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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영국 소설가 메리 셸리가 SF 걸작 [프랑켄슈타인 - 현대의 프로메테우스](1818)를 출간한지 200년 되는 해였다. 소설 속에서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창조한 괴물은 이후 영화, 뮤지컬 등 여러 장르에서 수없이 변주되었다. 특히 인공지능 시대에 시사하는 바가 더 크기에 200년이 지난 지금도 ‘고전’으로 계속해서 회자되고 있다.



20일 개봉하는 영화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의 탄생’(이하 ‘메리 셸리’)은 이 놀라운 작품을 쓴 작가가 당시 여성운동 태동기의 영국 사회를 살아간 여성, 그것도 18세의 아주 젊은 여성이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녀가 이 작품에서 묘사한 인간의 탐욕, 관계의 단절, 무책임, 고독, 복수 등 진폭 심한 감정은 오롯이 그녀가 실제로 겪은 사건들로부터 승화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젊은 여성이 이토록 기괴한 주제의 글을 쓸 수 없다는 이유로 한동안 이 작품의 작가로 인정받지 못했다. 영화는 이 작품을 쓰기까지 그녀에게 어떤 심리적 변화가 있었는지를 그리면서 동시에 당시 사회 분위기 속에서 그녀가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되찾았는지를 묘사한다.



그런데 이 영화가 흥미로운 지점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 고풍스러운 드라마가 마무리된 뒤 엔드크레디트에는 굉장히 이국적인 이름 하나가 등장한다. 하이파 알 만수르라는 아랍계 이름이다. 19세기 영국 배경으로 백인들만 등장하는 이 영화에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름의 소유자가 무려 영화의 감독이다. 만수르는 이 영화를 통해 메리 셸리의 저항이 단지 200년 전의 사건이 아닌 현재진행형인 사건이라고 말하고 있다. 만수르는 알면 알수록 메리 셸리와 닮았다. 그녀는 대체 누구일까? 지금부터 영화감독 만수르와 메리 셸리를 비교해 보자.


1831년 새뮤얼 존 스텀프가 그린 메리 셸리.


만수르는 1974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태어나 호주에서 영화를 배운 여성 감독이다. 여성이 운전하는 것이 최근에야 합법화됐을 정도로 여성 인권이 형편없는 나라에서 온 여성 감독이니만큼 그녀에겐 우여곡절이 많았을 터다. 사우디아라비아는 1983년부터 올해까지 극장이 없었을 정도로 영화에 대해 폐쇄적인 정책을 펼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영화에 도전한 그녀는 사우디아라비아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다. 만수르가 2014년 만든 장편영화 데뷔작 ‘와즈다(Wadjda)’는 외국에 소개된 영화들 중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전 과정을 촬영한 유일한 영화로 기록되어 있다.



사우디 최초의 여성 감독 만수르가 영화를 만들게 된 과정은 최초의 여성 SF 소설가 메리 셸리가 소설을 쓰게 된 과정과 닮았다. 감독 역시 한 인터뷰에서 “처음엔 메리 셸리라는 인물에 대해 관심이 없었는데 알면 알수록 동질감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메리 셸리는 사회철학자이자 무정부주의자인 아버지(윌리암 고드윈), 페미니즘의 고전을 남긴 어머니(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등 뛰어난 업적을 남긴 부모 아래서 사회비판적 시각을 견지한 아이로 자랐다. 그녀는 낭만주의 시인(퍼시 B 셸리)과 동거하고 당대 슈퍼스타였던 로드 바이런과 교류하는 등 문재들 사이에 있으면서도 주눅들지 않고 그들을 뛰어넘는 불후의 걸작을 남겼다. 그녀는 감정의 평지풍파를 겪고난 후 내면의 소리를 좇아 SF소설의 효시인 ‘프랑켄슈타인’을 썼는데 이 소설 속에는 10대 시절 그녀의 삶이 비유적으로 투영되어 있다.


하이파 알 만수르 감독


만수르 역시 예술적 감각이 뛰어난 아버지 아래서 자랐다. 시인 압둘 라만 만수르의 여덟 번째 아이로 태어난 그녀는 영화를 접하기 힘든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아버지가 그녀에게 비디오를 가져다주며 독려한 덕분에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뜰 수 있었다.


그녀는 이집트 카이로의 아메리칸 대학에서 비교문학으로 학사학위를 받은 뒤 호주로 이주해 시드니 대학에서 영화로 석사학위를 받으며 비로소 영화의 길로 들어섰다.


메리 셸리가 자신이 속한 사회의 제약에 강하게 맞선 것처럼 만수르가 영화를 만든 과정 역시 저항의 연속이었다. 그녀는 첫 작품부터 사우디아라비아 여성에게 덧씌워진 터부를 주제로 했다. 단편영화 ‘누구?’와 '그림자 없는 여자들'은 사우디에서 여성이 외출할 때 반드시 입어야 하는 온몸을 가리는 옷 ‘아바야’ 관습을 다룬 작품으로 그녀는 이 영화로 사우디에서 논란의 중심에 섰다. 종교를 부정했다는 이유로 협박 메일에 시달리는 한편 터부를 논쟁거리로 끌어왔다며 찬사를 받기도 했다.


‘와즈다(Wadjda)’


만수르의 장편영화 데뷔작 ‘와즈다’는 사우디의 수도 리야드 인근에 사는 10세 소녀가 녹색 자전거를 타고 싶어하는 이야기다. 여자가 자전거를 타면 안 된다는 엄마의 말에 저항해 소녀는 자전거를 살 돈을 모으기 위해 코란 경전 퀴즈대회에 출전한다. 이란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자신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1987)를 기획하며 이란 내 검열을 피하기 위해 아이들의 이야기를 비유적으로 활용한 것처럼, 만수르 역시 사회비판적 영화를 만들면서 아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회하는 전략을 썼다.


사우디에선 여성이 공공장소에서 남성과 대화하는 것이 금지돼 있기 때문에 만수르는 리야드에서 촬영할 때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밴 안에서 모니터를 보면서 워키토키로 배우 및 스태프와 의사소통해야 했다.


이토록 우여곡절 끝에 만든 영화는 2012년 베니스영화제에서 미래의 영화상, 국제예술영화관연맹상, 인터필름상 등을 수상하며 성과를 거두었고, 사우디 알 왈리드 빈 탈랄 왕자의 후원에 힘입어 사우디 최초로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부문에 출품되기도 했다(아쉽게도 후보에 오르지는 못했다). 결국 이 영화가 화제가 된 덕분에 사우디에서 여성이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독특한 배경의 소신 있는 여성 예술가는 곧 서양 영화계의 부름을 받았고 메리 셸리의 전기영화 연출가로 낙점됐다. 호주 출신 작가 엠마 젠슨이 쓴 각본을 만수르는 메리 셸리의 강인함을 돋보이게 하는 방식으로 다듬었다. 만수르가 영화를 만들면서 강조한 지점은 프랑켄슈타인이라는 괴물의 창조자보다는 이 괴물을 18세 소녀의 마음 속에 태동시킨 당시 사회 분위기와 소녀의 저항의지였다. 제목도 당초 ‘별들의 폭풍(A Storm in the Stars)’에서 심플하게 ‘메리 셸리(Mary Shelley)’로 바꾸었다. 그녀는 연출 의도를 이렇게 밝혔다.


“메리 셸리는 완벽한 인물이 아니기에 의문의 여지가 있는 선택도 하고 때론 실수도 한다. 하지만 그녀는 낙담하지 않고 상실로 인한 괴로움에 굴복하지도 않는다. 그저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가지고 있던 고통의 짐을 심오한 예술 작품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언제라도 포기하거나 뛰어난 부모 혹은 남편을 따르는 게 쉬울 수도 있었을 텐데도 메리 셸리는 결국 자기만의 내면의 목소리를 찾는다. 나 역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영화를 만드는 건 메리 셸리처럼 모든 사회적 편견을 깨고 나아가는 과정이었다. 나는 상실과 괴로움을 딛고 내면의 목소리를 찾았던 메리 셸리처럼 강한 여성의 삶을 기록하고 싶었다.”



메리 셸리가 감정의 폭풍을 겪고 나서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소설은 하마터면 빛을 보지 못하고 묻힐 뻔했다. 당시 출판사들은 여성이 이처럼 기괴한 작품을 쓸 수 없다며 출판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초판은 동거인 퍼시 셸리의 이름으로 서문을 쓴다는 조건으로 저자 이름 없이 겨우 출판할 수 있었고, 수많은 찬사에 힘입어 두번째 판본부터 메리 셸리의 이름이 새겨질 수 있었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영국에서 위대한 고전으로 추앙받는 작품을 아랍계 여성이 어떻게 영화화할 수 있을까 라는 편견에 맞선 결과물이다. 그래서 영화가 끝난 뒤 등장하는 낯선 이름 하이파 알 만수르는 프랑켄슈타인의 메리 셸리 만큼이나 강력한 인장을 남긴다.


하이파 알 만수르 감독


영화 ‘메리 셸리’로 성공적으로 서양 영화계에 안착한 만수르는 이후 캘리포니아로 이주해 할리우드에서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다. 그녀는 2015년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심사위원에 선정되기도 했다.


‘어느날 인생이 엉켰다(Nappily Ever After)’


만수르는 최근 트리샤 토마스의 소설을 각색한 로맨틱 코미디 ‘어느날 인생이 엉켰다(Nappily Ever After)’를 만들었다. 지난 9월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이 영화는 여성성을 강요받으며 살아온 한 흑인 여성이 남자친구에게 차인 후 머리카락을 밀어버리고 그동안 몰랐던 자신을 찾아가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기존 로맨틱코미디의 새로운 사랑을 찾는 해피엔딩과는 전혀 달리 주인공은 남자를 선택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이는 데뷔작부터 계속돼온 사우디 여성감독 만수르가 사회에 저항하는 그녀만의 방식이다. 메리 셸리가 대가들 사이에서 주눅들지 않고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아 ‘프랑켄슈타인’을 썼던 것처럼, 만수르 역시 서양 문화에 녹아들면서도 자신만의 목소리를 잃지 않고 있다.


메리 셸리 - 프랑켄슈타인의 탄생 ★★★☆

이름을 감춰야 했던 사회에 저항하며 내면의 괴물을 끄집어낸 18세 소녀.



*매일경제에 실린 글입니다.

출처: http://premium.mk.co.kr/view.php?no=24290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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