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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지금까지 한국영화 중 가장 표현주의적인 작품이다. 안국진 감독은 이미지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능력이 대단하다. 특히 수남(이정현)이 두 형사의 사이에 앉아 취조당하는 장면은 감탄사를 자아내게 한다. 그 한 장면 속에 주인공의 가난과 광기와 사건이 모두 들어 있다.


나는 처음에 이 영화가 <성냥팔이 소녀>의 현대사회 버전인줄 알았다. 초반에는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성냥공장 소녀>처럼 모든 것을 빼앗긴 불쌍한 소녀의 블랙코미디가 연상됐다. 하지만 영화는 단순히 가난해서 불공평하다고 말하는 류의 이야기가 아니다. 되레 가난한 사람들끼리 작은 욕망을 놓고 싸우는 이야기다. 영화 속에 부자나 권력자는 등장하지 않는다. 오직 고만고만한 사람들끼리 서로 질투하고 싸운다. 그들은 모두 성실을 미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어서 슈퍼마켓 아주머니는 어디에 서명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싸인하고, 반상회에 참가한 여자는 시위 하자는 말에 우리가 무슨 시위냐며 겁부터 낸다.


그중 수남은 가장 성실한 인물이다. 그는 식당 주방에서 일하고, 신문을 돌리고, 우유 배달을 하고, 부잣집 청소를 한다. 그렇게 모은 돈에 은행 빚을 보태 집을 산다. 집을 산 것은 남편의 소원이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식물인간이 됐다. 세상에 이렇게 불쌍한 커플이 또 있을까. 수남은 집이 있지만 그 집에 살 돈이 없다. 하우스푸어다. 세입자에게 사모님 소리를 듣지만 그는 여전히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밤새 노동해야 한다. 이 기막힌 역설을 영화는 무덤덤하게 담아낸다.



영화는 중반까지 굉장히 리드미컬하고 경쾌하다. 진행이 너무 좋아서 감탄하면서 봤다. 하지만 중반부 서영화, 명계남, 이대연 등이 재개발에 대해 설명할 때부터는 템포가 느려진다. 서민들의 역설을 보여주기 위해 재개발을 주요 소재로 사용하고 있는데 굳이 복잡한 과정을 다 설명할 필요가 있었나 싶다. <피에타> 혹은 <복수는 나의 것>처럼 이미지만으로도 충분히 분위기를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 엔딩을 봐도 이 영화에서 재개발 사업은 수남의 심리적 변화를 보여주려는 수단일뿐 목적은 아니었던 것처럼 보인다.


왜 이런 아쉬움을 갖느냐면 재개발로 인한 갈등 상황은 개발도상국인 한국만의 상황이어서 외국 관객들에게 설명하기 쉽지 않아보이기 때문이다. 또 재개발로 인한 불로소득은 '성실한 나라'의 정반대편에 있는 가치이기 때문에 수남이 남편의 병원비를 대는 것 외에 그 돈을 욕망하는 무언가가 더 있어야 할 것 같다. 결국 재개발 사업에 대한 강조 때문에 영화는 조금 더 보편적인 이야기로 갈 수 있는 길을 잃었다. 제목이 영국 동화에서 따온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이니만큼 조금 더 국제적이고, 보편적인 영화였으면 했던 바람이 있었기에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안국진 감독이 죽어가던 한국영화 뉴웨이브에 새로운 자양분을 뿌린 것은 분명하다. 모처럼 흥분하면서 본 한국영화가 탄생했다.



마지막으로 수남 역을 맡은 이정현을 이야기하지 않고 이 영화를 봤다고 말할 수 없다. 영화는 이정현의, 이정현에 의한, 이정현을 위한 영화다. 수남은 이정현이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다. 슬프면서도 섬뜩한, 외로우면서도 기괴한 이미지를 또 누가 표현할 수 있겠는가. <꽃잎>의 소녀가 성장해 <범죄소년>의 철부지 엄마를 거쳐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로 만개했다. 여우주연상 싹쓸이를 기대해본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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