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기생충'이 2월 9일(현지시간) 로스앤젤레스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국제장편영화상, 각본상 등 4개 부문에서 수상했습니다. 역사적인 순간을 TV를 통해 지켜보면서 '기생충'이 수상작으로 호명될 때마다 저 역시 감격스러웠는데요. 이 대사건이 갖는 의미를 하나씩 짚어보겠습니다.


제인 폰다에게 작품상 트로피를 받는 기생충팀


92년 아카데미 역사상 최초로 영어로 만들어지지 않은 영화의 작품상


그동안 비영어 유성영화 중 작품상 후보에 오른 영화는 10편이었습니다. 프랑스어 자막이 들어간 무성영화 '아티스트'를 포함하면 11편이 있었습니다. '기생충'은 영어가 아닌 언어로 만들어진 유성영화 중 오스카 작품상을 받은 최초의 영화로 역사에 남게 됐습니다. 무려 92년입니다. 오스카는 그동안 '다양성'에 대한 수많은 요구를 받아왔는데 마침내 변했습니다. 그 중심에 '기생충'이 있습니다. '기생충'이 세계 영화사에 새 기록을 쓴 것입니다.


한국영화는 그동안 세계 영화계에서 변방에 있었지만 오스카 작품상을 계기로 위상이 업그레이드 되었습니다. 오스카 작품상을 받은 영화의 출신지는 그동안 미국, 영연방 국가, 그리고 프랑스뿐이었습니다. 이제 한국이 그 다음으로 그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물론 아시아 국가로는 최초입니다.



유럽의 칸영화제와 미국의 오스카 동시 작품상


1955년 델버트 만 감독의 '마티' 이후 두 번째 기록입니다. 지난 65년간 이런 경우가 없었던 것은 그만큼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칸과 아카데미는 대략 10개월 정도의 시차를 두고 시상하는데 한해 만들어지는 영화는 당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죠. 이런 와중에 '기생충'이 10개월이 지나도 여전히 최고의 영화로 인정받고 있다는 것은 타임리스 '고전영화'의 반열에 올랐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유럽과 미국의 취향은 다릅니다. 선호하는 영화도 다릅니다. 흔히 유럽은 좀더 사회적인 영화를 평가하고, 미국은 대중적인 영화를 선호한다고 하죠. '기생충'은 이 둘을 다 만족시켰습니다. 절묘하게 조화시켰습니다. 사회적이면서 오락적입니다. 대중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잡았습니다.


스파이크 리와 봉준호


오스카 감독상을 받은 두 번째 아시아 감독


봉준호 이전에 대만의 이안 감독이 오스카 감독상을 두 번 받은 적이 있습니다. '브로크백 마운틴'(2005)과 '라이프 오브 파이'(2012)였습니다. 그런데 두 영화 모두 미국영화였습니다. 할리우드 시스템 속에서 이안 감독이 홀로 능력을 발휘한 결과물이었던 것입니다.


이에 비해 봉준호 감독은 한국영화 시스템을 통해 만든 '기생충'으로 감독상을 받았습니다. 아시아 영화로는 최초의 감독상입니다.


봉준호, 한진원, 샤론 최


오스카 각본상을 받은 첫 아시아 영화


92년 오스카 역사에서 비영어 영화가 각본상을 받은 경우는 5번 있었고 '기생충'이 6번째 수상작입니다. 스페인어로 쓰여진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그녀에게'(2002) 이후 17년 만의 수상입니다. 그런데 기존 5번의 수상작은 모두 유럽영화들이었습니다. 아시아 언어로 쓰여진 각본으로는 '기생충'이 최초입니다.


봉준호 감독과 함께 각본상을 공동수상한 한진원 작가는 용인대 영화영상학과 05학번으로 봉 감독의 '옥자'(2017)에서 연출부로 일하다가 '기생충' 작가로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한 작가가 '기생충'의 초안을 잡으면 봉 감독이 이야기 구조를 정리하고 다시 한 작가가 디테일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작업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지하 벙커에 세 번째 가족이 있다는 설정은 봉 감독의 아이디어였지만 다송이 기택 가족에게 똑같은 냄새가 난다고 말하는 장면 등은 한 작가의 아이디어였다고 합니다.



연기상 후보에 오르지 못한 작품상


지난 20년간 오스카 작품상을 받은 영화 중 연기상 4개 부문에 후보에조차 오르지 못한 영화는 단 두 편뿐이었습니다.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2003)과 '슬럼독 밀리어네어'(2008)입니다. 두 편 모두 감독상과 작품상을 동시에 가져갔습니다. '기생충' 역시 연기상 후보에 오르지 못했고 대신 감독상과 작품상을 모두 받았습니다. 한 마디로 감독의 능력이 작품상으로 이어진 경우입니다.


세계 영화계에 떠오른 충무로


'기생충'의 4개 부문 수상은 돌이켜보면 2009년 8개 부문을 휩쓴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닮았습니다. 당시 오스카는 인도 배경으로 인도계 배우들이 출연하는 영화에 상을 몰아주면서 발리우드를 칭송했죠. 물론 영화는 영국 감독이 만든 영국영화지만 할리우드 입장에선 어느 정도 이질적인 느낌이 드는 영화인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실제로 이 영화의 오스카 수상은 발리우드가 세계 영화팬들에게 좀더 가깝게 다가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진원 작가는 시상식 무대에 올라 미국의 할리우드처럼 한국에는 '충무로'가 있다고 언급했는데 '기생충' 이후 충무로가 세계 영화계에서 메인스트림으로 조금 더 위치 이동하는 계기가 되리라 예상해 봅니다.



'기생충' 손 들어준 오스카의 의도는?


봉 감독은 어떤 감독이 되고 싶은지 묻는 질문에 자주 이렇게 답합니다. "남들이 하는 것은 안한 감독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이번에 '기생충'과 함께 작품상 후보에 오른 영화들을 살펴보면 9편 중 6편이 시대극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과거를 회상하면서 무겁지 않은 메시지를 주려는 비교적 안전하고 보수적인 영화들입니다. 기술적으로 새로운 부분은 있지만 스토리나 메시지는 독특하지 않은 편입니다. 나머지 3편 중 '조커'는 시대극이라고 분류하기 애매한 '가짜 시대극'으로 메시지는 급진적이고 도전적이지만 지나치게 파괴적이어서 호불호가 갈릴 작품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다룬 현대극은 '기생충'과 '결혼이야기' 두 편뿐인데 '결혼이야기'는 개인의 행복을 이야기하는 아름다운 작품이지만 모험적인 시도까지는 없습니다.


아카데미가 '기생충'을 선택한 배경에는 할리우드 시스템이 만들어낸 경쟁작 8편의 영화에 경각심을 심어주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생충'만큼 야심만만하고 도전적이고 실험적이고 그러면서도 메시지와 엔터테인먼트 두 가지를 동시에 잡는 영화를 할리우드는 왜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지에 대한 자기 반성이라고 할까요? 외부에서 온 자극에 충격을 받고 할리우드가 더 분발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긴 작품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봉준호라는 새로운 스타 탄생


새로운 스타가 탄생할 때 우리는 시대가 바뀌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됩니다. 오늘 오스카가 만들어낸 스타는 단연 봉준호 감독입니다. 봉 감독은 오늘 네 번이나 오스카 무대에 올랐고 이제 세계적인 거장 반열에 올랐습니다.


봉 감독과 함께 경쟁을 펼친 마틴 스콜세지, 쿠엔틴 타란티노, 샘 멘데스, 토드 필립스 모두 훌륭한 감독이지만 이미 잘 알려진 이름들입니다. 세상은 늘 새로운 스타를 필요로 합니다. 봉 감독은 작년 가을부터 미국에서 오스카 시즌 투어를 하면서 수많은 인터뷰와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했는데 이 과정에서 미국 미디어와 미국인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사람들은 봉 감독이 굉장히 따뜻하고 유머러스하고 젠틀하고 겸손하면서 분위기를 가볍게 이끌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가 굉장한 인사이트를 갖추고 있고 비상한 머리와 영화 만들기에 놀라운 재주를 갖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무엇보다 봉 감독은 미국영화를 사랑하고 할리우드의 자부심인 고전영화들을 줄줄이 읊고 앨프리드 히치콕 같은 거장들을 존경하고 따라하고 싶어한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봉 감독은 할리우드 시스템 밖에서 자랐지만 사실상 할리우드와 배다른 한 식구라고 인정해도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죠.


이처럼 성장 배경이 그들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 봉 감독이 스타로서 자질도 갖춘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는데 그를 스타로 만들어주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미국은 언제나 스타를 탄생시키고 그 스타들이 자신이 올라온 사다리를 자랑스러워 하면서 유지해온 국가니까요.



어찌됐든 자랑스럽습니다. 2020년 2월 9일은 오스카 역사에서, 세계 영화사에서, 그리고 한국 영화사에서 영원히 기록될 하루가 될 것입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댓글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