.


하지만 웹툰과 영화는 엄연히 다른 매체다. 언제든 원하는 곳에서 멈출 수 있는 웹툰은 좀더 사색적인 매체인 반면 러닝타임을 향해 흘러야 하는 영화는 폭탄 같은 매체다. 매체의 성격이 다르니 접근도 달라야 하는데 그런 시도를 한 작품이 별로 없었다. 감독들이 게을러서 시도하지 않았거나 혹은 제작사가 웹툰의 인기에 묻어가고 싶어서 건드리지 않았다.



우민호 감독은 웹툰과 다른, 영화다운 영화를 만들었다. 원작에 없던 캐릭터를 새로 만들었고, ‘내부자들’에 대한 개념을 단순화시켰으며, 무엇보다 이야기를 두 인물로 집중시켰다. 그 결과 새로 만들어진 우장훈이라는 캐릭터는 원작의 느슨함을 단박에 묶어냈다. 웹툰에선 잘 보이지 않던 목표지점이 생겼고, 그곳을 향해 내달리기만 하면 됐다. 웹툰에서 아웃사이더 사진기자가 에둘러 돌아가며 하던 일을 우장훈 검사는 박력있게 해낸다.


영화를 보면서 윤태호는 참 행복한 작가라는 생각을 했다. 미처 완성하지 못한 웹툰을 기존에 자신이 했던 방식(<이끼>)으로 재해석해 완성해주는 감독을 만났으니 말이다.


>> 스크린 씹어먹는 두 배우... <내부자들> 살린 조승우와 이병헌

>> <내부자들> 윤태호 작가 "수치심 거세된 권력자들 그렸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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