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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면 육체적으로 힘들어서 그만두는 운동선수라면 모를까, 영화감독들이 너무 빨리 현장을 떠나는 현상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다. 조훈현 9단도 아직 자기 손녀뻘이 되는 선수와 한판 승부를 벌이는데, 한국 영화계는 조로현상이 너무 심한 것 같다. 나이 들어 영화 만들면 뭐 어떤가. 20, 30대 감독처럼 신인감독의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면 되지. 오히려 나는 정말로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나이 든 사람도 영화를 얼마든지 잘 만들 수 있다는 걸 직접 보여주고 싶었다."

- 故 조세래 감독 [씨네21] 인터뷰 중



이 영화, 올드하다. 스타일도 투박한데다 소재마저 바둑이다. 바둑이라니, 조훈현이 카퍼레이드를 벌이고 이창호가 주름잡던 80, 90년대에나 통했을까, 요즘 누가 바둑 두나? 그런데 둔다. 故 조세래 감독은 80년대에 쓴 이 시나리오를 다듬고 또 다듬었다. 그리고 마침내 정성스럽게, 있는 힘을 다해 한 판 두었다. 평생 아마추어 영화인으로 살아온 감독에게 이 바둑은 아마추어의 프로 데뷔전이다. 그런데 그는 첫 프로기전의 승패를 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영화는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여 평단의 호평을 받았지만 올해 6월 개봉한 극장가에서는 관객에게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아니, 관객에게 홀대받기 이전에 극장에서 문전박대 당했다. 스타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양성영화로 분류됐고 그마저도 '퐁당퐁당' 평일 낮시간대 교차상영으로 극장에 가도 영화를 볼 수 없었다. 마치 불운했던 감독의 인생처럼,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바둑의 운명처럼, 정상급 프로들과 맞짱 뜨기에는 기력이 부족한 아마추어처럼 서서히 잊혀져 갔다. 그렇게 소리소문없이 사라진 영화가 최근 IPTV에서 공개됐고 뒤늦게 영화의 진정성을 알아본 관객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스톤>은 웹툰 <미생>이 그랬던 것처럼, 바둑이 인생을 만나 한 수 대국을 청하는 영화다. 그래서 사람들과 떠들썩하게 나누는 것보다 집에서 혼자 보며 한 수 한 수 복기하고 싶은 영화다.



"인생이 바둑이라면 첫 수부터 다시 두고 싶다"


기원에 살다시피 하면서 내기바둑으로 인생을 허비하고 있는 청년 박민수(조동인)는 프로가 되지 못한 아마추어 최강자다. 어느날 조폭 두목 남해(김뢰하)가 기원에 찾아오고 마침 바둑에 심취해 있던 남해는 민수를 사범으로 모시며 친해진다. 나이가 적어도, 가난해도, 권력이 없어도, 단지 치수에 따라 기력이 약한 자가 돌을 더 깔고, 누구나 공평하게 한 수씩만 두는 것이 바둑이다. 남해는 바둑을 두면서 깡패로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돌아본다. 그래서 뒤늦게 자신이 배신했던 옛 보스(오광록)를 찾아간다. 그러나 한 번 지나간 인생은 물릴 수 없는 것이어서 과거 젊은 시절 놓았던 수들이 모여 지금 자신의 인생이라는 바둑을 만들었다. 문전박대 당하고 돌아온 남해는 깡패생활을 청산하고 동해의 작은 마을로 내려가 기원을 운영하며 살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그에게는 챙겨야 할 부하들이 있고 구역 싸움을 하는 적 종태(손종학)가 있다.


남해가 깡패 짓밖에 잘 하는 게 없었던 것처럼, 민수 역시 바둑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청년이다. 민수는 남해에게 건달을 해보면 어떨까 묻는다. 그러자 남해는 민수의 눈앞에 바둑돌과 칼을 나란히 올려놓는다. "넌 평생 칼이 아닌 돌을 잡아왔다. 돌로 승부를 봐라." 그러나 민수는 반문한다. 파릇파릇했던 연구생 시절도 아니고 뒤늦게 입단해서 프로가 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그러나 인생에는 '이세돌의 길'만 있는 것은 아니다. 타이틀이 없어도 프로는 프로다. 남해는 민수를 이렇게 꾸짖는다. "이세돌만 프로기사고, 박지성만 프로선수냐? 다른 사람 인생은 인생도 아니냐?" 남해와 민수는 중년과 청년으로 나이 차이는 많지만 조폭과 바둑이라는 각자의 세계에서는 모두 퇴물 취급 받는 나이다. 남해는 자신을 따르는 인걸(박원상)에게 조심스럽게 은퇴를 제안받고, 민수는 국수전에서 우승한 옛 친구와의 술자리에서 쓰디 쓴 소주잔을 홀로 들이킨다.



"아마추어는 돈이 걸려야 바둑을 두지만 프로는 술 한 잔에 바둑을 두지"


어느날 남해는 구역다툼을 하던 종태로부터 재개발 사업을 함께 하자는 제안을 받는다. 승낙하고 재개발 사업주와 바둑을 두는 자리를 마련했는데 민수가 바둑판을 박차고 나온다. 가난한 사람들을 쫓아내려는 모의를 하는 자리에서 접대바둑은 둘 수 없다는 것이다. 거리를 방황하던 민수는 새벽 4시 남해를 우연히 만나 술 한 잔을 기울인다. 그 자리에서 남해는 민수에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한다. "넌 프로가 돼라. 그러면 난 그 사업을 포기하겠다." 깡패가 더이상 깡패로 살지 않겠다는 것, 그것은 남해의 인생에선 뒤늦게 죽은 줄 알았던 대마를 살려보려는 묘수를 찾은 것이었지만 반대로 잘못될 경우엔 대마를 더 키워 죽이는 악수가 될 수도 있었다.


민수가 입단선발전에 참가한 시간, 남해는 자신에게 등돌린 부하 상식(조지환)의 습격을 받는다. 그때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왔던 민수와 남해는 서로 연결된 듯 불길한 예감을 공유한다. 민수는 최종선발전에서 돌을 던지고 남해를 찾아온다. 미리 여섯 점을 깔고 민수를 기다리던 남해는 자신 생애 마지막 대국이 될 지도 모르는 바둑을 두기 시작한다.


두 사람은 애초 포석부터 잘못 깔고 인생을 시작했다. 실패를 만회하려 발버둥쳤으나 한 번 놓인 돌은 물릴 수 없어 고군분투하다 코너에 몰렸다. 영화 속에서 바둑으로 경지(境地)에 올랐다며 자주 언급되는 이세돌 역시 실전에서는 포석이 약한 바둑을 둔다. 그러나 이세돌은 대국점을 찾아내는 공격 바둑으로 자신의 약점을 뒤집는다. 민수와 남해에게도 인생을 뒤집을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될까? 남해는 결국 종태의 오른팔 천수(허준석)의 방해로 인해 대국을 마무리짓지 못한다. 그러나 민수는 1년 후 아마추어 최강자로서 기전에 출전해 파란을 일으킨다. 아마추어와 프로의 경계는 성공과 실패의 경계가 아니라는 것을 자신의 삶으로 증명해보인 것이다.


바둑은 사느냐 죽느냐의 승부다.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있는 경기여서 반 집이라도 더 많은 집을 확보하면 이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상대방을 힘으로 무너뜨리려 하다가는 되레 자신이 역공을 당해 패하는 것이 바둑의 오묘한 세계다. 이것이 많은 고수들이 바둑을 인생에 비유하는 이유다. 자신의 기력을 쌓기 위해 정진하고 치수를 맞춰 두는 것이 정정당당한 바둑이고 삶이다. 한 수 한 수 잘 두다가도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끝내기에서 뒤집히는 바둑의 속성도 인생을 닮았다. 완벽할 정도의 커리어를 쌓아놓았다가 한 순간에 무너지는 인사들을 우리는 삶에서 많이 접할 수 있다.


최근 <스톤>을 비롯해 <미생> <신의 한수> 등 바둑을 소재로 한 웹툰과 영화가 몇 편 만들어졌는데 이중 <스톤>만의 장점은 감독이 평생 바둑에 대한 애정을 갖고 살아온 사람이라는 점에서 오는 진정성에 있다. 주연을 맡은 감독의 아들 조동인 역시 수준급 아마추어 기사라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영화 속에서 그가 바둑돌을 다루는 솜씨도 능숙해 보인다. 프로들은 손을 놓는 모양만 봐도 다르다. 아, 조동인은 감독의 아들이어서 캐스팅됐을 거라는 색안경을 끼지 않아도 좋을 만큼 신선한 마스크를 가졌고 꽤 괜찮은 연기를 보여준다. 영화 속 민수가 아마추어 최강자가 된 것처럼, 차세대 충무로 기대주로서 가능성이 충분하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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