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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명: 흑금성

신분: 국가안전기획부 대북공작 비밀요원(1급 기밀)

본명: 박채서

출신: 충청북도 청원

경력: 육군3사관학교 - 육군대학 - 국군 정보사령부

특이사항: 보통 키에 다부진 체격, 충청도 사투리 약간


1998년의 박채서 씨


영화 ‘공작’에서 황정민이 연기한 박석영의 실제 인물은 흑금성이라는 암호명으로 더 잘 알려진 박채서 씨다. 영화는 국군 정보사령부 소속 박채서 소령이 안기부 비밀요원으로 변신해 북한에 침투하는 과정을 그렸다. 영화 속 이야기들은 모두 박 씨와 그를 오랫동안 취재한 김당 UPI뉴스 기자의 회고록에 근거한 것이다. 필자는 회고록과 기존 언론 보도를 바탕으로 박 씨의 삶을 5개의 키워드로 정리했다.



#흑금성


“제가 흑금성이라는 것을 저도 언론 보도 보고서야 알았습니다.”


1998년 3월 17일 한겨레신문에 흑금성의 존재가 폭로됐다. 1급 기밀 사항이지만 안기부 해외공작실 이대성 실장(영화에선 최학성이라는 배역으로 조진웅이 연기한다)이 의도적으로 흘리는 바람에 보도된 것이다. 이로 인해 박채서 씨의 공작원 생활도 막을 내렸다.


영화에서는 최학성이 박석영에게 흑금성이라는 암호명을 알려주면서 세상에 단 세 사람만 이 암호명을 알고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 박 씨는 공작 기간 내내 자신의 암호명이 흑금성인지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흑금성은 안기부 내 특정 인물들과 청와대에서만 통용되던 암호명이었던 셈이다.



박 씨가 안기부 비밀요원이 되겠다고 결심한 것은 그가 장교 육성기관인 육군대학을 다닐 때다. 육군대학에서 참모총장상을 받고, 일본어와 영어에 능통한 인재였던 그는 육사 출신이 아니면 진급에서 누락되는 군 시스템에 한계를 느끼던 차에 안기부 측의 제안을 받고 군복을 벗기로 결심한다. 북한의 핵개발 위협이 가중되던 시기에 국가를 위해 더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도 정보요원으로 변신한 계기가 됐다.


그는 안기부와 협의해 주위에서 돈을 빌리고 갚지 않아 신용불량자가 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문제아’로 만들어 군을 떠날 준비를 했다. 북에서 파견한 고정간첩이 안기부 내에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들에게 의심받지 않기 위해 엘리트 이미지를 지우려 한 것이다. 군복을 벗은 후 박 씨는 사업을 한다는 명분으로 베이징으로 건너가 북한과의 접촉 루트를 찾아다녔다. 가족들, 심지어 아내도 그가 안기부 비밀요원인지 몰랐다고 한다.


리철은 영화 속에서 이성민이 연기한 리명운으로 등장한다.


#리철


“이 신분증 들고 지금 당장 평양을 빠져나가라. 자네가 누구인지 이젠 모르갔지만…”


영화 속에서 이성민이 연기하는 리명운의 실제 인물은 리철이다. 당시 그는 대외경제연구원 심의처장이라는 직함을 갖고 있었고, 리호남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하며 남측의 정치권과 재계 인사들을 만나고 다녔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리호남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리철은 김일성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엘리트다. 자본주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을 정도로 당시 북한에서 몇 안 되는 시장경제 전문가였다. 박채서 씨와 1954년생 동갑내기였기에 말도 잘 통했다. 두 사람은 인간적으로 꽤 친해서 서로 '리상' '박상' 이런 식으로 불러왔다고 한다.



1990년대 중반 김정일 위원장은 ‘자력갱생’을 지시했다. 알아서 외화를 벌어와서 일부는 쓰고 일부는 바치라는 지시다. 마약, 위조지폐, 중고차 판매, 공연, 식당, 골동품 등이 주요 외화벌이 수단이었다. 영화 ‘베를린’ 등에 묘사된 북한의 위조지폐 사업이 이때 조직적으로 시작됐다.


흑금성은 이러한 북한의 사정을 알아차리고 돈을 벌게 해주겠다고 유혹한 끝에 북한 고위인사를 만날 수 있었다. 영화에서처럼 장성택 조카의 물건을 안기부가 대량으로 구입했다가 15만 달러어치 물품에 클레임을 건 뒤 흑금성이 이를 해결해주는 방식으로 신뢰를 쌓아나갔다.


1998년 흑금성의 정체가 밝혀진 후에도 리철이 북한에서 숙청되지 않은 것은 그의 외화벌이 능력이 탁월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는 뛰어난 경제실적을 이유로 공화국 영웅칭호를 받기도 했다. 리철이 정찰총국 소속 대남 공작원이라는 의혹도 있지만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그동안 한국의 정재계 인사들은 대부분 리철을 통해 북측과 접촉해왔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의 물꼬를 튼 것은 2006년 안희정-리철 베이징 회동이었고, 2008년 이명박 정권에선 임태희 전 고용노동부 장관이 리철을 만났다고 알려져 있다. 또 삼성 경영진과 금호아시아나 박삼구 회장 역시 남북합작 사업 논의를 위해 리철을 만난 기록이 남아 있다.


영화에선 흑금성의 정체가 폭로된 날, 박석영이 리명운의 도움으로 황급히 북한을 탈출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실제로 박채서 씨는 그날 북한에 있지 않았다. 3월 30일 북한에서 광고 촬영을 논의하기 위해 방북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흑금성의 정체가 폭로된 후 광고 사업은 전면 중단됐다.


박기영은 영화 속에서 박성웅이 연기한 한창주로 등장한다.


#아자(Aza) 커뮤니케이션


“채시라 나오는 초콜릿 광고 기억하시죠? 그거 제가 만든 거예요. 제 평생 꿈이 북한에서 광고 찍는 겁니다.”


북한이 남측의 대기업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느낀 흑금성은 북한과 합작사업을 벌일 중소기업을 물색했다. 북한에서 광고를 찍고 싶어 대흥기획에서 독립해 ‘아자(Aza) 커뮤니케이션’이라는 회사를 차린 광고인 박기영이라는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영화에서는 한창주라는 배역으로 박성웅이 연기한다.


흑금성은 박기영 사장의 옆집으로 1993년 이사해 편승공작을 시작한다. 수년 동안 친분을 쌓은 뒤 흑금성은 박 사장의 회사에 지분을 투자해 전무 직함을 갖게 된다(당시 이 회사의 실질적인 오너는 정진호 씨로 자유한국당 정진석 의원의 친형이다). 박 사장은 조선족을 통해 북한과의 루트를 찾으려 했지만 실패하고 있었다. 이에 흑금성은 리철을 통해 일사천리로 남북합작 광고사업을 진행시킬 수 있었다.


1997년 2월 아자 커뮤니케이션은 베이징에서 금강산총회사와 평양, 백두산, 금강산, 묘향산 등에서 광고 촬영을 하는 5년 독점 계약을 체결했다.


흑금성이 1997년 6월 김정일 위원장을 만난 것은 남북합작 광고 사업의 하이라이트다. 박채서 씨에 따르면 그가 평양에 머물던 어느날 저녁 리철이 박 씨를 벤츠에 태우고 김 위원장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박 씨는 김 위원장에 대해 “말이 명쾌하고 화통한 성격”이라고 술회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였지만 남북합작 광고 사업은 이듬해 흑금성의 존재가 탄로나면서 깨지게 된다. 북한에서의 광고 사업이 예정대로 진행됐다면 안기부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대북 공작이 됐을지 모른다. 5년 동안 남측 광고회사 직원이 북한을 돌아다니면서 영상을 찍을 수 있다는 것은 곧 안기부 요원이 카메라를 들고 북한 내부를 샅샅이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1998년 3월 17일 박 사장은 신문보도를 통해 박채서 전무가 흑금성이라는 것을 알게 됐고, 계약은 없던 일이 됐다. 거액의 돈이 이미 북한으로 흘러갔지만 돌려받을 방법은 없었다.


충격을 받고 파산 위기에까지 몰린 박 사장은 국가를 상대로 78억원의 소송을 제기했고, 재판부는 국가가 6억 5천만원을 지급하라는 권고안을 냈다.


이후 박 사장은 영화에서처럼 2005년 중국 상하이에서 이효리와 조명애가 함께 등장하는 애니콜 광고를 촬영하며 재기에 성공했다. 박 씨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 당시에도 국가정보원 직원들은 남북합작 광고 촬영을 방해하기 위해 물밑공작을 벌였다고 한다.


1997년 대선 당시 포스터가 벽에 붙어 있다.


#1997년 대선


“1996년 4월 총선 때 북한이 판문점에서 무력시위를 했다. 이때 학습효과로 북한은 한국 대선의 결과도 바꿀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나는 그걸 막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박채서 씨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1996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당시 여론조사는 김대중 총재가 이끄는 새정치국민회의의 승리를 점치고 있었다. 하지만 총선 7일 전 판문점에서 북한군이 남한 초소를 향해 총격을 가했고, 이에 안보 위기가 고조되면서 총선은 신한국당의 승리로 끝났다. 이른바 ‘북풍’ 사건이다.


한 번 재미를 본 신한국당은 이듬해 대선에서도 북한과 거래를 했다. 당시 이회창 후보의 비선이던 오정은, 한성기, 장석중 씨가 북한 강덕순 통일전선부 국장을 만나 다시 한 번 판문점에서 총격 요청을 한 것이다.


흑금성은 북한 고위직과 접촉하면서 신한국당과의 거래 사실을 알게 됐고, 이것이 자신이 추진 중인 남북합작 광고 사업에 악영향을 줄 것을 우려했다. 김대중 후보 쪽에 이를 알려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정동영 의원과 접촉했다. 처음에 흑금성의 정보를 믿지 않았던 정 의원은 흑금성이 알려준 오익제 월북 사건이 실제로 터지자 천용택 의원을 중심으로 북풍 대책팀을 구성했고 흑금성을 10차례 만났다.



소문으로만 떠돌던 ‘북풍’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정권교체 이후 1998년 안기부 해외공작실 이대성 실장이 작성한 이른바 ‘이대성 파일’이 언론에 공개되면서부터다. 이 파일은 권영해 당시 안기부장의 지시로 이 실장이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상당 부분 짜깁기 논란이 있다. 정권교체 이후 북풍 사건 실체규명에 대한 압박이 강해지자 안기부가 그들의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사실과 사실이 아닌 것을 섞었다는 의혹이다. 이 실장은 이 파일을 국민회의 정대철 부총재에게 건넸고, 정 부총재는 문희상 정무수석을 통해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이것이 한겨레신문으로 흘러들어가면서 세상에 나왔다.


이대성 파일에 흑금성의 행각이 묘사되면서 박채서 씨는 수많은 기자들로부터 전화를 받아야 했다. 검찰 수사가 마무리된 후 박 씨는 안기부에서 퇴직했다.



#이중간첩


“제가 이중간첩이라고요? 17년 동안 북측과 접촉했는데 제가 건넨 정보는 야전교범, 지도 정도 뿐입니다. 제가 정말 간첩이라면 북측이 그 정도 성과로 만족했을까요? 제 사상은 그 정도로 나약하지 않습니다.”


박채서 씨는 지난 2010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긴급체포됐을 때 법정에서 이런 취지로 증언했다. 그는 1998년 이대성 파일 보도 이후 줄곧 이중간첩 의혹에 시달려왔다. 당시 검찰 수사는 ‘박채서는 안기부 4급 상당 직원’이라며 종결됐고, 박 씨도 한겨레신문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 승소해 누명을 벗었지만 이후에도 줄기차게 의혹을 제기하는 언론과 세력이 있었다.


1998년 박 씨는 안기부를 퇴직하면서 향후 북한과 접촉하지 않을 것이고, 접촉할 경우 통보하겠다는 서약서를 썼다. 하지만 박 씨는 이후 리철을 다시 만난다. 회고록에 따르면 박 씨는 언제 북한에서 자신을 암살하기 위해 비밀요원을 보낼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었다. 당시 아이가 중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기에 걱정은 더 컸다. 이에 선제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어서 리철을 만났다는 것이다. 물론 영화 속에 묘사되듯 리철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이후 박 씨는 노무현정부와 이명박정부 때 비선으로 활동하며 주요 정재계 인사들을 리철과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했다. 또 남북을 오가며 이산가족 개별 상봉을 물밑 주선하기도 했다.


2010년 6월 1일 박 씨는 북한에 군사정보를 유출한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로 체포돼 6년 간 옥살이를 했다. 이때 박 씨가 북한에 건넨 자료는 그가 안기부 비밀요원이던 시절 북한의 신뢰를 얻기 위해 전달했던 정보에 준하는 것이었다.


배우 황정민과 흑금성 박채서 씨 / 사진제공=박채서


영화 ‘공작’을 만든 윤종빈 감독은 ‘공작’ 언론시사회 직후 기자간담회에서 흑금성에 대한 판단을 내렸느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모든 첩보활동은 국제법상 범죄행위에 해당하기 때문에 첩보행위 자체를 법의 잣대로 판단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했다.


흑금성은 대한민국 검찰과 안기부가 스스로 ‘인정’한 공작 요원이다. 세계 첩보 역사상 이런 경우는 전무후무하다. 모든 공작은 당연히 법의 테두리 밖에 있다. 많은 국가들이 공작을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이를 부인한다. 공작은 공식 루트가 막혀 있을 때 최후의 수단으로 은밀하게 진행되는 것이지 이렇게 드러내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안기부는 그를 이용한 뒤 그가 조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자 그를 매장시키려 했다. 20년 전 이 땅에 영화 같은 일이 있었고, 20년 후 총제작비 200억짜리 대작영화로 만들어져 세상에 나왔다.


(매일경제에 실린 기사입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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