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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어린 시절이 오래 지속될 거라고 믿는다. 아이들이 "빨리 커서 어른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이유는, 어른이 된다는 게 뭔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잘 모르니까 잘 알게 되면 지금의 고민이 해결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알 것이다. 어른이 되어도 별 수 없다는 것을.


성장하는 모든 것은 감동이다. 성장은 공짜로 주어지지 않는다. 내면 속에서 치열한 전투 끝에 비로소 성장이 찾아온다. 키가 한뼘 자라기 위해선 영양소의 균형이 맞아야 하고, 한 살을 먹기 위해선 365일을 하루하루 살아내야 한다. 더 넓은 세상에서 더 많은 현상들을 인식하고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찾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성장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조직이 성장하려면 사회구성원들이 새로운 가치를 찾아내야 하고, 인류가 성장하려면 그 가치가 골고루 뿌려져 문명의 토양으로 굳어져야 한다.


성장은 어린 시절에 국한된 신체 발달상황이 아니라 늙어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가치다. 몸이 다 성장한 뒤에도 사람들은 성장에 목말라한다. 그래서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 나이가 되면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고민하면서 슬픔에 빠진다. 이때 슬픔은 다시 한 번 인간을 성장하게 한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정호승의 시 '슬픔이 기쁨에게'의 첫 구절이다. 시인의 노래처럼 슬픔은 마냥 배척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슬픔은 기쁨을 위한 일보후퇴다. 슬픔이 없는 감정은 건조해서 뿌리내리지 못한다. 인생이 한 그루의 나무라면 슬픔은 나무에 물을 주는 행위다. 나무는 슬픔을 머금을 때 비로소 잘 자랄 수 있다.


슬픔을 의미하는 '멜랑콜리'는 라틴어 '흑담즙(melan chole)'에서 왔다. 히포크라테스 시절 '사체액설'은 인간이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기쁨, 분노, 냉담, 슬픔이 조화를 이루어야 건강해진다는 것이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선 이 네 가지 감정에 ‘소심'이라는 감정 하나를 더 추가해 다섯 가지 감정이 인간을 지배한다. 어떤 감정이 주연이냐에 따라 그 사람의 성격이 달라진다. 영화 속에서 11세 소녀 라일리의 머릿 속을 지배하는 주인공은 기쁨이지만, 엄마의 주연은 슬픔, 아빠의 주연은 분노다.



라일리는 기쁨의 감정이 세상의 모든 것이 아님을 알아간다. 영화는 다섯 가지 감정을 의인화해 모험극의 형식을 빌려 그 과정을 묘사한다. 길고 긴 모험의 끝에 라일리는 행복은 기쁨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기쁨과 슬픔이 조화를 이룰 때 찾아온다는 것을 깨닫는다. <인사이드 아웃>은 그 과정을 성장통이라고 말하는 영화다. 어린이 관객을 대상으로 만들었지만 아이 손을 잡고 극장을 찾은 부모 관객들이 더 공감할 영화다. 그들은 이미 성장통을 겪었고 그로 인해 슬픔의 역할에 공감하는 나이가 됐기 때문이다.


영화에 '빙봉'이라는 캐릭터가 나온다. 라일리의 상상 속 동물인 빙봉은 솜사탕으로 만들어진 몸, 고양이의 발, 코끼리의 코, 돌고래의 울음소리를 동시에 갖고 있는데 기쁨이를 따라다니며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그에게 도움을 준다. 영화를 본 관객들이 SNS를 통해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캐릭터는 기쁨이나 슬픔이가 아닌 빙봉이었다. 나만을 쫓아다니며 나에게 도움을 주는 빙봉은 말동무이자 친구이자 든든한 조력자로 어린 시절 한 번쯤 상상해봤음 직한 존재다. 그래서인지 빙봉 캐릭터를 보며 어린 시절 소중했던 추억을 떠올렸다는 어른 관객들이 많았다.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 캡처


그런데 빙봉은 최근 갑자기 등장한 '종이접기 아저씨' 김영만 현상과도 겹친다. 인터넷과 지상파TV의 콜라보레이션 프로그램에 출연한 그는 어린 시절 그의 방송을 보고 자란 80~90년대생들에게 추억을 선물했다. 방송이 전파를 탄 후 SNS에는 그를 추억하는 20~30대들로 난리가 났다. "꼬딱지들도 이제 어른이 됐으니 종이접기 잘 할 수 있겠죠?" "어려우면 엄마한테 부탁해보세요. 환갑이 되셨어도 종이를 접어달라고 하면 좋아하지 않을까요?" 그의 이런 멘트에 청춘의 막바지에 있는 이들은 울컥했다.


70년대 학번의 '쎄시봉' 세대, 90년대 학번의 '건축학개론' 세대에 이어 등장한 2000년대 학번의 '종이접기' 세대는 이제 선배들이 거쳐갔던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을 곱씹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어린 시절의 성장통과 마찬가지로 슬픔을 행복으로 승화시킨다는 점에서 어른이 된 그들의 추억나눔 역시 또 한 번의 성장통의 과정이다. 성장통은 '인사이드 아웃'이 보여준 것처럼 격한 감정의 분출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성장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기쁨이 슬픔에게 추억을 선물하며 함께 가자고 제안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심리학 교재로도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하다.



나를 조종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컨셉트는 <존 말코비치 되기> <스트레인저 댄 픽션> <아바타> 등을 떠올리게 하지만 그것이 다섯 개의 순수한 감정이라는 설정은 어디서도 본 적 없을 만큼 독특하다. 또 남자를 복제해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로 만들고 상상 속 동물 친구 빙봉과 잠재기억 속으로 여행을 떠나는 상상력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다.


<인사이드 아웃>은 픽사의 15번째 장편 애니메이션이다. 15편 중 실패한 작품이 없고 발표하는 영화마다 늘 신선함을 잃지 않는 픽사의 놀라운 창의성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픽사의 에드 캣멀 사장은 그의 저서 '창의성을 지휘하라'에서 픽사의 문화를 설명한 적이 있는데 그에 따르면 픽사엔 직급에 관계없이 자유롭게 아아디어를 발표하고 브레인스토밍할 수 있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다. 아이디어를 제안한 사람을 보는 게 아니라 아이디어 그 자체만을 보기 때문에 누구도 비판받을 게 두려워 발언을 망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존 래시터 CCO를 수장으로 한 픽사의 감독들은 작품이 진행되는 단계마다 브레인트러스트 회의를 열어 서로의 작품에 대해 자유롭게 비판한다. 이 과정은 영화가 감독만의 생각에 갖혀 큰 그림을 놓치는 것을 막아준다. 피트 닥터 감독의 <인사이드 아웃>도 마찬가지다. 그는 이미 <몬스터 주식회사>와 <업>을 성공시킨 유명 감독이지만 여전히 브레인트러스트 회의에 참석해 다른 감독들의 솔직한 지적을 들어야만 했다.


픽사의 구성원들은 독창적인 제품은 처음부터 완벽한 형태로 나오는 게 아니라 시간과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 고쳐나갈 때 탄생한다고 믿는 이들이다. 세상에 어떤 스튜디오가 감정을 주인공으로 한 애니메이션을 만들겠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픽사니까 가능한 도전이고 그 도전의 결과물은 픽사의 명성을 잇는 위대한 작품으로 남았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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