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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프로그램 '유열의 음악앨범'이 첫 전파를 탄 1994년 10월 1일, 동네 마트와 비디오 대여점이 있던 좁은 골목길 한귀퉁이의 작은 빵집에서 처음 만난 75년생 동갑내기 미수(김고은)와 현우(정해인)는 윈도95, 천리안, 폴더폰 시대를 거쳐 보이는 라디오가 등장한 2005년까지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한다. '음악앨범'이라는 제목처럼 영화는 그 시절을 상징하는 가요와 함께 이들의 싱그러운 감정을 감정을 섬세하게 그린다.



지난 8월 28일 개봉한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은 '건축학개론'(2012) '응답하라 1994'(2013) 이후 오랜만에 등장한 X세대의 러브스토리다. 1970년대~1980년대 초반에 태어난 X세대는 신승훈, 토이, 이소라, 윤상, 루시드폴, 김동률 등의 발라드가 몸에 체화된 세대다. 이 노래들의 가사는 한결같았다. 지금은 쿨하지 못하고 지질하다고 놀림받는 지고지순한 사랑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이 세대를 겨냥한 로맨스 영화들이 한 사람만을 향한 절절한 사랑을 그리고 있는 것은 당시 가요의 경향과도 일맥상통한다.



돌이켜보면 지금 시대의 청춘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는 취업난과 빈부격차의 본격적인 시작은 X세대부터였다. 이들은 대학 졸업과 함께 사상 초유의 IMF 외환위기가 찾아오는 바람에 각자도생의 시대에 내몰렸고, 해외여행이 보편화되고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이전 세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자유를 만끽하게 됐지만 정작 자유를 즐길 여유는 없었다. 의지할 곳이 없어진 이들이 즐긴 노랫말에 하나뿐이고 운명적인 사랑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이런 시대 배경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에는 이런 상황이 담겨 있다. 작가가 되고 싶던 미수는 대학 졸업과 함께 내키지 않는 연봉 1500만원짜리 일자리와 두달짜리 알바를 제안받는다. 고등학교 중퇴 후 검정고시로 뒤늦게 대학에 들어간 현우는 영상 알바를 전전한다. 오랫동안 현우를 그리워하던 미수는 구질구질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다며 연락을 끊는다. 친구의 죽음과 연관된 과거를 지우고 싶어하던 현우는 자신의 과거를 미수가 알게 되자 황급히 도망친다. 지금은 30~40대가 되어 기득권과 청년층 사이의 '낀 세대'가 된 X세대에게도 청춘은 녹록치 않았다.



두 사람의 인연이 10년 이상 지속되는 연결 고리는 '우연'이다. 꼼꼼하게 개연성을 따지면 이해하기 힘든 설정일 수 있지만 반복되는 '우연'이 이들의 사랑을 '운명'으로 만들어주기 위한 장치라고 생각한다면 정지우 감독의 의도를 납득 못할 것도 없다. 힘든 시대를 버티며 살아온만큼 이들의 사랑은 운명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 이 영화의 타깃인 X세대 관객을 위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월애' '동감' '클래식' 등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에 나온 그 시절 로맨스 영화들도 우연이 운명을 만드는 이야기가 다수였다.



반복되는 우연이 빚는 사랑을 시대상황에 접목했다는 점에서 영화는 1997년 진가신 감독의 홍콩영화 '첨밀밀'을 닮았다. ‘첨밀밀’은 등려군이라는 대만 가수를 좋아하는 상하이 출신 남녀가 홍콩과 미국에서 힘겹게 살아가면서 10년 동안 우연한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이야기였다. 두 사람의 안쓰러운 처지는 홍콩의 중국 반환을 앞둔 당시 홍콩인들의 불안과 맞물려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에서 등려군의 역할은 유열이 대신한다. 유열은 헤어질 뻔한 미수와 현우를 라디오라는 매체를 통해 이어준다. 영화 속 1997년 배경에선 '첨밀밀'의 유명한 골목길 장면을 살짝 재현하기도 한다. 골목길에서 두 사람이 계속해서 엇갈릴 때 당시 많은 관객들은 애간장을 녹여야 했다(지금 같으면 카톡 한 번과 구글지도 검색으로 간단히 서로의 위치를 찾겠지만).



영화는 섬세하고 감성적인 시청각으로 1994년부터 10년여의 기간을 재현하고 있어 그 시절을 살았던 관객이라면 영화의 배경 속에 자신을 대입해보는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혹은 밀레니얼 이후 세대라면 두 사람의 애절한 발라드 같은 순애보를 통해 이전 세대가 과거를 추억하는 방식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과거를 미화하는 것은 인간만의 특징이다. 추억 속에서 나는 지금보다 젊고 아름다웠으므로 과거도 아름답게 포장된다. 나의 사랑은 아무리 지질했더라도 운명이었고, 또 그랬어야만 나를 부정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과거 미화가 지나치면 폭력이나 독재 같은 부정적인 경험도 포장하는 단계로 나아가 미래를 보지 못할 수 있지만, 약간의 노스탤지어는 자존감을 높이는데 도움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유열의 음악앨범'의 순수한 러브스토리는 (개연성 여부를 떠나서) 지금 위로가 필요한 이들에게 일종의 힐링영화 기능을 할 것이다.



영화 '은교'에 이어 정지우 감독과 두 번째로 호흡을 맞춘 김고은은 순수하면서도 자기주도적인 삶을 사는 미수를 연기하는데 이런 영화들에서 전형적인 여성 캐릭터인 '국민 첫사랑'이라는 이미지에 국한되지 않은 진취적인 캐릭터여서 반갑다.



정해인은 드라마 '밥 잘 사주는 착한 누나'의 귀엽고 발랄한 연하남 이미지에서 살짝 탈피해 한 여자만 바라보는 순정남 현우를 연기한다. '너의 결혼식'의 김영광보다는 '봄날은 간다'의 유지태를 더 닮은 현우의 순애보는 정해인의 발랄한 이미지와 묘한 불협화음을 일으켜 더 호기심이 들게 한다.


유열의 음악앨범 ★★★☆

1994년부터 2007년까지 순정 로망스.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우리 시대의 첨밀밀.



*매일경제에 실린 글입니다.

출처: https://www.mk.co.kr/premium/life/view/2019/09/26555/



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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