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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저돌적으로 돌진하는 사랑을 하는 황우연(김영광)은 마침내 그녀와 사귀게 되었을 때 문득 친구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습니다.


“내가 승희를 만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지금처럼 되는 일 없이 힘들진 않았겠지?”


이 말을 엿들은 환승희(박보영)는 떠나갑니다. 끔찍하게 싫었던 아버지가 엄마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곧잘 하던 말을 남자친구에게 들은 것이 너무 충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엄마처럼 불행한 삶을 살기는 싫었던 것이죠. 학창시절부터 자신만 쫓아다니던 남자친구는 믿을 수 있는 줄 알았는데 그에게 처음 들은 속내는 그녀의 마음 속에 상처로 남았습니다. 승희는 이 상처가 너무 커서 잘 아물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에 본능적으로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고 느꼈고 그래서 과감하게 그를 떠납니다.



영화의 앞부분에 설명되고 있듯 승희는 남자에게 3초 만에 반할 수 있는 여자고, 또 세상의 반은 남자라고 믿는 여자입니다. 한 여자만을 바라보는 우연과는 다른 사랑을 하는 사람인 것이죠. 다르다는 것은 결코 비판받을 일이 아닙니다. 그저 다른 것입니다. 승희가 그런 사랑을 하는 것은 어릴 적부터 지켜본 부모의 영향이 클 것입니다. 추측컨대 승희 아버지는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엄마를 지독하게 따라다니며 괴롭혔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맹목적인 사랑을 믿는 게 더 이상하겠죠.



하지만 우연에게 사랑은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승희를 만나기 위해 명문대에 진학했고, 승희에게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았을 땐 질투심에 눈이 멀었고, 나중에 승희에게 남자친구가 없다는 걸 알았을 땐 여자친구를 차버리고 승희에게 달려갔습니다. 아름답고 화사하게 그려지고 있는 우연의 돌진하는 사랑은 사실 어느 정도는 제정신이 아닙니다.


우연과 같은 남자에게 사랑은 빠져나올 수 없는 질병입니다. 모든 것을 다 던집니다. 잘못 되면 자기 자신을 탓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무너집니다.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주고 또 그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영화 후반부에 우연의 친구들도 다들 누군가를 잊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는데, 첫 사랑이 실패하는 이유는 이렇듯 그것이 지나치게 맹목적이고 자학적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소통하지 않고, 상대방에게 주기만 하는 것을 완벽하고 이상적인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죠.



맹목적인 사랑은 시한폭탄 같습니다. 시한폭탄은 언젠가 터지거나 혹은 멈춥니다. 그때가 되면 마비된 이성이 제자리를 찾습니다. 나는 왜 여기서 폭탄을 끌어안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내가 그동안 주었던 정성과 시간에 대한 보상을 더 이상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사랑은 후회라는 감정으로 대체됩니다.


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후회는 오직 영장류만 느끼는 고등한 감정이라고 합니다. 후회는 어떤 선택을 했을 때 만약 그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얻을 수 있었던 보상에 대한 미련입니다. 즉, 현실을 기회비용의 측면에서 계산해 지금보다 더 나은 ‘만약’을 상상하는 것입니다.


사랑, 연애, 결혼은 누군가를 선택하는 행위입니다. 꼭 일대일 관계가 아닌 다자간 연애 폴리아모리라도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누군가를 선택합니다. 함께 살거나, 함께 시간을 보내거나, 생각을 나누는 건 그 사람에 대한 선택의 결과물이죠. 그런데 어느 한쪽이 그 선택을 후회하고 있다면 그 관계는 진실할 수 없을 겁니다. 진실하지 않은 관계는, 즉 서로를 속이는 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 없습니다. 혹여 그 후회를 숨기고 살아가더라도 감정이란 무의식 중에 불쑥 드러나게 마련이니까요.



영화는 우연이 승희의 결혼식에 찾아가는 것을 마지막 장면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발랄하고 귀여운 영화에서 저는 마지막 장면이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우연은 그 남자와 결혼하지 말라고 승희를 설득하기 위해 결혼식에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떠오르는 영화가 한 편 있었는데 ‘맘마미아 2’입니다. 영화 초반부에 결혼식날 신부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물에 빠져죽는 시늉을 한 남자가 있었죠. 신부는 결혼식에서 빠져나와 그 남자에게 안깁니다. 하지만 이것은 영화의 배경이 그리스의 한 섬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판타지일 것입니다. 현실에선 결혼식장 주위에 바다도 없을 테고, 또 설사 그렇게 자살하겠다며 신부에게 소리를 지른다면 정신이 반쯤 돌아버린 스토커 취급을 받을 테니까요.


‘봄날은 간다’ ‘광식이 동생 광태’ ‘건축학 개론’ 등 그동안 첫 사랑을 그린 한국영화 속 남자 주인공은 대부분 지질했습니다. 그러나 ‘너의 결혼식’의 우연은 지질하지 않습니다. 그는 조금씩 성장해 갑니다.



우연은 신부대기실에서 승희를 만나 작별인사를 합니다. 저는 이 장면이 ‘라라랜드’의 마지막 장면처럼 쿨해서 좋았습니다. 아름다운 작별이란 참으로 힘든 일이니까요. 남자와 여자는 오랜 시간 동안 계속 엇갈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서로 다른 길을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인정하기 힘들 만큼 괴롭지만 누구의 책임도 아닙니다. 우연이 입을 잘못 놀렸다고 자책할 일도 아닙니다. 그가 속마음을 말해 승희가 알아버린 것은 언젠가 벌어질 일이었습니다. 맹목적인 사랑의 시한폭탄은 언젠가 멈추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의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뒤에 그 사랑이 상해버렸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보다 미리 알아버린 것이 어쩌면 두 사람에게는 행운일 수 있습니다. 구질구질하게 끝맺지 않아도 되니까요.



사람들은 누군가를 만나고 또 헤어집니다. 그리고 또 누군가를 만납니다. 그것이 일상입니다. 어떤 헤어짐은 아프고 어떤 헤어짐은 시원합니다. 우리는 곧잘 결혼은 사랑의 결말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결혼은 사랑의 끝이 아닌 또다른 시작일 뿐입니다. 결혼은 사랑을 의무감으로 만들어버린 계약이고, 그 선택에는 전혀 다른 책임이 따릅니다.


현실에서 여자는 서른 즈음에 만난 남자의 손을 잡고 떠나가고, 남자는 첫사랑을 못 잊고 방황하다가 곧 주변에 있던 다른 여자를 발견하곤 하는데 그게 사랑과 결혼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인생이 무척 권태로울 것입니다. 사랑은 결혼 후에도 계속되는 것이고, 또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니까요.


승희와 멋지게 헤어진 우연에게는 또다른 사랑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때 우연의 사랑은 더 성장해 있을 것입니다.


너의 결혼식 ★★★

첫사랑 성장담. 지질하지 않은 남자의 탄생.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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