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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스튜어트 왕조의 마지막 군주인 앤 여왕은 형부이자 고종사촌인 윌리엄 3세가 사망하면서 1702년 갑작스럽게 즉위했지만 병약했다. 그녀는 어릴 적 소꿉친구인 세라 처칠 공작부인에게 나라 일을 맡겼다.


섭정 체제는 항상 권력을 쥐게 된 자의 탐욕으로 파국을 맡는다. 조선시대에도 문정왕후, 정순왕후, 흥선대원군 등 끝이 좋지 않았다. 아, 물론 가장 최근에는 박근혜와 최순실이 있다.


영화 속에서 앤은 17마리의 토끼를 키운다. 그녀는 토끼 수만큼 자식을 잃은 아픔을 갖고 있다. 임신한 아이들은 유산, 사산으로 죽었고, 태어난 아이들도 모두 10살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반복된 수차례의 상실감을 감안하면 앤이 병약하고 심약한 것은 납득이 가고도 남는다.



영화 속 배경은 1708년으로 앤 여왕 6년차다. 세라의 사촌 애비게일이 궁전으로 세라를 찾아온다. 아버지의 도박빚을 갚느라 억울하게 하녀로 전락한 그녀는 다시 신분상승하겠다는 뚜렷한 목표를 갖고 있다. 처음엔 세라에게 잘 보이려 하지만 차츰 여왕의 눈에 띄면서 두 사람은 경쟁관계가 된다. 늑대 같은 남자들과 양잿물에 손을 담그게 하는 하녀들에 둘러싸인 그녀는 감언이설로 여왕을 꼬득인다. 앤은 세라와 애비게일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상황에 놓인다.


‘더 페이버릿’은 앤, 세라, 애비게일 간의 질투와 배신의 드라마다. 한 순간도 긴장을 멈추지 못할 만큼 날이 바짝 서 있다. 의상과 무대 디자인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워 이것이 피말리는 음모와 계략으로 점철된 드라마라는 것을 잊게 만든다. 광각 렌즈와 앙각 쇼트의 잦은 사용은 실제보다 인물의 감정을 더 부풀린다. 그래서 그들의 열정 속으로 빨려들어갈 수밖에 없다.


베니스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올리비아 콜먼)을 수상했다.


애비게일 매셤(엠마 스톤)

세라 처칠(레이첼 와이즈)

앤 여왕(올리비아 콜먼)


여성 주도적인 영화


‘더 페이버릿’이 지금 이 시대에 갖는 의미는 세 명의 여성 캐릭터가 주도하는 영화라는 점에 있다. 영화 속 남자들은 폭력적이거나 무기력하거나 사악하다.


애비게일을 흠모하는 사뮤엘 매셤(조 알윈)이 방으로 찾아오자 그녀는 이렇게 묻는다. “나를 유혹하러 온 건가요, 강간하러 온 건가요?” 그러자 남자는 “나는 신사예요”라고 말한다. 이에 애비게일은 체념하듯 이렇게 말한다. “아, 그럼 강간이군요.”


‘영국신사’의 위선을 꼬집는 날카로운 라인이다.



이후 애비게일은 매셤을 철저하게 이용한다. 사랑에 빠져 허우적대는 이는 매셤이다. 그는 그녀의 신분상승을 위한 징검다리일 뿐이다. 애비게일이 결혼 첫 날밤에 매셤을 대하는 태도는 어쩌면 이 영화에서 가장 섬짓한 장면 중 하나다.


세 명의 여성만으로도 우정과 복수의 권력 치정극, 사랑과 증오의 멜로드라마가 완성된다. 궁 내에서 벌어지는 치밀한 전쟁에 남자가 끼어들 자리는 없다. 차가운 이성을 지닌 토리당의 당수 할리(니콜라스 홀트)마저도 결국 애비게일의 정략에 이용당한 것으로 그려질 뿐이다.


앤 대신 국정을 돌보는 세라는 남자들 앞에서 절대 주눅드는 법이 없다. 그녀는 절대권력인 여왕에게까지 “오소리 같다”, “애처럼 징징대지 말라”, “칼로 눈을 찌르고 싶다”고 직설을 쏘아댄다. 앤은 그녀를 총애해 궁전을 선물한다.



놀라운 앙상블 연기


‘더 페이버릿’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단연 캐스팅이다. 앤 역의 올리비아 콜먼, 세라 역의 레이첼 와이즈, 애비게일 역의 엠마 스톤은 놀라운 트라이앵글 앙상블을 보여준다.


아이처럼 주저앉아 있다가 심술을 부리는 앤, 강철 같은 표정 뒤에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는 세라, 영리함을 무기로 돌진하는 애비게일은 확실하게 다른 캐릭터들이어서 한 화면에 함께 있어도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 권력게임이 정점에 치달으면서 강 대 강으로 부딪힐 때 불꽃이 튀는데 승부가 기울어진 뒤에도 불꽃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는다. 아카데미 시상식이 고심 끝에 세 배우를 모두 후보에 올린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다.



올리비아 콜먼과 엠마 스톤은 감독의 첫 번째 캐스팅이었다. 하지만 레이첼 와이즈는 뒤늦게 합류했다. 원래 그 역할은 케이트 윈슬렛이 맡기로 되어 있었지만 그녀가 다른 스케줄로 하차하면서 공석이 됐다. 감독은 케이트 블란쳇에게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감독은 전작 ‘더 랍스터’의 주연배우 레이첼과 접촉해 합류를 이끌어냈다.


앤 여왕을 연기한 올리비아 콜먼은 여왕 전문(?) 배우로 이미지가 굳어지게 됐다. 그녀는 ‘더 크라운’에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허드슨의 하이드 파크’에선 엘리자베스 1세를 연기한 적 있다.


‘라라랜드’로 주가가 오른 엠마 스톤은 처음엔 이 영화 출연을 주저했다. 애비게일을 단지 희생양 하녀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각본을 꼼꼼히 읽고는 감독에게 꼭 하고 싶다고 간청할 정도로 열정을 보였다.


촬영은 2017년 봄 영국 허트포드셔의 햇필드 하우스에서 이루어졌다.


실제 인물의 초상화. 왼쪽부터 세라 처칠, 앤 여왕, 애비게일 매셤.


실제 역사와 허구가 섞인 영화


영화의 각본을 쓴 데보라 데이비스는 세라 처칠이 남긴 회고록과 세라의 직계 후손인 윈스턴 처칠의 자서전에서 영감 받아 이 맛깔난 시대극을 구상했다.


하지만 사극은 항상 고증에 대한 비판에 시달린다. 아무리 꼼꼼하게 챙겨도 어딘가에선 늘 비판의 여지가 생긴다. 드라마를 중시하는 감독일수록 항상 더 풍부한 감정을 드러내기 위해 허구적 상황을 삽입하고 싶은 욕망에 휩싸인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영화를 만들기 전부터 아예 역사에 크게 개의치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 결과 영화에는 실제 역사와 허구가 마구 뒤섞여 있다.


세라와 애비게일이 앤을 놓고 라이벌 관계가 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레즈비언 관계였는지는 연구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다. 세라는 영화에서처럼 앤이 직접 쓴 편지로 여왕을 협박했다. 많은 학자들은 여기서 앤의 성적인 습관을 유추해 그녀가 세라, 애비게일과 침대를 공유했을 거라고 유추했다.



영화 속에 등장하지 않지만 앤에게는 남편이 있었고, 두 사람은 매우 사이가 좋았다. 애비게일이 세라의 차에 독을 탄 것도 허구다. 또 앤이 17마리의 토끼를 키웠다는 것도 사실과 다르다. 당시 토끼는 애완이 아닌 식용 동물이었다.


세라가 추방된 뒤 여왕의 비선 역할을 하던 애비게일은 이후 왕위계승권을 놓고 할리와 격론을 벌인다. 애비게일은 스튜어트 왕조를 계승하려는 재커바이트를 지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1714년 여왕이 49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독일 하노버왕가 후손이 승계자로 결정되자 그녀는 궁을 떠나 시골 마을에서 조용히 칩거하며 여생을 보냈다.



토끼와 합성한 모호한 엔딩


그리스 출신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자신의 작업을 직관에 의지한다고 말한다. 전작들을 보면 치밀한 계획에 의해 짜여진 플롯 사이사이로 직관적인 장면들이 보인다.


‘킬링 디어’에서 심장을 보여주는 첫 장면, 꿈벅거리는 사슴의 눈망울, ‘더 랍스터’에서 갑자기 나타난 평화로운 갈대밭 등은 직관적인 판단이 아니고서는 들어가기 힘든 장면들이다.


‘더 페이버릿’에선 가장 마지막에 감독의 직관적인 판단에 의해 삽입된 장면이 등장한다. 세라를 몰아낸 애비게일이 앤의 다리를 주무르는 장면에 토끼의 이미지를 합성한 것이다. 삼중노출로 오랫동안 지속되는 이 모호한 영상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마침내 여왕의 총애를 독차지하게 됐지만 결국 애비게일은 앤에게 또하나의 토끼와 다름 없지 않느냐고. 짝을 찾지 못하면 동물이 된다는 기발한 상상력의 ‘더 랍스터’의 세계관을 대입하면, 이제 강력한 적이었던 짝을 잃은 애비게일은 어쩌면 토끼가 될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

눈을 뗄 수 없는 세 배우의 연기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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