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작년 발표된 김성중의 단편소설 [관념 잼]에는 현실과 관념을 혼동하는 노낙경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비쩍 마른 몸매의 그는 인생 실패 3단 콤보를 겪고 지방으로 내려간다(3단 콤보란, 결혼에 실패하고, 회사에서 짤린 뒤, 퇴직금을 친구에게 사기당한 것이다). KTX를 타고 2시간 거리의 낯선 지방에 홀로 내려온 그는 전셋집을 얻고, 그 집을 새로운 가구로 채운다. 그는 소비를 통해 자기 자신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사모은 현대적인 물건들이 주인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끼리 움직인다는 것이다. 사물은 기능을 발휘할 때가 아니라 가만히 있을 때 훨씬 미학적이라고 생각했는데(예컨대 그라인더는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커피가루를 날릴 때보다 원두가 든 유리병 앞에 그냥 있을 때 더 아름답다) 낙경의 집에 들어온 물건들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스스로를 뽐낸다. 수도꼭지에선 커피가 쏟아지고, 슬리퍼 위에 시곗바늘이 돌아가고, 유리창이 거울로 바뀌는 식이다. 낙경은 그의 물건이 아닌 곰 모양의 유리병을 발견하고 그 속에 갇히는데 그때 누군가 집에 들어오는 걸 보고 놀란다. 유심히 보니 그는 집주인인 자기 자신이었다. 그동안 그는 '관념 잼' 속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영화 <파이트 클럽>은 '관념 잼'과 같은 이야기의 원조 격이다. 소비를 숭상하는 사회에 정면으로 어퍼컷을 날린다. 필요없는 물건은 버리고, 자신의 몸뚱아리를 있는 그대로 돌아보라고 말한다. 켈빈 클라인 모델처럼 근육을 키우는 자기계발은 마스터베이션일 뿐이니 스스로를 알기 위해선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소설 [관념 잼]의 노낙경처럼 영화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잭(에드워드 노튼)은 이케아 가구로 집을 채우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고 있었다. 어느날 그는 자기 집을 폭파시켜버리고 폐허가 된 아파트에 들어가서 살기 시작한다. 그곳에서 문명의 이기를 거부하고 원시 상태의 삶을 추구하려 한다. 하지만 그 공간은 잭에게 일종의 '관념 잼'에 다름 아니었다. 그는 유리병 속에서 다시 빠져나오려 발버둥친다.


내 상상속의 넌

폐허의 록펠러 센터에서

사슴을 쫓고 있어


넌 평생 닳지 않는 가죽 옷을 입고

시어스 타워를 휘감은 넝쿨을 타지


밑에선 사람들이 옥수수를 빻고

빈 도로 위에서 사슴 고기를 말리고 있어


영화 속 타일러 더든(브래드 피트)이 잭을 떠나가기 전 읊조리는 대사다. 도시와 자연이 뒤엉키고, 불면증의 현실과 완벽해지고 싶은 상상이 하나가 될 때 잭은 자기 안의 타일러 더든을 발견한다. 그는 지킬박사와 하이드 혹은 헐크처럼 두려움이 없어지는 자신을 뒤늦게 발견하고 괴로워한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 속에 타일러는 '타일러 더든'이라고 성과 함께 나오는데 잭은 그냥 잭이라는 것이다. 타일러가 잭의 또다른 모습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화자가 타일러에게만 더든이라는 성을 붙여준 것은 그만큼 자신보다는 타일러를 더 완성된 자신으로 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잭은 자동차 리콜 담당 직원이고, 타일러는 비누를 제조해 백화점에 판다. 이 두 직업은 상반된다.


타일러가 만드는 비누는 사람 기름으로 만드는데 이 기름은 성형외과 병원에서 버려진 것이다. 타일러는 쓸모없는 것이 만들어지고 이내 버려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버려진 것을 재활용하는 사이클을 만들어 돈을 버는 셈이다. 반면 잭은 결함이 있는 차의 원인을 조사해 고객에게 새 차로 바꿔줄 것인지 혹은 현금으로 보상할 것인지를 계산해 회사의 손실을 줄이는 일을 한다. 어떤 경우에든 결함이 있는 차는 그냥 버려진다. 잭은 그 과정에서 허무함을 느끼고, 그래서 새로운 가구를 사들여 집을 자꾸만 채우려 한다.



타일러의 비누를 사는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의 몸에서 나온 기름으로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단지 품질이 좋다는 이유로 비누를 구입하는 사람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빈 고리를 완성시키는 일을 한다. 따라서 잭이 보기에 타일러는 자신의 허무한 고리를 채워준 완벽한 인간처럼 보인다. 더 이상 버려지기만 하는 물건(자동차)에 고통스러워하지 않아도 되기에 그는 비로소 불면증에서 해방된다. 잭이 '관념 잼' 속에 갇혀 타일러를 우러러보게 된 것은 이처럼 자신의 이상적인 자아(프로이드가 말한 슈퍼에고)의 모습을 타일러에게 투영시켰기 때문이다.


타일러는 갑자기 잭에게 싸우자고 제안한다. 싸워봐야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눈두덩이 붓고, 이빨이 나가고, 머리털이 뽑히고, 아스팔트에 머리통이 짓이겨져 봐야 비로소 진실한 자신과 마주할 수 있다는 말에 잭의 본능, 즉 이드가 깨어난다. 잭에게 타일러는 이드이자 슈퍼에고다. 이드와 에고, 슈퍼에고를 동시에 지니게 된 타일러로서의 잭은 이제 무서울 것이 없다. 그는 군대를 모아 소비사회의 심장부인 신용카드 회사를 폭파시키기로 결심한다.



타일러를 만나기 전 잭은 자신과 비슷한 상태의 여자를 만났다. 말라 싱아(헬레나 본햄 카터)는 시한부 인생 환자들의 모임에 위장해 들어가 그들의 진심을 엿보며 위안을 얻는 여자다. 죽음을 앞둔 환자들의 진심이 담긴 말은 가짜 소비사회에 진력이 난 잭과 말라에게 위안을 준다. 그러나 잭과 말라 모두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환자들의 모임에 나가지 않는다. 그들 중 한 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시큰둥하다. 불현듯 그곳에서 나눈 포옹이 진짜가 아닌 가짜 팔로 하는 포옹처럼 느껴진 것이다.


손등을 화학약품으로 지져 고통을 온몸으로 느끼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나 자신의 존재 이유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잭에게 다른 고통들은 가짜처럼 보인다. 잭과 말라가 함께 하는 섹스도 마찬가지다. 영화에선 많이 생략되어 있지만 두 사람의 격렬한 섹스 역시 파이트 클럽이다. 유리구두를 신고 파티에 가는 것처럼, 콘돔을 유리구두처럼 신고 파티처럼 온몸을 섞는 순간 두 사람은 각각 자신의 존재 의미를 깨닫게 된다. 섹스가 끝난 다음날 아침 잭은 말라에게 묻는다.


잭: 왜 약한 자들은 강한 자들에게 의지하려고 할까?

말라: 너는 어떤데?


이때 잭은 지하실에 있는 타일러를 쳐다본다. 잭에게는 보이고 말라에게는 안 보이는 타일러는 잭을 향해 대화를 하지 말라고 속삭인다. 잭은 타일러가 말하는 그대로 말라에게 대화 종료를 선언한다. 잭이 타일러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잭은 이상적인 자아인 타일러를 창조했고, 그로 인해 자유로워진 듯 보였지만 결국 자신보다 더 강한 자아에게 의지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소비사회의 지루함을 피해 집도 폭파하고 도망왔지만 사회 시스템보다 더 강한 '관념 잼'에 갇혀버린 것이다.



"신경증은 자아와 관련된 문제이다. 이것은 이상적인 자아 때문에 진정한 자아를 버리는 과정이다. 즉, 우리에게 주어진 잠재력을 실천하지 않고 거짓된 자아를 좇을 때 신경증이 생긴다." - 심리학자 카렌 호니


카렌 호니의 말처럼 신경증은 거짓된 자아에 몰두할 때 찾아온다. 영화 속 '파이트 클럽'은 잭에게 이상적인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무대가 될 수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잭은 자신의 이드이자 슈퍼에고인 타일러 더든을 감당할 수 있는 에고를 갖추지 못했다. 강한 자에게 의지하려는 그가 가진 나태한 생각이 타일러를 자꾸만 적으로 돌리려 했기 때문이다.



영화 <파이트 클럽>은 소비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늘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는 그늘 속에 사는 자들의 힘을 한데 모으는데 성공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엄청난 에너지를 감당할 자아는 갖고 있지 못했다. 그에게 이상적 자아와 거짓된 자아를 판단할 진정한 자아가 결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파이트 클럽>이 만들어진지 16년이 지났고, 이후 <매트릭스>, <스트레인저 댄 픽션>, <인셉션>, <프랭크>,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등 유사한 주제를 다룬 영화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소비 사회의 시스템은 더 견고해졌고, '관념 잼'은 우리를 더 그 속에 꼭꼭 가둬두고 있다. 진정한 자아를 찾지 못한 사람들은 지금도 신제품 카탈로그를 뒤적거리면서 어두운 거리를 헤매고 있을 것이다.




<파이트 클럽>에 대한 몇 가지 사소한 정보:


1. 1999년작으로 20세기폭스가 배급했다. 1998년 6월부터 12월까지 촬영. 6300만달러의 제작비에 비해 흥행수입은 3700만달러로 저조했다.


2. 원작은 척 팔라닉의 소설이다. 그는 캠핑 중 옆 캠프의 라디오 소리가 시끄러워 항의하러 갔다가 맞고 돌아았다. 그는 회사에 출근했는데 아무도 상처에 대해 묻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성의없이 이렇게 물었다. "주말 잘 보냈어?" 그때 이 소설의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사람들은 인간 관계에 깊게 개입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3. 1995년작 <쎄븐>의 각본가 앤드류 케빈 워커가 <파이트 클럽>의 드래프트를 일부 썼다. 하지만 그는 규정상 크레딧에 이름을 올릴 수 없었는데 이에 데이비드 핀처는 그의 이름을 경찰관 앤드류, 경찰관 케빈, 경찰관 워커, 이렇게 나누어서 등장인물의 이름으로 썼다. 존이 자수했을 때 고환을 떼려고 덤벼드는 경찰관 세 명이다.


4. 거유증을 앓는 밥 폴슨은 미트 로프가 맡았다. 그는 1975년 <록키 호러 픽처 쇼>로 배우 데뷔한 뒤 1977년 로커로써 'Bat out of Hell'을 내면서 대스타가 됐다. 하지만 그는 1980년대초 한동안 노래를 못하게 되면서 체중 관리에 실패했다. 그가 잭을 꼭 안아주는 포옹 속에는 그런 우여곡절이 담겨 있는 듯하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댓글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