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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24일 오전 6시 30분. 경기 의정부시 호원동의 4층 빌라에 불이 났다. 이른 아침 매캐한 연기에 깜짝 놀란 사람들이 건물 앞에 몰려들었다. 희뿌연 연기는 4층 창밖으로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왔다. 사람들이 다 빠져나왔나 싶었는데 누군가 4층을 보며 소리쳤다. 창문에 한 30대 남자가 다리 한쪽을 창밖으로 뺀 채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아 있었다. 남자는 양손으로 두 아이를 꼭 안은 채였다. 4세 딸과 11개월 된 아들이었다. 혹여 연기가 아이들에게 들어갈까 남자는 몸을 최대한 숙이고 있었다. 지켜보는 사람들은 탄식을 내뱉으면서도 구할 방법이 없어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마침내 신고를 받은 소방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도착했다. 문 입구가 좁아 사다리를 댈 수 없다는 것을 파악한 소방대원은 건물로 진입해 3층으로 올라갔다. 소방대원은 3층 창밖으로 나와 4층 창문에 걸터앉아 있던 남자로부터 아이들을 받았다. 다른 소방대원들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바닥에 에어매트를 설치했다. 두 아이가 차례로 소방대원에게 건네졌고 이어서 남자는 에어매트 위로 뛰어내렸다. 남자는 가벼운 화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아이들은 무사했다.


뉴스 업계에 종사하다보면 가끔 드라마틱한 상황을 접하게 된다. 집안은 화염에 휩싸여 있고 어린 아이가 있어서 창밖으로 함부로 뛰어내릴 수도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 남자는 두 아이를 끌어안고 소방대원을 기다렸다. 예상치 못한 새벽 갑작스런 위기가 닥쳤을 때 본능적으로 스스로를 희생하는 남자의 부성애는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이 사건을 접하면서 떠오른 영화가 있었다. 시대 배경도, 인물도, 사연도 전혀 다르지만 아이를 향한 맹목적인 사랑만큼은 다르지 않은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였다. 어느 평화로운 일요일 오후, 나는 1997년에 세상에 나온 이 영화를 오랜만에 다시 꺼내봤다.


영화는 '1939년 이탈리아 아레초'라는 자막과 함께 시작한다. 영화를 만든 감독이자 주연 배우인 로베르토 베니니가 연기한 '귀도'는 친구 페루시오와 함께 브레이크가 고장난 차를 타고 달리고 있다. 귀도는 첫 등장부터 우스꽝스럽다. 그는 차가 멈추지 않자 사람들에게 손을 들어 비키라고 소리치는데 이 모습은 마치 나치식 경례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후반부에서 그를 괴롭힐 나치를 미리 조롱하듯 암시하고 있는데 웃음이 터지면서도 왠지 불길한 느낌이 남는다. 영화는 처음부터 이처럼 아이러니컬하다.



우여곡절 끝에 아레초에 도착한 귀도와 페루시오는 처음 보는 도시 풍경에 감격해 환호성을 지른다. 그런데 아레초가 어떤 곳인가. 피렌체에서 차를 타고 1시간가량 달리면 닿을 수 있는 인구 10만 명의 작은 도시인 아레초는 중세 시대엔 교통의 요지였지만 피렌체에게 함락당한 뒤 영광의 자리를 내주면서 이후 크게 주목받지 못한 곳이다. 도시라고는 하지만 로마나 피렌체도 아닌 작은 마을에 불과한데 귀도의 눈은 신세계를 보는 듯 휘둥그레진다. 귀도는 이처럼 순박한 남자다. 작은 행복에도 크게 기뻐하고 감사할 줄 아는 남자다. 영화에는 귀도가 아레초에 오기 전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의 전사가 나오지 않지만 요란한 첫 등장만으로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 가능하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귀도'는 아레초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이다. 아레초에는 귀도 광장도 있고, 1882년에 세워진 귀도 동상도 있고, 귀도 음악 경연대회도 있고, 이 모든 것을 관리하는 '아레초 귀도' 재단도 있다. 11세기 수도사였던 귀도는 현대 악보의 기초가 되는 기보법을 만들고 도레미파솔라시도의 모태가 된 음계 이름을 짓고 '도레미송'을 쓴 사실상 음악의 아버지다. 영화에서 귀도가 아내 도라(니콜레타 브라스키)와 수시로 음악으로 소통하는 것은 아레초의 이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영화로 돌아오자. 귀도는 숙부가 운영하는 식당의 웨이터로 일하게 된다. 그는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종종 공격의 대상이 되지만 예의 긍정적 마인드로 웃어넘기면서 쾌활하게 살아간다.


거리에서 귀도는 우연히 한 여자와 마주친다. 그녀는 하늘에서 떨어지고, 자전거에서 넘어졌더니 거기 누워 있다. 우연은 두 번만 반복된다. 우연을 인연으로 만드는 것은 귀도의 몫이다. 그는 그 여자가 초등학교 교사 도라인 것을 알아내고 장학사로 위장해 학교로 찾아간다. 도라가 일요일에 오펜바흐의 오페라 '호프만의 이야기'를 보러간다는 것을 알게 된 뒤엔 비오는 날 그녀를 기다려 차에 태운다. 귀도는 도라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붕에서 떨어지고, 자전거에서 넘어졌더니 당신이고, 학교에 시찰 갔더니 당신이 있고, 꿈속까지 쫓아 왔군요. 제가 그렇게 좋은가요? 좋아요 당신이 이겼어요. 어디로 모실까요 공주님?"



영화의 전반부는 이처럼 달콤하다. 첫 눈에 반한 여자에게 구애하는 남자와 자신을 공주님이라 불러주는 남자에게 조금씩 마음을 여는 여자는 반복되는 우연 속에 점점 가까워진다. 백마 탄 왕자는 공주를 지루한 일상에서 구해내고 동화는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릴 것만 같다.



하지만 전반부의 달콤함은 후반부의 고통스런 비극을 위장하고 있다. 귀도와 도라는 신분 격차와 사람들의 시선을 사랑으로 극복했지만 이제 더 큰 장애물이 기다리고 있다. 영화가 시작한지 50분이 지나자 동화는 왕자와 공주를 인류 최대의 비극 속으로 밀어 넣는다. 귀도와 아들 조수아는 단지 유태인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영문도 모른 채 강제 수용소에 감금된다. 혼자 남겨진 도라는 자진해서 남편과 아들을 따라 수용소로 가는 기차를 탄다.



만약 이들이 살고 있는 시대에 전쟁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아레초에서 서점을 운영하며 알콩달콩 살아가는 귀도 가족을 위협할 걱정거리라면 서점 매출, 아이 양육비, 결혼을 반대했던 처가와의 갈등 정도 아니었을까. 하지만 새벽에 갑자기 타오른 화마처럼, 귀도 가족은 예상치 못한 홀로코스트 속으로 내동댕이쳐진다.


"지금부터 우리는 게임을 할 거야. 1000점을 먼저 따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1등상이 뭔지 아니? 탱크야. 장난감 탱크가 아니라 진짜 탱크."


수용소에 도착한 귀도는 조수아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는 아들이 보는 앞에선 시종일관 웃는다. 고된 강제 노동을 하고 돌아온 뒤에도 하루 종일 게임을 하느라 너무 재미있었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웃는다. 또래 아이들이 샤워실로 가서 사라진 뒤엔 조수아를 숨기기 위해 지금부터는 숨바꼭질 게임을 하는 거라고 말하고는 또 웃는다. 단지 죽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귀도는 최선을 다해 웃는다. 힘들어서 이제 집에 가고 싶다는 아들을 귀도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끝까지 설득한다. 귀도의 방식은 아들에게 세상이 얼마나 비참한 곳인지 그 진실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을 살아갈 아들이 소중한 동심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해하기 힘든 세상의 어두움을 아이에게 어떻게 알려주는 것이 좋은지에 대해선 의견이 엇갈릴 수 있을 것이다. 귀도의 방식처럼 감추는 게 최선이라는 의견이 있는 반면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확하게 설명해주는 게 좋다는 의견도 있다. 홀로코스트는 지극히 극단적인 상황이니 만큼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장례식을 예로 들어보자. 어떤 아이들은 가끔 장례식장을 헤집고 다닌다. 이럴 때 죽음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것은 부모의 역할이다. 이때 죽음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알려줄 필요는 없다. 만약 귀도라면 죽음도 웃으면서 설명했을 것 같다. 부모의 이혼으로 어느 한쪽을 택하게 된 아이에게도 마찬가지다. 귀도라면 장난을 치면서도 아이가 이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을까.


중요한 건 사실을 말하든 감추든 아이 눈높이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귀도는 장난스럽게 시작했지만 조수아가 상황을 납득할 때까지 진심을 담아 설명한다. 그래서 조수아는 아빠의 말을 믿는다. 잔혹한 홀로코스트 한복판에서도 산타클로스는 믿는 이들의 마음속에 살아있었다.



영화의 마지막은 가시고기처럼 자신을 희생해온 귀도가 끝내 수용소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전쟁이 끝난 뒤 아들이 엄마와 감격적으로 재회하는 것이다. 죽음이 임박한 상황에서도 귀도는 나무상자에 숨어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조수아가 혹여나 놀라 뛰쳐나올까봐 장난스런 걸음으로 걸어 보인다. 알에서 막 부화한 새끼의 영양분 섭취를 위해 자신의 몸을 다 내어주는 가시고기처럼 귀도는 마지막까지 아들을 걱정하다가 죽는다.



"난 원하는 대로 될 수 있다."


스스로를 천재라고 여겼던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이 말은 영화에서 부적처럼 쓰인다. 중요한 고비 때마다 귀도는 스스로에게 최면을 건다. 꿈에 그리던 도라가 오페라 '호프만의 이야기'가 공연되는 극장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 조수아가 숨어 있는 나무상자에 사냥개가 냄새를 맡고 짖어대자 발각되지 않게 해달라고 주문을 걸 때 쇼펜하우어는 도움이 된다. 쇼펜하우어가 지독한 염세주의자였다는 점에서 저 문장이 행운의 주술로 쓰이는 것은 일종의 아이러니다.


영화는 매순간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다. 수용소에서 죽음 위기가 찾아왔을 때 구원자가 되어준 레씽 박사는 귀도를 몰래 불러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할 줄 알았더니 수수께끼 놀이를 이어간다. 귀도의 죽음이라는 비극은 전쟁이 끝난 후 나치 철수 마지막 하루를 남겨놓고 찾아온다. 수용소 생활이 1000점을 따면 탱크를 받는 게임이라는 말은 귀도가 아들을 위해 꾸며낸 말이었지만 모든 상황이 종료되고 거짓말처럼 진짜 탱크가 나타난다. 이처럼 인생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지만 간절하게 최면을 걸면 원하는 결과가 나타나기도 한다. 찰리 채플린의 말을 뒤집으면, 인생은 멀리서 보면 비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다.



오늘도 뉴스룸에는 사건사고 소식이 끊이지 않는다. 그런데 두 아이를 꼭 안고 화마를 견딘 부성애 같은 따뜻한 소식은 드물다. 재산 상속에 불만을 품은 아들 형제가 아버지의 장례식을 보이콧 했다거나 성적으로 착취당한 친딸이 아버지를 신고한 사건 등이 더 많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아버지가 어린 자녀를 죽이고 자살한 끔찍한 사건도 있다.


부성애는 뉴스보다 오히려 영화나 문학에서 찾는 게 더 빠르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를 비롯해 비슷한 시기에 나온 조창인의 소설 ‘가시고기’ 혹은 송강호나 설경구가 아버지로 출연한 ‘택시운전사’ ‘생일’ 같은 한국 영화들 혹은 우리가 ‘신파’라고 폄훼하는 드라마들의 상당수는 눈물바다를 이루는 지고지순한 사랑을 그린다.



실제 사건을 다룬 뉴스보다 가짜 이야기인 영화 속에 더 사랑이 넘친다는 것 또한 아이러니다. 영화는 어떤 비극 속에서도 사랑은 아름답게 빛난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런 사랑은 현실에 드물기에 더 애타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폭력적인 영화가 모방범죄를 낳는다면 사랑이 가득한 영화는 모방사랑을 낳을 수도 있지 않을까. 눈물을 참기 힘든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문득 든 생각이다.



* [BBB] 매거진에 실린 글입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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