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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영화에는 단 한 장면이 있습니다. 잘 만든 영화는 단 한 장면만으로도 기억이 되곤 하지요. 허진호의 영화에도 그런 장면들이 있었습니다. 가령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심은하가 사진관을 바라보는 장면과 한석규가 신구에게 TV 리모콘 작동법을 알려주는 장면, <봄날은 간다>에서 이영애의 "라면 먹고 갈래요?"에서 이어지는 유지태의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라는 대사가 그랬죠.


그런데 허진호라는 이름에서 느껴지던 기대감은 거기까지인가 봅니다. <봄날은 간다> 이후의 작품들은 <봄날은 간다>를 뛰어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외출>은 <화양연화>의 모텔 버전 같았고, <행복> <호우시절>은 무난하게 만들었다는 감상 이상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위험한 관계>는 어떨까요? 아쉽게도 허진호는 점점 무난한 감독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허진호의 인장마저도 퇴색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냥 중국 감독이 만든 중국 영화 같습니다. <호우시절>에는 낭만적인 대사가 있었습니다만 <위험한 관계>에는 짧게 짧게 끊어가는 클로즈업 위주의 예쁜 화면만 존재합니다. 인물 심리를 흔들리는 카메라가 대신 표현해주고 있지만 대사가 약하다보니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소설 [위험한 관계]는 미국, 프랑스, 한국, 일본 등에서 여러차례 영화화 됐습니다. 원작은 1782년 프랑스혁명 발발 이전 바로크 시대의 프랑스 귀족사회를 배경으로 한 서간체 소설입니다. 바람둥이 발몽과 메르테이유 후작부인이 순수한 미망인 마담 드 투르벨을 두고 내기를 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죠. 175통의 편지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발매 당시 사회적 파장이 커서 판금 조치를 당했다고도 하죠. 부도덕한 인간관계를 적나라하게 묘사했기 때문입니다. 현대에 이 소설이 자주 영화화되는 이유는 아마도 당시의 연애관이나 상류사회 등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돈많은 집에 시집가는 처녀, 부자로 태어나 한량으로 살아가는 바람둥이, 그와 대적하면서 간계를 부리는 팜므파탈을 소재로한 삼각관계는 여전히 신선하게 느껴집니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한 영화를 비교해볼요?


1959년 <위험한 관계> 로저 바딤 감독, 제라르 필립, 잔느 모로, 아네트 바딤

1988년 <위험한 관계> 스티븐 프리어스 감독, 존 말코비치, 글렌 클로스, 미셸 파이퍼

1989년 <발몽> 밀로스 포먼 감독, 콜린 퍼스, 아네트 베닝, 멕 틸리

1999년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 로저 컴블 감독, 라이언 필립, 사라 미셸 겔러, 리즈 위더스푼

2003년 <스캔들: 남녀상열지사> 이재용 감독, 배용준, 이미숙, 전도연


첫 세 편은 원작의 시대적 배경을 그대로 살린 작품들인 반면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은 현대 미국 청년들, <스캔들>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물론 허진호의 2012년작 <위험한 관계>는 1930년대 상하이를 배경으로 했죠. 1930년대 상하이와 1780년대 프랑스는 혁명 전야라는 점에서 왠지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세상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데 귀족들은 한가롭게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내기를 하고 있으니 그 철없음이 시대배경과 확연하게 대비됩니다. 결국 그들의 놀이는 파국으로 치닫게 되죠.


개인적으로 <위험한 관계> 하면 스티븐 프리어즈 버전이 가장 먼저 떠올라서 바람둥이 발몽 역할에 자동적으로 존 말코비치가 연상되기는 합니다만, 배용준, 장동건처럼 부드러운 외모의 남자도 잘 어울리는 듯합니다. 특히 장동건 연기는 참 좋았습니다.


<위험한 관계>는 결국 허영심 속에서 진실한 마음을 발견하는 텍스트입니다. 인물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카메라는 천정의 분절된 거울을 통해 담았습니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거울장면 하나만큼은 마음에 들었습니다만 그것만으로 훗날 이 영화를 기억하기에는 각본과 연출력이 약해보입니다. 관객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는데 카메라만 흔들리고 있는 것 같달까요?




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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