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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과 서울에서 대규모 지진이 발생해 건물이 무너지고 도시가 마비된다. 지진의 원인이 백두산 화산 폭발 때문임이 밝혀지고 청와대의 전유경 민정수석(전혜진)은 오랫동안 백두산을 연구해온 로버트 김 박사(마동석)를 찾아가 자문을 구한다. 김 박사는 72시간 내 예정된 더 큰 추가 폭발을 막으려면 백두산 아래 갱도에 핵을 터뜨려 마그마를 분출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통령은 북한에 남아 있는 ICBM에서 핵탄두를 분리해 백두산에서 폭파시키겠다는 국정원의 작전을 승인한다. 전역을 앞둔 폭발물 전문 요원 조인창 대위(하정우)는 만삭의 아내 최지영(배수지)이 미군과 함께 무사히 한국을 탈출하게 해준다는 조건을 받아들여 작전에 투입된다. 조 대위는 ICBM의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 북한에서 이중간첩 리준평(이병헌)을 만나야 한다.



영화는 숨가쁘게 전개된다. 위에 요약한 줄거리는 영화 초반 30분 내에 벌어지는 사건들이다. 무너지는 건물들, 피난 가는 사람들, 청와대 대책회의, "그러길래 제가 뭐랬습니까"라고 말하는 박사, "꼭 돌아와야 돼"라며 헤어지는 가족 등 재난영화의 클리셰로 시작하는 영화는 중반 이후엔 핵을 놓고 다투는 미중간의 공방전과 그 사이에서 남북을 대표하는 하정우-이병헌의 브로맨스로 나아간다.



역대 한국영화 중 다섯 번째로 많은(옥자, 설국열차, 디워, 마이웨이 다음으로) 총제작비 280억원이 투입된 영화는 관객 770만명을 넘겨야 비로소 제작비를 회수할 수 있다. 관객의 기대감을 증폭시키기 위한 영화의 최대 무기는 컴퓨터그래픽(CG)으로 구현한 재난 장면이다. 대형빌딩이 무너지고 다리가 끊기고 강물이 범람하고 화산이 용암을 분출하고 갱도가 붕괴되는 장면 등에 현란한 CG가 쓰였다. '신과 함께' 등의 CG를 만들어온 덱스터 스튜디오가 직접 제작에 나섰다.



이병헌 하정우 마동석 배수지 등에 카메오로 깜짝 출연하는 전도연 등 초호화 캐스팅도 눈길을 끌어모으는 요소다. 낯익은 배우들을 데리고 처음 시도하는 연기가 많아 신선하게 다가온다는 것은 이 영화의 장점이다.


우선, 하정우와 이병헌이 한 화면에 나오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거들먹거리며 좌중을 압도하는 이병헌과 시시콜콜하게 잔재미를 던지는 하정우의 케미는 누가 우위라고 하기 힘들 정도로 꽤 잘 맞는다. 이병헌의 정극 연기에 이어지는 하정우의 잔망스런 말장난은 색다른 개성의 버디 콤비로 손색 없다.



근육을 몸이 아닌 머리에 부착해 안경 끼고 진지하게 연구하는 마동석도 고정관념을 깬다. 금방이라도 "형 알지?"라는 대사가 튀어나올 것 같은 얼굴로 "성공 가능성은 3.5%의 확률입니다"라는 대사를 말하는 모습에서 마동석의 연기 확장 가능성을 본다. 실제 미국 시민권자인 그가 영화 속에서 굳이 미국인임을 강조하는 연기를 하는 것도 재미있다.


또 배수지는 처음으로 만삭의 아내와 엄마를 연기한다. 걸그룹 출신임을 의식했다면 결코 맡을 수 없었을 배역이다. 이 영화와 비슷한 장르의 드라마 '배가본드'에서 국정원 요원을 연기했다는 것을 떠올리면 참 낯선 모습이다. 그녀는 육탄전이 반복되는 영화에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는다.



이처럼 배우들의 캐스팅은 신선하고 연기 앙상블도 좋지만 정작 이들이 맡은 캐릭터와 스토리가 식상하다는 것은 이 영화의 단점이다. 할리우드 영화 속 설정을 그대로 답습하는 부분이 많아 어디서 본 듯한 장면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조인창의 임무는 '아마겟돈'(1998)과 유사하고, 조인창과 리준평의 관계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가 절친으로 진화한다는 점에서 '더 록'(1996)의 스탠리 굿스피드(니콜라스 케이지)와 존 메이슨(숀 코너리)을 떠올리게 한다. 마동석이 연기한 로버트 김 박사는 '투모로우'(2004)에서 이상저온을 예견한 기상학자 잭 홀 박사(데니스 퀘이드), '2012'(2009)에서 태양 폭발을 경고한 지질학자 애드리언 헴슬리 박사(치웨텔 에지오포), '볼케이노'(1997)에서 도시 아래 마그마가 흘러가고 있다는 가설을 세운 지질학자 에이미 반즈 박사(앤 헤이시), '단테스 피크'(1997)에서 화산 분출 징후를 미리 알렸지만 무시당한 화산학자 해리 달튼 박사(피어스 브로스넌) 등과 외모만 다르다.



전개가 빠른 탓에 개연성도 부족하다. 영화의 설정은 백두산이 폭발해 북한 정권이 붕괴되고 그 다음으로 남한이 가장 큰 피해를 입는다는 것이다. 영화는 초반부에 그냥 받아들이라고 윽박지르듯이 너무 빠르게 넘어가고 있는데 사실 백두산이 폭발하면 가장 피해를 입을 국가는 북한과 중국이다. 화산재는 일본과 러시아까지도 날아간다. 그래서 중국이 백두산 폭발을 방관할 거라는 영화의 주장은 납득하기 힘들다.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병영국가인 북한에 침투하는 요원이 아무리 권력 공백이라도 북한군을 만나지 않는 것도 미스터리다. 무리한 작전을 러닝타임 2시간 안에 무리하게 녹이려다 보니 너무 많은 부분이 생략된 탓이다. 이럴 바엔 차라리 드라마로 만드는 게 어땠을까 싶다.



무엇보다 아쉬운 점은 제목이 백두산임에도 정작 백두산을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고질라가 제대로 안 보이던 할리우드의 '고질라'(2014)가 연상된다. 영화에서 실제 백두산이 나오는 장면은 굉장히 짧다. 모두들 백두산 폭발을 이야기하지만 관객은 백두산이 어떻게 생겼는지 잘 모른 채 극장을 나와야 한다. 화산 폭발로 인한 불덩이가 스크린을 뜨겁게 달굴 것을 기대했다면 접고 가는 편이 좋다. 영화의 초점은 백두산보다는 오히려 북한의 핵무기에 맞춰져 있다. 그래서 어쩌면 '강철비 2'가 제목으로 더 어울리는 지도 모르겠다. 혹은 7번째 갱도에 핵을 설치한다는 점에서 '7광구 2'도 어울리는 제목이다.



'백두산'은 새로운 한국형 블록버스터로 기대를 모았지만 한국형 블록버스터가 여전히 할리우드에 대한 자격지심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만든 영화다. 캐릭터와 스토리가 유사하다고 지적한 작품들도 '아마겟돈' '더 록' 등 죄다 오래된 영화들이다. 넷플릭스, 디즈니 등이 경쟁적으로 고퀄리티 작품들을 쏟아내면서 영화를 보는 관객의 눈높이는 높아졌는데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여전히 CG의 화려함에만 매몰돼 있어 안타깝다. CG의 완성도는 영화 개봉 직전까지 전력을 다했지만 감탄할 정도까지는 못 미친다. 그래도 한국형 블록버스터가 멈추지 않고 진화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덧붙이자면, 배우들의 연기만큼은 뛰어나 러닝타임 128분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백두산 ★★☆

물량공세가 전부는 아닌데.



*매일경제에 실린 글입니다.

출처: https://www.mk.co.kr/premium/life/view/2019/12/27380/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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