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톤앤매너(Tone and Manner)라는 말이 있습니다. 광고계에서 먼저 쓰인 용어로 분위기나 방향성, 표현하는 방법 등 전반적인 특성을 통칭해 부르는 말입니다. "이 영화의 톤앤매너는 유쾌하고 따뜻하게 갑시다." 뭐 이런 식이죠.


작년 <안녕, 헤이즐(The Fault in Our Stars>이라는 영화를 기억하시나요? 호흡기를 달고 시한부 인생을 사는 여자와 그녀를 돌봐주는 소년 이야기였습니다. 존 그린의 소설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를 영화화했는데 달콤한 10대 로맨스에 방점을 찍은 동화 같은 영화였죠.


이 글에서 소개할 영화 <미 앤 얼 앤 더 다잉 걸(Me and Earl and the Dying Girl)>의 설정도 <안녕, 헤이즐>과 비슷합니다. 제목 그대로 백혈병에 걸려 죽어가는 소녀가 있고, 내가 있고, 친구 얼이 있습니다. 제시 앤드류스가 쓴 동명의 원작 소설을 신예 알폰소 고메즈 레종 감독이 영화화했습니다.



두 작품 모두 '영 어덜트 소설'을 영화화했다는 것이 공통점인데요. '틴에이지 소설'이 10~15세를 타깃으로 한다면, '영 어덜트 소설'은 16~20세를 대상으로 합니다. 장래 고민, 섹스, SF, 자살, 마약, 술, 왕따, 가족문제 등이 주요 소재가 됩니다.


두 영화는 시한부인생 소녀와 그녀를 돌봐주는 소년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소재가 비슷하지만, 톤앤매너는 전혀 다릅니다. <안녕, 헤이즐>이 유쾌하고 따뜻하다면, <미 앤 얼 앤 더 다잉 걸>은 엉뚱하고 쿨합니다. 전자가 주어진 짧은 시간을 아름다운 사랑으로 채우는 이야기라면, 후자는 그 시간을 우정과 배려로 극복하는 이야기입니다. 전자가 완벽한 남자가 여자를 돌보는 이야기라면, 후자는 미숙해 보이는 남자가 쿨한 여자를 통해 성장해가는 이야기입니다.


두 작품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저는 망설이지 않고 <미 앤 얼 앤 더 다잉 걸>을 고르겠습니다. <안녕, 헤이즐>보다 달달함은 덜하지만,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이 세련됐고, 메시지가 더 풍부합니다.



영화의 주인공 그렉(토마스 만)은 친구 얼(RJ 사일러)과 함께 고전영화를 오마주해 단편영화를 만드는 취미를 갖고 있습니다. 영화광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다양한 영화적 경험을 한 덕분에 <아귀레, 신의 분노>, <시민 케인>, <네 멋대로 해라>, <피핑 톰>, <라쇼몽>, <미드나잇 카우보이>, <시계태엽 오렌지> 같은 영화들을 패러디해 제목을 바꾼 짧은 영화를 만듭니다. 그렉은 어느날 엄마 친구 딸인 레이첼(올리비아 쿡)이 백혈병에 걸렸다는 걸 알게 되고 그녀를 찾아갑니다. 처음엔 가까워질 생각은 없었지만 계속 그녀의 집을 찾아가면서 두 사람은 친구가 됩니다.


영화는 두 사람의 우정이 사랑으로 변하는 과정을 억지로 분위기를 꾸며 만들어내지 않습니다. 그 대신 그렉이 잘하는 것, 즉 영화 창작을 통해 서로 속내를 말하지 못 하는 두 사람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이어줍니다. 그렉과 얼은 레이첼을 위한 영화를 만들기로 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 무언가를 만들 때, 그 창작물은 완성도와 관계없이 더 값진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영화는 클라이막스에서 제시합니다.


영화 속에 그렉이 도대체 영화를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감이 안 온다고 하자 아버지가 영감을 얻는 방법에 대해 조언을 해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밀림에 가서 모험했던 경험을 이야기해줍니다. 하지만, 그렉이 결국 완성한 영화는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니라 레이첼 주위 사람들의 작은 표정들을 묶어 놓은 것이었습니다. 창작이란 일상의 관찰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보여준 장면인 것이죠.


<미 앤 얼 앤 더 다잉 걸>은 2015년 선댄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과 관객상을 동시에 받았을 정도로 뜨거운 호응을 불러일으킨 영화입니다. 알폰소 고메즈 레종 감독은 텍사스-멕시코 국경 지대에서 태어난 미국인으로 마틴 스콜세지, 노라 에프런, 로버트 드니로 등의 개인 조수로 경력을 시작해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바벨>, 벤 애플렉 감독의 <아르고>의 조감독, 그리고 여러 편의 CF 감독을 거쳐 영화계에 입문했고, 두번째 작품으로 이처럼 뛰어난 수작을 남겼습니다.



그렉 역의 토마스 만은 선한 이미지의 마스크를 가진 텍사스 출신 배우로 이 영화에서 베개에 자위하는 엉뚱한 소년으로 시작해 글래머걸의 데이트 신청을 뿌리칠 정도로 자존감을 얻은 남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레이첼 역의 올리비아 쿡은 영국 맨체스터 출신으로 나탈리 포트먼과 클로이 모레츠를 섞어 놓은 듯한 외모를 가졌습니다. 그녀는 죽음 앞에서도 쿨한 소녀를 연기했는데 아마도 머지않아 스타로 발돋움하지 않을까 싶네요. 이 영화는 미국에서 제작비를 건지지 못할 정도로 흥행 실패해 아쉽지만, 아마 언젠가 분명히 그녀의 포텐이 터지는 날이 올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영화엔 카메라 움직임이 굉장히 많은데, 매 쇼트에서 뻔하지 않은 앵글을 잡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게 보입니다. 결정적인 장면에선 독특한 각도에서 고정샷을 사용하고 있는 점도 특이하고요. 그런데 나중에 크레딧 올라갈 때 보니 촬영감독이 정정훈이더군요. 박찬욱 감독과 오랫동안 호흡을 맞추다가 <스토커>로 할리우드 진출한 정정훈 촬영감독은 이후 계속 미국에서 작업하고 있는데 이 영화에서 그의 존재감을 확인하니 반가웠습니다.


마지막으로 음악은 U2의 브라이언 이노가 맡았습니다. 센티멘탈하면서도 크게 튀지 않는 사운드트랙입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