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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 판도라, 부산행, 감기, 연가시, 타워 등 한국형 재난영화의 공통점은? 초반부에 스펙터클한 재난 상황을 전시해 공포심을 부추긴다는 것, 후반부에 가족애 신파로 감동을 이끌어내려 한다는 것, 무능한 공권력이 등장한다는 것, 등장인물 중 누군가는 악당이고 주인공의 절친 중 누군가는 죽는다는 것, 가볍게 시작해도 결국 무거운 분위기로 흐른다는 것 등이다.



이 모든 공식이 영화 '엑시트'에선 통용되지 않는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이런 스테레오타입을 거부한다. 신파도, 악당도, 사람이 죽는 장면도, 나쁜 공권력도 없다. 그 대신 뛰고 매달리고 기어오르는 데 집중한다. 그렇다고 모든 부수적인 것을 다 버리고 액션에만 집중한 '스피드'(1994)처럼 한우물만 파는 것은 아니다. 영화에는 여전히 가족애가 등장하고, 로맨스 비슷한 상황도 있고, 시청률에 목맨 방송사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요소들이 영화를 지배하는 정서는 아니다. 영화는 재난영화의 틀을 빌리고 있지만 주인공인 백수와 사회초년생의 암울한 현실을 담은 청춘영화에 더 가깝다.


국제미래도시라는 거창한 이름의 신도시에 누군가 인체에 치명적인 화학가스를 대량 살포하자 도시는 마비된다. 엄마(고두심)의 칠순잔치를 위해 구름정원 웨딩홀에 모여 있던 용남(조정석) 가족은 건물에 고립된다. 웨딩홀 부점장 의주(임윤아)는 용남 가족과 함께 구조요청을 하기 위해 옥상으로 올라가려 하지만 계속해서 난관에 부딪힌다.



"저건 재난이 아니야. 진짜 재난은 지금 우리 상황이야."


영화 도입부에 청년 백수인 용남에게 또다른 백수 친구가 하는 이 대사는 영화의 전개 방향을 함축한다. 유독가스가 마천루를 감싸고 있는 모습은 용남과 의주를 둘러싼 숨막히는 환경을 상징하는 듯하다. 의주는 비록 취직에 성공해 부점장 자리에 올랐지만 치근덕대며 갑질하는 상사를 견뎌야 하는 고달픈 청춘이라는 점에서 용남의 처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희뿌연 유독가스는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용남과 의주의 현실을 보는 듯하다. 슬금슬금 올라오는 유독가스에 희생당하지 않기 위해 이들은 계속해서 달리면서 높은 건물로 올라가야 한다. 가만히 구조요청을 하고 있으면 아무도 그들을 구해주지 않는다. 영화는 치열한 경쟁에 내몰려 각자도생하는 청년들의 현실을 재난이라는 상황에 절묘하게 빗대고 있어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기생충'이 수직구도를 계급 상징으로 썼다면 '엑시트'의 수직구도는 "낙오는 곧 죽음"이라는 청년 세대의 절박함을 대변한다.



영화를 지배하는 정서는 긴장감과 유머다. 클라이밍 동호회 출신인 용남과 의주가 건물을 기어오르고 건너갈 때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영화 '하늘을 걷는 남자'(2015)처럼 높이가 주는 짜릿함이 있다.


긴장감 사이엔 유머가 담겼다. 포복절도할 웃음이 아니라 페이소스가 담긴 웃음이다. 백수인 용남의 말을 가족들이 아무도 안 믿다가 재난문자에 반응할 때, 쿨한 척하던 용남과 의주가 다리에 힘이 풀리며 횡설수설할 때 객석에선 킥킥거리는 웃음이 터진다. 극한 상황에서 멋지게 포옹하는 여느 영화 속 주인공보다 겁에 질린 두 사람의 모습이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영화는 강혜정 PD와 류승완 감독의 '외유내강'이 제작을 맡았다. 이 영화로 데뷔하는 이상근 감독은 류승완 감독의 '다찌마와 리 -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2007) 연출부로 충무로 경력을 시작했다. 그 때문인지 영화에선 류승완 영화의 냄새가 난다. 도심에서 지질하게 살아가는 숨은 고수가 위기 상황에서 빛을 발한다는 내용은 류승완 영화의 단골 소재다. 자신감 없이 주저하다가 결정적인 순간 숨겨둔 내공을 드러내는 조정석은 '아라한: 장풍 대작전'(2004)의 류승범을 닮았다. 쓰레기종량제 봉투가 보호막이 되고 대걸레가 들것이 되는 생활 액션은 '짝패'(2006) 등에서 봐오던 감성이다.



기존 재난영화의 공식을 따르지 않는 만큼 정색하고 따지고 들면 허점이 많이 보이는 영화지만 청춘의 재난탈출 과정에 집중하기 위한 선택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보면 신선한 시도에 박수를 쳐주고 싶다. 영화 진출 이후 처음으로 비중 있는 주연을 맡은 임윤아는 조정석과 함께 나란히 달리고 건물 벽을 오르는 액션 장면에서 빛을 발한다.



엑시트 ★★★

신파도 악당도 없는 유쾌한 재난영화



*매일경제에 실린 글입니다.

출처: https://www.mk.co.kr/premium/life/view/2019/08/26265/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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