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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베른의 한 고등학교에서 고전문헌학을 가르치는 그레고리우스(제레미 아이언스)는 집과 학교를 오가는 단순한 삶을 살고 있는 중년의 남자다. 비가 오는 어느날 그는 다리 위에서 자살하려는 젊은 여자를 구한다. 그런데 여자는 빨간색 코트만 남겨둔 채 홀연히 사라진다. 빨간색 코트 안에는 포르투갈어로 된 책 한 권과 기차 티켓이 들어 있다. 기차 티켓의 행선지는 리스본이고 출발하기 15분 전이다. 남자는 베른역으로 달려가서 기차에 올라탄다. 아무 짐도 없이, 아무 연고도 없이, 가르쳐야 할 학생들을 남겨둔 채, 작고 낡은 책 한 권에 이끌려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몸을 싣은 것이다.


리스본에 도착한 그레고리우스는 책의 저자를 좇는다. 저자는 1974년 4월 25일 포르투갈 카네이션 혁명 과정에서 사망한 아마데우 프라도(잭 휴스턴). 딱 100권만 출간했다는 책의 흔적을 찾아가는 과정에 포르투갈의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영화는 살아있는 자들의 증언을 통해 아마데우가 사망하기 1년 전과 현재를 오가며 그의 짧은 생을 파헤치는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국인들에겐 낯선 포르투갈 카네이션 혁명은 살라자르 36년 독재의 잔재를 시민의 힘으로 쓰러뜨린 무혈혁명이다. 혁명의 분위기는 살라자르가 사망한 1970년부터 감지되고 있었다. 살라자르의 후계자 카에타노는 식민장관 출신의 파시스트로 야당을 인정하고 일부 언론규제를 완화하는 등 개혁정치를 하는 시늉을 보였으나 기본 골격은 살라자르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아프리카 식민지 독립운동을 무리하게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만성 인플레이션을 비롯한 경제 후유증에 시민들은 지쳐갔고 이에 군부는 쿠데타를 준비하고 시민들은 레지스탕스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쿠데타의 중심은 좌파 청년장교들이었다. 여기에 하급장교들마저 명령불복종으로 쿠데타군에 가담하면서 전세는 초반부터 완전히 기울었고, 시민들은 이에 화답해 군인들의 총구에 카네이션을 꽂아줌으로서 민중혁명으로 발전했다. 카에타노는 브라질로 망명해 그곳에서 죽었다. 이후 청년장교 중심의 군사정부는 해외식민지를 독립시키고 민주헌법을 도입했고 국민투표를 통해 민간에게 정부를 평화적으로 이양했다.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기 힘든 이 평화적 '좌파 쿠데타'가 벌어진 4월 25일을 포르투갈은 국경일로 기념하고 있다.



영화의 배경인 1973년은 시민들이 저항군을 조직하고 젊은 장교들이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던 시기다.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는 말처럼 1973년은 한국의 1978년 혹은 1986년처럼 정권의 무자비한 탄압 속에 레지스탕스 운동이 간간히 벌어지던 시기였다. 아마데우 역시 혁명군에 가담했는데 그곳에서 절친 조르주 오켈리(아우구스트 디엘)와 에스테파니아(멜라니 로랑)를 만난다.


이들은 혁명이라는 대의에 목숨을 건 젊음이기 전에 사랑에 피끓는 청춘이기도 했다. 한 여자를 놓고 두 남자의 삼각관계는 회복할 수 없는 갈등으로 이어졌고 출신계급이 달랐던 아마데우와 조르주는 서로에 대한 오해로 인해 영영 헤어지고 만다.


영화는 관찰자인 그레고리우스의 시점으로 세 사람의 과거와 현재를 추적하면서 이들의 비극적 삶이 혁명만큼 가치 있었는지 묻는다. 오해와 질투 속에 사랑을 포기하면서 결국 이들이 얻어낸 것은 무엇이었을까? 포르투갈은 독재에서 해방됐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혁명은 빛바랜 책 속의 낡은 단어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혁명에 목숨을 바쳤던 이들은 당시 저항의 후유증으로 불행하게 살고 있다. 그들은 혁명의 한가운데에서 뜨겁게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남자인 아마데우의 죽음에 책임을 느껴 고통스러워한다. 이것이 그레고리우스가 계속해서 아마데우의 삶을 추적하는 이유다. 평범했던 자신의 삶에 비해 아마데우의 짧은 생은 참으로 강렬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한 지식인이 과거 독재정권 시절을 회상하는 형식의 영화라는 점에서 한국영화 <오래된 정원>을 떠올리게 한다. 감독은 <정복자 펠레>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던 노장 빌 어거스트. 영화는 파스칼 메르시어 원작 소설의 유려한 문체를 잘 살려내지는 못해 투박한 편이지만 뜨거웠던 혁명의 현장을 찾아갈 때의 느낌 만큼은 활자보다 영상이 더 아련하게 다가온다.


아마데우가 쓴 책에 등장하는 글귀처럼, 우리는 어떤 장소를 떠날 때 뭔가를 뒤에 남기고 가는 것이어서 우리의 무언가는 거기에 계속 머문다. 그레고리우스는 어느날 우연히 무언가에 이끌려 여행을 떠났다. 한 장의 편도티켓을 들고 간 그 여행에서 그는 40년 전 포르투갈의 뜨거웠던 시간을 살았던 한 남자를 알게 됐지만, 정작 그가 찾아낸 것은 그동안 모르고 있던 자기 자신의 모습이었다. 이제 그레고리우스의 남은 인생은 더이상 예전 같지 않을 것이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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