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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영혼까지 탈탈 털어 만든 ‘성난 황소’(1980) 이후 탈진한 나머지 더 이상 극영화를 찍지 않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영화적 기법에 환멸을 느끼고 이제부턴 다큐멘터리만 찍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친 스콜세지에게 로버트 드니로는 ‘코미디의 왕’ 시나리오를 건넸다. 두 사람은 ‘비열한 거리’(1973) ‘택시 드라이버’(1976) 등 중요한 작품을 함께해온 영혼의 파트너였다. 하지만 그때 스콜세지는 폴 슈레이더로부터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시나리오를 건네받고 드니로가 출연해주기를 기대하던 참이었다. ‘성난 황소’ 이후 드니로는 가벼운 코미디를 하고 싶어 예수 역할을 거절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는 ‘코미디의 왕’으로 넘어갔다.


영화 '코미디의 왕'의 루퍼트 펍킨


드니로는 ‘코미디의 왕’ 시나리오를 1974년에 각본가이자 평론가인 폴 짐머만으로부터 구입했다. 당시에도 드니로는 스콜세지에게 연출을 제안한 적 있었다. 하지만 그때 스콜세지는 ‘택시 드라이버’를 준비 중이었다. 시나리오는 마이클 치미노 감독에게 넘어갔다. 하지만 그 역시 '천국의 문'(1980) 프로젝트에 매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스탠드업 코미디언 레니 브루스에 관한 실화를 각색한 영화 ‘레니’(1974)를 만든 밥 포시가 감독 후보로 떠올랐다. 그는 앤디 카우프만 주연으로 만들려고 시도하다가 결국 '스타 80'(1983)으로 선회했다.



그렇게 돌고 돌던 시나리오는 다시 스콜세지에게 넘어갔다. 스콜세지는 탐탁지 않았으나 제작자 아논 밀찬이 영화를 할리우드가 아닌 뉴욕에서 소규모로 찍을 수 있다며 스콜세지를 설득했다. 자신의 ‘뉴욕 영화’ 중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한 스콜세지는 결국 이 영화를 드니로 주연으로 만들기로 한다.


스콜세지는 이 영화를 '성난 황소'와 정반대로 다큐멘터리 스타일로 찍었다. 그래서 ‘코미디의 왕’은 마치 무성영화처럼 카메라는 정적이고 클로즈업도 거의 없다. 영화가 실제와 환상을 넘나드는 데도 아무런 기법을 사용하지 않아 종종 실제인지 주인공의 상상인지 헷갈리는데 이는 감독이 의도한 것이다. 스콜세지는 에드윈 포터의 1903년작 '미국 소방관의 삶'이 이 영화에 영향을 주었다고 밝혔다.


영화 '코미디의 왕'


과대망상에 빠진 코미디언 지망생 루퍼트 펍킨


영화는 당대의 톱스타들이 출연하는 제리 랭포드 쇼의 화려한 막을 올리면서 시작한다. 녹화를 마치고 나온 제리 랭포드(제리 루이스)는 싸인을 요구하는 수많은 팬들에 시달리다가 겨우 차에 오른다.


뒷좌석에서 한숨 돌리고 있는데 낯선 남자가 옆자리에 탄다. 그는 자신을 스탠드업 코미디언 지망생 루퍼트 펍킨(로버트 드니로)이라고 소개하더니 예의바른 말투로 쇼에 출연시켜달라고 끊임없이 조른다. 제리는 할 수 없이 자신의 비서에게 연락하라고 말하고는 자리를 뜬다.


영화 '코미디의 왕'의 루퍼트 펍킨


엄마와 함께 사는 펍킨은 실재와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과대망상증에 빠져 있다. 그는 자주 제리의 친구가 되어 토크쇼에 함께 출연하는 상상을 한다. 하지만 현실에선 가난한 무명 코미디언 지망생일 뿐이다. 그는 연기 테이프를 만들어 제리의 회사에 제출하지만 제리의 비서는 경력을 쌓고 오라며 거절한다. 비서의 말대로 무대를 찾는 대신 그는 제리의 회사를 찾아가 제리가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기다리다가 경비원에게 제지당한다. 또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 리타(다이안 애보트)에게 자신이 제리의 친구라고 말하고는 그녀를 제리의 집에 데리고 가기도 한다. 두 사람이 무단침입한 것을 안 제리는 뒤늦게 집으로 돌아와 그들을 쫓아낸다.


영화 '코미디의 왕'의 루퍼트 펍킨과 리타


제리의 무시가 계속되자 펍킨은 중대결심을 한다. 그처럼 제리를 짝사랑하는 또다른 코미디언 지망생 마샤(산드라 번하드)와 함께 제리를 납치하기로 한 것이다. 두 사람은 제리를 총으로 위협해 차에 태워 마샤의 집에 가둔다. 그리고는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자신을 오늘 밤 쇼에 출연시키라고 말하라고 종용한다.


납치범을 잡기 위해 FBI가 투입된 가운데 펍킨은 방송국 무대에 올라 10분 동안 자신 인생의 첫 스탠드업 코미디 녹화를 마친다. 그는 무대에서 이렇게 말한다.


“제가 이 무대에 설 수 있게된 건 제리를 납치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쇼에 출연할 수 없었겠죠. 전 단 하룻밤이라도 왕이 되고 싶었어요.”


객석에선 폭소가 터진다.



엔딩은 매스미디어의 위력을 실감하게 한다. 제리 랭포드쇼에 단 10분 출연한 펍킨은 8700만 가구가 그의 쇼를 시청하면서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제리 랭포드를 납치한 죄로 6년 징역형을 받은 그는 감옥에서 ‘하룻밤의 왕’이라는 자서전을 집필해 큰 돈을 번다. 2년 9개월후 석방된 그는 꿈에 그리던 자신만의 쇼를 갖게 된다. 스콜세지 영화에선 드물게 해피엔딩이지만 뭔가 찜찜한 느낌은 남는다.


'코미디의 왕' 포스터


톱스타를 납치한 조커의 블랙코미디


‘코미디의 왕’ 포스터에서 펍킨은 조커(Joker) 카드 위에서 춤추고, 제리는 킹(King) 카드에 묶여 있다. 공교롭게도 이 포스터는 37년 후 만들어진 영화 ‘조커’를 떠올리게 한다. 영화 ‘조커’의 아서 플렉 역시 루퍼트 펍킨처럼 과대망상증을 가진 스탠드업 코미디언 지망생으로 톱스타인 토크쇼 사회자를 숭배한다. 이 사회자는 로버트 드니로가 연기해 37년의 연결고리를 완성한다.


영화 속 펍킨을 보고 있으면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보는 듯해 아슬아슬하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화내는 법 없이 예의바르게 말하면서도(심지어 납치한 이후에도) 절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제리와 제리의 비서는 그에게 바닥에서부터 출발하라고 조언하지만 펍킨은 자신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다며 무조건 제리 랭포드쇼에 나가겠다고 고집한다. 능력이 출중한 자신에게 기회가 오지 않는 것은 제리 랭포드 같은 톱스타가 자신을 무시해 기회를 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인생의 목표가 오직 제리 랭포드처럼 되고 그를 넘어서는 것인 펍킨은 길이 막히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려 한다.


영화 '코미디의 왕'


결과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폭력까지 동원하는 맹목적인 극단주의자를 우리는 파시스트라고 부른다. 타인의 감정에 이입하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만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그는 블랙코미디에 가려져 있지만 사회의 또다른 흉기다. 얼굴에 가득한 웃음 이면에 집요한 욕망을 감추고 있다. '조커'의 토드 필립스 감독이 그에게서 싸이코패스 조커의 원형을 발견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뉴욕이라는 대도시에서 고립돼 살아가면서 과대망상증에 빠져 실재와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펍킨은 ‘택시 드라이버’(1976)의 트래비스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펍킨이 트래비스보다 더 위험한 인물이라는 주장도 있다. 트래비스와 달리 피를 뿌리지 않고 우스꽝스러워 관객이 그의 입장에 쉽게 동화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다. 스콜세지 역시 이에 동의했다.



영화의 엔딩이 리얼리티인지 판타지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다. 영화는 펍킨이 토크쇼에 출연하거나 제리와 만나 식사를 하는 판타지 장면을 곳곳에 마치 리얼리티인 것처럼 삽입했는데 같은 방식으로 보면 엔딩도 판타지일 가능성이 있다. 평론가 데이비드 보드웰이 이에 대해 궁금증을 제기하자 스콜세지는 관객이 알아서 판단할 문제라고 말했다. 이후 스콜세지가 리얼리티를 판타지처럼 그리는 마이클 파웰 감독의 영화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걸 보면 아무래도 판타지쪽에 무게가 더 실리기는 한다.


PS) 스콜세지는 당초 제리 랭포드 역에 자니 카슨을 출연시키려 했다. 각본가 짐머만 역시 데이비드 서스킨드 쇼와 자니 카슨 쇼에서 영감 받아 시나리오를 썼다. 하지만 카슨은 영화 출연이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제안을 거절했다. 이후 프랭크 시나트라와 딘 마틴이 후보에 올랐으나 결국 마틴의 파트너였던 제리 루이스가 낙점됐다. 제리 루이스는 감독이자 영화배우이자 코미디언인 다재다능한 엔터테이너다.


마틴 스콜세지, 제리 루이스, 로버트 드니로


PS2) 로버트 드니로의 메소드 연기를 볼 수 있다. 드니로는 실제 자신의 싸인을 받으러 다니는 사람을 오히려 스토킹하면서 계속해서 질문을 던져가면서 캐릭터를 만들었다. 드니로는 펍킨 캐릭터에 빠져 살면서 제리 루이스의 화를 실제로 돋우려 했지만, 제리는 촬영 현장이 무척 즐거웠다고 회고했다.


PS3) 영화 속에서 제리가 공중전화 옆을 지나갈 때 한 나이 든 여인이 전화를 걸다 말고 싸인을 받은 뒤 조카와 통화할 것을 요청하다가 거절당하자 제리에게 “암에나 걸려라”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는 실제 제리 루이스에게 있었던 일화를 각색한 것이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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