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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도로에 세 개의 간판이 폐허가 된 채 서 있다. 80년대 말 하기스가 마지막으로 광고한 뒤 내버려진 간판이다. 중년의 한 여자가 광고회사를 찾아가 직원에게 이렇게 말한다. “거기 일 년간 빌리는 데 얼마죠?” 그런 간판이 있는 줄도 몰랐던 직원은 자료를 뒤적인다. 그러자 여자가 돈뭉치를 꺼내며 말한다. “한 달에 5천달러면 충분하죠?” 왠 떡이냐며 좋아하는 직원에게 여자가 다시 말한다. “성기, 욕설 들어가는 단어는 광고 안 되죠?”


이 여자 심상치 않다. 그리고 그녀가 세 간판에 광고한 문구도 심상치 않다. 그녀가 광고를 내자 경찰서가 들썩거린다. 경찰이 예민해지자 마을 전체가 불편해한다. 이제 여자는 마을 전체와 싸워야 한다.


광고판에 내걸린 문구는 "내 딸이 죽어가면서 강간당했어. 그런데 아직 범인 못잡았지. 뭐하고 있나 월러비 서장?"


영화 속 등장인물 모두가 피해자다. 딸을 강간하고 불태워 죽인 범인을 꼭 붙잡고야 말겠다는 심정으로 광고를 낸 피해자 엄마 밀드레드(프랜시스 맥도먼드) 뿐만 아니라 광고 때문에 모욕 당한 경찰서장 월러비(우디 해럴슨), 무능한 경찰로 낙인찍혀 해고당한 딕슨(샘 록웰)도 모두 피해자다. 그러나 영화 속엔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역설이 자주 발생한다. 분노가 또다른 분노를 낳는 셈이다.


밀드레드는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제멋대로인 성격 때문에 누구로부터도 동정받지 못한다. 전세계 남자들의 DNA를 찾아서 범인의 것과 대조해 달라고 경찰들을 겁박하는 그녀는 월러비가 췌장암에 걸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모욕하는 광고를 낸다. 월러비는 자신을 망신 준 밀드레드에게 죽고나서도 복수한다. 딕슨은 인종차별주의자로 낙인 찍힌 뒤 백인 광고회사 직원에게 엄한 화풀이를 한다.



이처럼 영화가 그리는 세상은 선과 악이 뚜렷하지 않은,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할지 알 수 없는 곳이다. 마냥 동정심이 이는 사람도 없고 마냥 악하기만 한 사람도 없다. 모두들 변했는데 변한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존심만 세운다. 모든 일은 세 개의 광고판에서 비롯됐지만 애초에 그 간판이 있던 자리는 허허벌판이었다. 광고판이 세워짐으로써 비로소 감춰져 있던 그들의 내면이 드러난 것이다.


프랜시스 맥도먼드와 우디 해럴슨


이토록 무거운 소재를 영화는 묵직하게 전시하는 대신 블랙코미디로 비트는 전략을 택한다. 영화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전개된다. 워낙 소재가 무겁다보니 관객은 웃어야 할지 계속 긴장하고 있어야 할지 당황하게 되는데 그러는 동안 인생의 아이러니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프랜시스 맥도먼드, 샘 록웰, 우디 해럴슨 등 세 배우의 ‘미친’ 연기는 완벽히 오리지널한 각본과 더불어 영화를 걸작으로 만들어준다. 분노와 상처에 대해 이토록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 영화는 참 오랜만이다.


샘 록웰과 프랜시스 맥도먼드


‘쓰리 빌보드’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은 아니다. 마틴 맥도너 감독은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조지아주와 플로리다주 경계에서 비슷한 간판을 보고 이 영화의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조엘 코엔 감독의 아내이기도 한 프랜시스 맥도먼드의 밀드레드 캐릭터는 맥도먼드와 함께 만들었는데 맥도먼드는 서부영화 속 존 웨인의 여성 버전으로 만들고자 했다. 샘 록웰이 연기한 딕슨은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에서 존 웨인의 상대역인 리 마빈을 참고해 만든 캐릭터다.


올해 75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드라마 부문 작품상,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 각본상을 수상했다.


쓰리 빌보드 ★★★★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드는 건 분노.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생의 기막힌 아이러니.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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