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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새해를 맞아 극장을 찾는다면 첫 영화로 어떤 작품이 좋을까. 가까운 친구 혹은 멀어진 친구를 떠올리며 뜨거운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영화는 어떨까. 사랑보다 더 뜨거운 우정을 그린 두 편의 영화가 한주 간격으로 나란히 극장에 걸린다. 지난 26일 개봉한 허진호 감독의 한국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와 1월 1일 개봉을 앞둔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이탈리아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이 주인공이다. 두 편의 영화를 차례로 살펴보자.



신분을 뛰어넘는 우정 '천문: 하늘에 묻는다'


"제가 별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세종과 장영실의 신분을 초월한 우정을 그린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영화 중반부에 나온다. 어릴적부터 별 보기를 좋아한 왕을 위해 장영실은 왕의 침소 문살에 구멍을 뚫어 별 모양을 만들어준다. 두 사람은 작은 혼천의로 별을 바라보며 아이처럼 해맑게 웃는다.



자신을 반대하는 신하들에 둘러싸인 외로운 개혁론자 군주와 모두에게 천대받던 외로운 발명가 노비는 극과 극의 신분이지만 의지할 곳 없이 살아왔다는 데서 동병상련을 느낀다. 세종이 장영실의 기술을 높이 사 그를 노비에서 면천시켜 가까이 두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인데 영화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두 사람이 서로에게 둘도 없는 친구였다고 상상의 나래를 편다. 두 사람이 침소에서 함께 별을 보는 장면은 이들에게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한때를 상징한다.



"대호군 장영실이 안여(임금의 가마) 만드는 것을 감독하였는데, 튼튼하지 못하여 부러지고 허물어졌으므로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게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장영실에 대한 마지막 기록이다. 세종의 총애를 받던 장영실은 이 사건으로 곤장 80대를 맞고 벼슬이 떨어진 채 갑작스럽게 쫓겨난다. 이후 장영실은 기록에서 사라진다. 영화는 '안여 사건'을 중심에 놓고 상상력을 덧붙였다. 독자적인 천문기구를 만드는데 대한 명나라의 반대와 사대부들의 질투가 끝내 세종과 장영실을 갈라놓았다는 것이다.



역사의 빈칸을 채운 영화의 상상력은 세종이 등장했던 기존 사극과 비교할 때 새롭지는 않다. 한석규가 연기한 세종은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의 연장선 상에서 백성만 생각하는 자비로운 군주로 그려지고, 주변 인물들도 장영실을 반대하는 세력과 이용하는 세력 등 스테레오타입을 벗어나지 않는다. 천문관측기구 혼천의와 간의, 시간마다 종이 울리는 자격루, 해시계 앙부일구, 비가 온 양을 측정하는 측우기 등이 등장해 조선시대의 과학기술 수준을 엿볼 수 있지만 러닝타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은 편이다.


다만 영화에서 눈여겨볼 것은 세종과 장영실의 로맨스에 가까운 우정이다. 동국대 연극영화과 선후배로 30년 가까이 영화계에서 동고동락해온 최민식과 한석규가 각각 장영실과 세종을 연기해 더 애틋하게 다가온다. 실제 세종과 장영실도 20대에 만나 인생의 황금기를 함께 보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1420년, 세종은 20대 초반, 정확한 생몰연도가 불분명한 장영실은 대략 30대 초반의 나이였는데, 두 사람은 '안여 사건'이 벌어진 1442년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선 굵고 격정적인 남자를 주로 연기해온 최민식과 댄디하면서도 느릿한 남자를 주로 연기해온 한석규는 '쉬리'(1999)에서 처음 연기 호흡을 맞춘 뒤 정반대의 영역에서 자신만의 연기세계를 구축해오다 20년만에 다시 만났다. 인생의 황금기를 충무로라는 같은 공간에서 보내며 나란히 별의 자리에 자리잡았다는 점에서 세종과 장영실이 함께 별을 보며 이름을 붙여주는 장면은 두 사람의 인생사와 오버랩된다. 두 연기의 대가는 한 화면에 등장할 때도 연기 대결을 펼치고 있다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만큼 자연스럽다.


'행복' '호우시절' '봄날은 간다' 등 로맨스 영화에서 발군의 기량을 발휘해온 허진호 감독은 세종과 장영실의 우정을 아예 로맨스처럼 섬세하게 다루며 감정선을 끌어올린다. 신구, 김홍파, 허준호, 김태우, 김원해, 임원희, 오광록, 윤제문, 박성훈, 전여빈 등 연기 잘하는 충무로 배우들이 배역의 비중에 상관없이 활약한다는 것도 반갑다.



바다를 뛰어넘는 우정 '피아니스트의 전설'


"그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남자예요. 이 음악은 저만의 비밀이죠."


생활고에 시달리던 트럼펫 연주자 맥스는 트럼펫을 팔기 위해 악기상을 찾았다가 오래된 LP를 발견한다. 이 음반의 피아노 연주자를 궁금해하던 악기상 주인에게 맥스는 자신만이 알고 있는 피아니스트에 대한 비밀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1900년 유럽과 미국을 오가는 대형 크루즈 버지니아호에서 태어나 평생 육지를 밟지 않고 살아온 피아니스트의 이름은 나인틴 헌드레드. 선원이었던 아빠가 태어난 해를 기념해 지어준 이름이다. 운명과도 같은 배를 떠나지 않는 나인틴 헌드레드에게 피아노는 자신의 존재를 표현할 유일한 수단이다. 맥스는 나인틴 헌드레드를 만나 음악적 교감을 이루며 그에게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준다.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1998)은 만들어진지 22년만인 2020년 1월 1일 국내 첫 개봉을 앞두고 있다. 방탄소년단의 뷔가 추천한 OST가 담긴 영화로 한때 아미들 사이에서 관심의 영화로 떠오르기도 했다. 영화 OST는 이탈리아 거장 엔니오 모리꼬네가 만들어 2000년 골든글로브 음악상을 받았다.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는 나인틴 헌드레드와 맥스가 처음 만나는 순간이다. 파도가 심하게 몰아쳐 흔들리는 배 안에서 맥스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있는데 파도가 익숙한 나인틴 헌드레드는 피아노 의자에 편하게 앉아 있다. 그는 맥스에게 피아노 바퀴를 풀어달라고 하더니 곧 움직이는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피아노가 배 안을 이리저리 춤추듯 돌아다니는 가운데 나인틴 헌드레드가 연주하는 'Magic Waltz'가 스크린에 흐르고, 옆에서 맥스는 피아노를 부여잡고 멀미하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고 있다. 피아노 연주가 끝난 뒤에야 두 사람은 통성명을 한다.



영화는 미스터리의 피아니스트 나인틴 헌드레드의 일대기를 맥스가 들려주는 액자 구성으로 전개된다. 22년전 영화인만큼 스타일은 다소 투박하지만, 나인틴 헌드레드가 사랑에 빠진 순간 즉흥적으로 연주하는 'Playing Love', 나인틴 헌드레드가 배 안에서 재즈의 발명자와 대결을 펼칠 때 연주하는 'Enduring Movement' 등 놀라운 피아노 연주가 영화에 빠져들게 한다.


'피아니스트의 전설'은 많은 사람들이 인생 영화로 꼽는 '시네마 천국'(1988)을 32세의 젊은 나이에 만들어 이탈리아의 거장으로 떠올랐던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이 '스타 메이커'(1995)와 '말레나'(2000) 사이에 만든 영화다. 토르나토레의 다른 초기작처럼 20세기 초반 미국 동부에 대한 유럽인들의 동경과 감상주의적 시선 등을 엿볼 수 있다.



나인틴 헌드레드 역할을 맡은 배우는 1990년대 미국 독립영화계의 프린스였던 팀 로스로 현재도 왕성하게 활동중인 그의 젊은 시절을 볼 수 있다. 팀 로스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현실과 꿈 사이에서 갈등하는 나인틴 헌드레드를 섬세하게 연기한다. 맥스 역할을 맡은 프룻 테일러 빈센트는 안구진탕증을 가진 개성파 배우로 '헤비'(1995)의 과체중 요리사, '아이덴티티'(2003)의 연쇄살인범, '버드박스'(2018)의 시각장애인 릭 등 그동안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해왔다.



*매일경제에 실린 글입니다.

출처: https://www.mk.co.kr/premium/life/view/2019/12/27431/



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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