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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 할리우드에 한물 간 액션 배우 릭 달튼(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과 그의 오랜 친구인 스턴트맨 클리프 부스(브래드 피트)가 살았습니다. 그들의 옆집에는 잘 나가는 감독 로만 폴란스키와 촉망받는 배우인 아내 샤론 테이트(마고 로비)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알았지만 왕래는 없었습니다.


왕년의 TV 서부극 스타인 릭은 잊히지 않기 위해 연기혼을 불태우고, 촬영장에서 브루스 리와 싸우다가 해고당한 클리프는 히피들의 소굴에서 일당백으로 맞섭니다. 임신 8개월째인 샤론은 남편이 유럽으로 출장 간 동안 동네 극장에서 자신이 출연한 영화를 보며 감회에 젖습니다.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물론 이것이 이야기의 전부라면 쿠엔틴 타란티노 영화가 아닐 것입니다. 이 영화의 뼈대는 복수극입니다. 1969년 8월 8일 밤 '테이트 살인사건'을 모르고는 이 영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영화는 그 사건을 안다는 전제 하에 실제와 허구를 뒤섞고 50년 전 살인범들에게 통쾌하게 복수합니다. 한국식으로 이야기하면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영화로 만들되, 피해자 옆집의 두 남자가 범인을 잡아 죽이는 이야기로 각색한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겠네요. 일종의 '대체역사극'입니다.


영화는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에서 제목을 따왔습니다. 서부극 시대의 종말을 알린 전작과 미국사회의 마피아 전성기를 추억하는 후자의 이야기 뼈대도 복수극입니다. 돈과 권력 때문에 배신당한 주인공들은 복수를 감행합니다. 비슷한 제목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가 복수극이 된 것은 당연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영화는 타란티노의 9번째 작품입니다. 그의 영화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작은 사건에서 발화하는 이야기, 꼬리에 꼬리를 무는 구성, 허구와 실제를 섞은 캐릭터, 피가 난무하는 복수 등입니다. 여기에 수다스런 대사와 복고풍 음악, B급 감성 소품 등 디테일이 재미를 더합니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는 이런 타란티노 영화들의 특징이 고루 묻어 있습니다. 1960~70년대 레트로 감성으로 가득하다는 점에서 ‘펄프픽션’ ‘재키 브라운’을 떠올리게 하고, 서서히 분위기를 끌어올린 뒤 마지막에 폭발시킨다는 점에서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장고: 분노의 추적자’와 닮았습니다.


릭, 클리프, 샤론 세 인물을 축으로 전개되는 영화는 1969년 할리우드에 대한 향수와 애정으로 가득합니다. 기존 타란티노 영화들처럼 가볍고 자유롭지만 실제 살인사건을 배경으로 한 만큼 희생자에 대한 예의도 갖추고 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두 집 사이의 문이 열리고 이웃이 만나는 장면은 실제 이루어지지 못한 과거에 대한 희망으로 보여 뭉클한 여운이 남습니다. 타란티노를 따라 50년 전 할리우드로 시간 여행을 떠날 분들을 위해 당시 실제 사건과 영화 속 장면을 비교해 봤습니다.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1. 릭 달튼과 클리프 부스는 여러 배우들의 짜깁기다


주인공 릭 달튼과 클리프 부스는 허구의 캐릭터입니다. 하지만 당시 이들과 비슷한 모델이 있습니다.


주인공 릭 달튼과 클리프 부스는 허구의 캐릭터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우정은 1970년대 스타덤에 오른 버트 레이놀즈와 그의 단짝 친구 스턴트맨 할 니드햄을 닮았습니다. 버트 레이놀즈는 당초 이 영화에 조지 스폰 역으로 출연하기로 했는데 2018년 9월 6일 82세를 일기로 사망하는 바람에 촬영 직전 브루스 던으로 교체됐습니다. 또 제임스 마스든이 버트 레이놀즈 역으로 출연한 장면이 있었지만 편집 과정에서 삭제됐습니다.


영화 속에서 릭은 재기를 위해 이탈리아로 건너가 스파게티 웨스턴 영화에 출연합니다. 실제로 TV 서부극 스타로 활약하다 이탈리아 서부극에 도전한 배우로는 타이 하딘이 있습니다. 타이 하딘은 세르지오 코부치 감독의 ‘죽음의 질주(Death on the Run)’(1967)에서 주연을 맡았는데 영화 속 릭 역시 세르지오 코부치 감독 영화에 출연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참고로 코부치는 타란티노가 만든 ‘장고: 분노의 추적자’와 같은 제목의 ‘장고’(1966)를 만든 감독입니다.


영화 '브롱코 레인'의 타이 하딘


2. 영화는 브래드 피트가 연기한 클리프에서 시작됐다


2009년 타란티노는 20년 동안 같은 배우의 스턴트맨을 한 배우를 알게 됐고 여기서 클리프 부스 캐릭터를 떠올렸습니다. 이것이 이 영화의 시작입니다. 이어서 클리프가 대역을 해주는 배우 릭 달튼 캐릭터를 만든 뒤 이들을 샤론 테이트의 옆집에 사는 것으로 설정하며 할리우드에 관한 이야기로 반경을 넓혔습니다.


클리프 역시 여러 모델이 있습니다. 찰스 맨슨 패밀리가 거주하던 조지 스폰 목장은 실제 서부극 세트장으로 사용됐는데 여기서 영화를 찍은 적 있다는 설정은 실제 스턴트맨 게리 켄트에서 따온 것입니다.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의 클리프 부스(브래드 피트)


브루스 리와 '그린 호넷' 촬영장에서 격투를 벌이는 장면은 당시 브루스 리가 수시로 무시하며 때렸다고 말한 스턴트맨 진 르벨과의 일화를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브루스 리가 실제로 영화에서처럼 잘난 척하는 독불장군이었는지는 논란이 있습니다.


클리프는 아내를 죽이고도 의심을 피한 인물로 나오는데 이는 당대 스타 나탈리 우드의 죽음을 연상시킵니다. 나탈리 우드는 1981년 43세의 나이에 물속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는데 당시엔 혈중 알코올 농도가 높아 익사로 처리됐다가 시간이 한참 지난 후인 2018년 남편이었던 배우 로버트 바그너가 유력한 용의자로 조사를 받았습니다.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의 릭 달튼(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3. 릭 달튼이 출연한 영화는 실제 고전 영화와 합성한 것이다


영화 속 릭의 출세작 '바운티 로' 장면들은 라이벌로 등장하는 스티브 맥퀸의 TV시리즈 출세작 'Wanted Dead or Alive'(1958~1961) 클립을 이용해 만든 것입니다. 릭은 맥퀸의 '대탈주'(1963) 속 한 장면을 연기하기도 합니다.


디지털 기술로 옛날 영상 클립에서 얼굴만 릭으로 바꾼 감쪽같은 장면들은 또 있습니다. ABC의 인기 드라마 'The F.B.I'(1965~1974)의 'All the Streets are Silent' 에피소드는 살인사건이 벌어지기 직전 릭, 클리프와 히피들이 모두 숨죽이고 관람하며 한 템포 쉬어가는 장면에 등장하고, 로드 테일러 주연 영화 '헬 리버(Hell River)'(1974)의 나치 요새 장면은 릭이 화염방사기를 쏘는 장면으로 둔갑했습니다. 이 장면은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2009)을 떠오르게 하는데 이 영화엔 당시 80세의 로드 테일러가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타란티노 영화의 레퍼런스는 이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영화 '헬 리버'의 로드 타일러


4. 영화는 찰스 맨슨을 부각시키지 않는다


클리프는 거리에서 호객하는 푸시캣(마가렛 퀄리)을 따라 히피들의 소굴로 들어갑니다. 서부극의 세트장으로 쓰이던 조지 스폰의 농장입니다. 기이한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클리프는 농장을 빠져나옵니다.


히피들은 찰스 맨슨(데이먼 해리만)을 추종하는 집단으로 ‘맨슨 패밀리’라 불립니다. 당시 실제로 맨슨은 루스 안 무어하우스 등 추종자들을 도시로 보내 돈 많은 남자들을 유혹해 목장으로 데려오라고 시켰습니다. 영화 속 텍스, 사디 등은 실제 맨슨 패밀리 구성원들이었습니다.


맨슨은 비틀스를 숭배하던 뮤지션으로 인종차별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수시로 인종 전쟁을 벌이겠다고 떠벌리고 다녔는데 인종 전쟁을 비틀스의 노래 제목에서 따온 ‘헬터 스켈터’라고 명명했습니다. 그의 추종자들은 100여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1969년 검거되는 찰스 맨슨


맨슨은 추종자들에게 집 주소(10050 Cielo Drive)를 알려주고는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을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이 집은 원래 테리 멜처라는 음반 제작자의 집이었습니다. 멜처는 맨슨의 음반 제작 제안을 거부했고 맨슨은 그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맨슨은 멜처가 이미 이사 갔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 집엔 샤론 테이트 부부가 임대해서 살고 있었고 샤론은 억울한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그날 남편 로만 폴란스키(라팔 자비에루차)는 영화 제작차 유럽에 있었고, 샤론은 친구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그날 모두 테이트와 함께 희생됐는데 헤어스타일리스트 제이 세브링(에밀 허시), 미국 커피회사 'Folgers'의 후계자인 아비게일 폴거(사만다 로빈슨), 시나리오 작가 보이치에크 프리코프스키(코스타 로닌) 등입니다. 스티브 맥퀸과 퀸시 존스도 그날 밤 파티에 초대받았지만 가지 않아 목숨을 건졌습니다. 임신 8개월째인 샤론은 뱃속의 아이라도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히피들은 자비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영화의 클라이막스에서 릭과 클리프가 히피들을 거칠게 대하는 것은 이에 대한 타란티노식 복수입니다.


영화는 맨슨 패밀리의 기이한 행동을 보여주면서 불안감을 증폭시키지만 정작 이들의 교주인 찰스 맨슨은 부각시키지 않습니다. 그가 등장하는 장면은 매우 제한적인데 항상 악당 캐릭터를 카리스마 넘치게 그려온 타란티노의 전작들과는 다른 선택입니다. 실제 살인행각을 벌인 맨슨 패밀리 구성원 4명도 하나같이 덜떨어진 모습으로 카리스마와는 거리가 멉니다. 이는 이 우발적인 살인사건이 얼마나 바보같은 짓이었는지를 보여주려는 의도로 읽힙니다.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의 샤론 테이트(마고 로비)


5. 마고 로비는 실제 샤론 테이트가 출연한 영화를 본다


타란티노 감독은 영화 내내 억울한 죽음을 당한 샤론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습니다. 영화 속에 샤론이 서점에 들러 자신이 사랑하는 책 ‘더버빌가의 테스’를 선물용으로 구입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실제로 이 책은 샤론이 죽기 며칠 전 남편에게 선물로 준 책입니다. 폴란스키는 1979년 영화 ‘테스’를 만들면서 이 영화를 샤론 테이트에게 바친다는 자막을 넣어 그녀를 추모했습니다.


영화 속에서 샤론은 자신이 출연한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갑니다. 한국에선 '싸일렌서 파괴부대’로 알려져 있는 영화로 원제는 ‘The Wrecking Crew'(1968)입니다. 브루스 리가 무술 지도를 맡은 액션 코미디 영화입니다. 당시 26세의 샤론은 '인형의 계곡'(1967)에 이어 연이은 영화 출연으로 촉망받는 배우로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 영화는 샤론 테이트의 유작이 되었습니다.


영화 '레킹 크루'의 샤론 테이트


극장에서 샤론은 객석의 반응을 즐깁니다. 이때 영화 속 영화는 마고 로비가 새로 연기한 장면이 아니라 실제 샤론 테이트의 출연 장면입니다. 그러니까 샤론 테이트를 연기한 마고 로비는 실제 샤론의 연기를 보면서 감회에 젖는 연기를 한 것입니다. 이 장면은 꽤 오랫동안 지속되는데 타란티노 감독이 샤론 테이트에게 바치는 헌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배우보다는 살인사건 희생자로 더 유명해진 샤론 테이트는 50년 뒤 타란티노의 영화 속에서 뒤늦게 연기력을 인정받은 셈입니다.


한편 샤론이 박스오피스 직원에게 자신이 출연 배우라고 적극적으로 알리는 모습은 타란티노가 자신의 경험담에서 가져온 에피소드입니다. 그는 ‘트루 로맨스’(1993) 개봉 당시 티켓 판매 직원에게 자신이 이 영화의 각본가라고 자랑하고는 영화를 봤다고 합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극장이 바로 타란티노가 영화를 본 그 극장(Bruin Theater)입니다.



*매일경제에 실린 글입니다.

출처: https://www.mk.co.kr/premium/life/view/2019/10/26778/



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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