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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튼 토마토 신선도 95%, ‘대부’와 ‘기생충’을 뛰어넘는다는 호평. 워쇼스키 자매 이후 최고의 듀오로 불리는 ‘다니엘스’ 다니엘 콴, 다니엘 쉐너이트 감독의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놀랍도록 신선하고 절대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영화다.

모든 것을 결합하면서도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시니컬하면서도 한편으론 따뜻한 영화. 중년 여성의 부부관계 가족 드라마에 쿵푸 액션, SF, B급 감성 블랙코미디 등 온갖 장르의 범벅이면서도 길을 잃지 않고 확실한 메시지를 던지는 영화. 아시아계 미국인을 과감하게 주연으로 택하고 영어와 중국어를 동시에 집어넣은 실험적이고 진취적인 영화. 경계에서 시작해 범우주적인 스케일로 나아가는 야심찬 영화.

‘모든 것 모든 곳 단번에’ 라는 오묘한 제목은 너무 광범위해서 이 영화에 대해 사실상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는다. 영화는 모두에게 친절하라고 말하고 있지만 너무나 불친절한 제목은 이 영화가 가진 또다른 아이러니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보이는 만화경 같은 영화라고 할까. 2시간 20분 동안 환희와 감동과 함께 미궁에 빠지게 만드는 이 작품에 대해 살펴보자.

 



영화는 세 개의 챕터로 나누어져 있다. 제목인 ‘모든 것’ ‘모든 곳’ ‘단번에’가 각각 챕터의 타이틀이다.

미국에서 빨래방을 운영하는 중국계 중년 여성 이블린(양자경)은 이혼을 요구하는 남편 웨이먼드(키 호이 콴), 여자친구를 인정해달라는 딸 조이(스테파니 수)로 인해 정신없는 날들을 보내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깐깐한 국세청 직원 디어드리(제이미 리 커티스)는 영수증을 꼼꼼히 점검하고는 제대로 제출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모든 것이 최악인 것 같은 그때, 남편 웨이먼드가 다른 사람으로 빙의하더니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당신 남편이 아니라 알파버스에서 온 알파 웨이먼드야. 당신을 구하러 왔어.


그는 이블린에게 아주 엉뚱한 행동을 한 뒤 청소도구함에 있는 자신을 상상하라고 말한다. 그러자 이블린은 자신이 청소도구함에 있는 체험을 하게 된다. 마치 양자역학처럼 두 공간에 동시에 존재하게 된 것이다. 그때 디어드리가 문을 부수며 가공할 힘을 가진 괴물로 나타나고 웨이먼드는 이블린을 가까스로 구출해낸다.

알파 웨이먼드에 따르면 알파버스의 이블린은 멀티버스를 이동할 수 있는 버스점프 기술을 개발했다. 엉뚱한 상상을 한 뒤 귀에 찬 이어폰의 버튼을 누르면 멀티버스의 또다른 자신으로부터 능력을 전수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멀티버스에는 가공할 능력을 가진 악당이 있다. 모든 멀티버스를 자유자재로 이동할 수 있는 악당 조부 투바키가 여러 멀티버스의 이블린들을 차례로 제거하고 있다. 이에 웨이먼드를 포함한 알파버스의 점퍼들이 남아있는 이블린을 구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매트릭스’의 네오처럼 혹은 ‘터미네이터’의 존 코너처럼 웨이먼드는 이블린이 꼭 구해야 할 단 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다른 SF영화들과 차이점이 있다면 이블린과 웨이먼드가 위기에 빠진 부부라는 것이다. 이블린은 인류를 위해 꼭 필요한 존재임과 동시에 가족에서도 꼭 필요한 존재(여야 한)다. 이제부터 영화는 이 두 가지를 계속해서 병치시키면서 가족이 하나의 작은 우주이고 우주가 곧 넓은 의미의 가족이라고 말한다.

 


지금의 나는 작은 선택들이 모여 이루어진 결정체다.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지금의 내 인생은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마치 나비효과처럼 모든 것은 연결돼 있다. 멀티버스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으로 이루어진 세계이기에 이블린은 무한대로 뭐든 될 수 있다. 이블린은 웨이먼드의 구애를 거절한 뒤 소림사 쿵푸를 연마해 영화계 톱스타가 된 자신을 상상한다. 마치 이블린을 연기한 양자경이 배우로서의 양자경에게 능력을 빌려오는 것과 비슷하다. 이제 이블린은 버스점프를 통해 쿵푸 능력을 갖게 됐다. 알파버스에 사는 사람들이 우주 최악의 빌런이라고 부르는 조부 투바키에 맞서 싸울 수 있게 됐다.

 

당신은 다른 모든 멀티버스의 당신 중에서도 최악의 삶을 살고 있어. 그러니 뭘 해도 지금보다는 나을 거야.


빨래방을 운영하는 이블린에게 웨이먼드가 이렇게 말한다. 아마도 ‘올해의 대사’로 널리 회자될 것 같은 이 대사는 이 정신없는 영화를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게 만들 일등공신이다. 우리는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 늘 후회하며 지금은 살아간다. 그때 그 여자/남자를 만났더라면, 그때 그 직업을 택했더라면, 그때 집을 샀더라면, 그때 주식을 팔았더라면, 그때 그 길로 갔더라면 등등 후회와 미련은 끝이 없다. 지금의 나는 지금까지 모두 최악의 선택만 해왔기에 이 모양 이 꼴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가지 않았던 길이 너무나 궁금해질 것이다. 이 영화는 그런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블린은 버스점프를 통해 다른 길을 택했던 또다른 나를 상상해 소환한다. 유명 배우가 된 ‘나’, 철판 요리를 하는 ‘나’, 핫도그 소시지 손가락을 가진 ‘나’, 전투력 만렙인 ‘나’ 등등 이론적으로 멀티버스는 무한대로 존재하기에 이블린은 뭐든 될 수 있다.

 

조부 투바키로 빙의한 딸 조이


이블린이 상대하는 악당 조부 투바키가 이블린의 딸 조이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도 흥미롭다. 사춘기 딸이야말로 엄마에게 난공불락 요새처럼 절대 속을 알 수 없는 존재일 것이다. 영화는 우주를 가족에 빗댄 은유법으로 많은 관객에게 공감을 얻고 있다.

이제 막 멀티버스를 알게 돼 의욕이 넘치는 이블린은 10대 딸이 하는 게임이 궁금해 도전해보다가 빠져든 여느 엄마들을 닮았다. 반면 딸은 멀티버스를 섭렵한 나머지 세상이 시시해졌다. 누구를 죽인들 어차피 다른 세상에 가면 또 그 사람이 살고 있다. 삶과 죽음은 무한대 병렬로 이어져 결코 끝나지 않는다. 조부 투바키는 “이 세상에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말과 “처음부터 이곳이 싫었다”는 비관적인 말만 계속해서 늘어놓는다. 그러면서도 엄마인 이블린을 찾아다닌다. 아마도 세상이 시시하게 느껴지는 자신의 고통을 이해해줄 사람은 엄마뿐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현실 남편이자 알파버스 동지인 웨이먼드


멀티버스를 넘나들며 또다른 자신의 능력을 불러올 수 있게 된 이블린 이전에 웨이먼드가 있었다. 현실 세계에서 남편인 그는 또다른 세계에선 이블린을 돕는 ‘매트릭스’의 트리니티 같은 존재였다. 두 사람의 인연은 어떤 우주에서도 연결되게 되어 있었다.

 

내가 세상을 밝게 보는 건 순진한 게 아니야. 그런 전략이 필요했을 뿐이야.


웨이먼드는 자신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이블린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는 빨래방에서 불만에 가득 찬 손님들을 정성스럽게 대하고 국세청 공무원 디어드리의 분노를 누그러뜨리려 비위를 맞춘다.

 

이블린은 그동안 웨이먼드를 한심하게 바라봤지만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에브리씽 베이글을 견뎌내는 우여곡절을 겪고나선 친절이야말로 세상을 변화시킬 가장 강력한 무기라는 것을 깨닫는다. 딸에게 빙의한 조부 투바키를 없애려면 딸을 죽여야만 하는데 이블린은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죽이지 않고 악당의 마음을 돌릴 방법을 생각한다. 누군가의 마음을 얻는 방법은 그 사람에게 결핍된 것을 채워주는 것이다. 절실하게 필요로하는 것일수록 그 사람은 진정성을 보여줄 가능성이 크다. 세상을 밝게 보는 긍정적인 마인드는 상대방에게 동기를 부여한다. 이 과정에서 친절한 태도는 기본이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이블린이 악당들을 죽이지 않고 한 명씩 감화시키면서 물리치는 장면이다. 여느 액션 영화라면 총이나 무술로 악당의 부하들을 단번에 죽여버릴텐데 이 영화는 그렇게 간단하게 처리하지 않는다. 한 명씩 멀티버스의 또다른 나를 보여주고 그들이 악당이 아닌 다른 삶을 살았다면 어땠을지 가정법으로 회개(?)시킨다. 이 과정이 아주 빠른 속도로 진행되지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하기 쉽게 편집되어 있다.

 


‘매트릭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라따뚜이’ ‘구니스’ ‘폴리스 스토리4’ ‘소림사’ ‘화양연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보고 떠오른 영화의 제목들이다. 영화는 유명한 장면을 그대로 재현하는 방식으로 매우 직접적으로 이 영화들에 오마주를 바치고 있다. 이블린이 영화 스타가 되고 난 뒤 웨이먼드와 재회하는 장면의 로맨틱한 무드는 왕가위 영화 ‘화양연화’를 떠오르게 한다. 요리사 채드가 모자에 너구리를 숨기고 있는 장면은 픽사 애니메이션 ‘라따뚜이’의 생쥐 레미가 요리사 링귀니의 모자 안에서 머리카락을 조종해 요리를 만드는 장면을 인용한 것이다.

돌 2개가 대화하는 장면은 1969년 발표된 동화 ‘Sylvester and the Magic Pebble’과 2017 비디오게임 ‘Everything’에서 영향받았다.

 

다니엘 콴, 다니엘 쉐너이트 감독


2010년부터 멀티버스 아이디어를 생각했다는 다니엘스 감독은 2018년 영화를 준비할 때 개봉한 마블의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를 보고 좌절했다고 한다. 그동안 독창적이라고 생각했던 멀티버스 아이디어가 모두 그 영화 속에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나리오를 다시 썼다. 주인공을 남자에서 여자로 바꿨고 가족 드라마를 녹이기로 했다. 원래 감독은 주인공으로 성룡을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주인공을 여성으로 바꾸면서 양자경을 떠올렸다. 극중 이름도 이블린이 아닌 미셸이었는데 양자경의 영어 이름인 Michelle Yeoh에서 따온 것이었다. 소원대로 캐스팅이 이루어졌지만 양자경은 자신의 이름을 극중 이름으로 쓰는 것에 반대했다. 양자경은 “이것은 좋은 엄마, 좋은 딸, 가족을 지키고 싶은 아내 등 보편적인 여성에 관한 이야기이니만큼 나를 직접 연결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딸 역할은 원래 아콰피나가 맡기로 되어 있었지만 2020년 스케줄 문제로 하차하고 스테파니 수로 대체됐다.

키 호이 콴은 ‘구니스’에서 복대를 차고 다니던 아역 배우 출신으로 출연 기회가 없어 2002년 은퇴했다가 20년 만에 복귀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욕심이 큰 영화다. 인생이 후회로 가득 찬 중년 여성을 위로하겠다는 욕심, 세상의 모든 엄마와 딸에게 공감을 얻겠다는 욕심, 온갖 장르를 다 버무리겠다는 욕심, 액션 영화이면서도 나쁜 캐릭터를 만들고 싶지 않다는 욕심, 위대한 영화들이 영화사에 남긴 흔적을 이어받겠다는 욕심, 마냥 시니컬한 사람에게도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보여주겠다는 욕심 등등. 때론 욕심이 너무 과한 것 같아 정신이 혼미해지고 과유불급이 아닌가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호평하는 이유는 길을 잃지 않고 제갈 길을 가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는 보잘 것 없지만 멀티버스에 산재한 또다른 ‘나’들의 힘을 빌리면 가족을 구하고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메시지도 훌륭하고 이를 전달하는 방식도 아름답다. 슈퍼히어로는 마블 영화에만 있는 게 아니라 멀티버스에선 나도 언제 어디서든 단번에 슈퍼히어로가 될 수 있다. ‘스파이더맨’에 아이디어를 선점당했다고 괴로워하던 다니엘스 감독은 이렇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차별화에 성공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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