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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본 지 꽤 됐는데 그때 쓰지 않고 넘어갔던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 올해 최고의 한국영화가 뭔지 꼽는다면 나는 아마도 꽤 망설이다가 결국 이 영화를 택할 것 같다. 첫 장면부터 빨려들었고, 눈을 뗄 수 없었고, 그 지나친 우울함에 중독됐고, 영화가 끝난 뒤에도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리플레이됐다.


특히 플래시 플러드 달링스의 몽롱한 음악에 맞춰 제인 역할을 한 구교환이 느리게 걸어오는 모습이 자꾸만 생각난다. 완벽하게 잘 만든 영화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빠져들면 헤어나올 수 없는 마력을 지닌 영화다. 데뷔작이라는 게 믿기지 않지만 조현훈 감독의 첫 작품이다.



스토리는 복잡하면서도 단순하다. 꿈과 현실이 뒤섞여 있는데 초반부를 꿈이라고 생각하면 후반부의 현실이 이해가 된다. 주인공은 가출소녀 소현이다. [응답하라 1988]로 얼굴을 알린 올해 서른살의 이민지가 연기한다. 가출한 소년 소녀들은 팸을 만들어서 산다. 팸에는 아빠 혹은 엄마라 불리는 리더가 있다. 리더는 구성원들에게 돈을 벌어오게 하고(주로 접대부), 번 돈의 일부를 모아 운영비로 쓴다.


소현도 팸에 속해 있지만 그녀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서툰 아이다. 발가락이 9개뿐이어서 놀림도 많이 당해왔다. 하지만 혼자 남는 것이 두려운 그녀는 어떻게든 사람들과 어울리려 한다. 소현이 의지하던 오빠 정호(이학주)가 어디론가 떠나고 막막해하던 그녀 앞에 꿈처럼 제인(구교환)이 나타난다. 제인은 엄마처럼 소현을 비롯한 아이들을 챙긴다. 제인의 팸은 꿈의 팸이다. 버림받은 아이들을 돌봐주고 위로하는 팸이다. 일을 해야하지 않느냐는 누군가의 질문에 제인은 이렇게 답한다.


“어차피 어른 되면 죽을 때까지 일만 할텐데. 벌써부터 애쓸 필요 없어.”



왜 팸을 하게 됐느냐는 물음에는 이렇게 답한다.


“개같이 불행한 인생 혼자 살아 뭐하니. 그래서 다같이 사는 거야.”


팸의 식구들끼리 케익 한 조각이라도 나눠먹으라고 말하면서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인간은 시시해지면 끝장이야.”



제인의 팸에 들어오기 전, 소현은 끔찍한 일을 겪었다. 병욱(이석형)이 운영하는 팸에서 아빠 역할을 하는 병욱은 식구들을 의심하고 괴롭혔다. 특히 자존심 강한 언니 지수(이주영)와 병욱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의 갈등은 살인사건으로까지 이어졌다. 소현은 처음엔 든든한 언니같은 지수에게 의지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따로 팸을 차리겠다는 지수를 따라나서지 못하고 그녀를 배신했다. 소현은 그런 아이였다. 갈등의 한복판에 끼어들어 트러블을 만드는 것은 죽어도 할 수 없는 아이였다.



하지만 필요할 때 나서지 않은 벌은 혹독했다. 모두들 소현을 미워하거나 혹은 그녀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우려 했다. 얼떨결에 소현은 쫓기는 신세가 되고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영화는 에필로그에 소현과 제인이 드랙퀸들의 클럽인 뉴월드에서 처음 만나는 순간을 삽입한다. 이 장면에서 제인은 약 5분동안 자신이 게이로 살아가면서 겪은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그동안 어떤 오해를 받아왔는지, 그러면서도 어떻게 자라왔는지 등이다. 구교환의 연기 집중력이 돋보이는 이 장면은 울림이 크다. 이 영화에서 단 한 장면을 봐야 한다면 이 장면을 꼽고 싶다.


그리고 제인의 이 대사를 다시 듣고 싶다.

“인간은 시시해지면 끝장이야.”



<꿈의 제인>은 가출 청소년에 관한 음울한 영화지만 제인이라는 판타지 영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캐릭터가 있기에 더 빛나는 영화다. 제인은 첫 등장부터 드라마틱하다. 나이트의 미러볼을 떼어 들고 다닌다. 왜 훔쳐갔냐는 항의에도 그녀는 굽히지 않고 훔치지 않았다고 강변한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당당하다. 차별당하는 게 몸에 배서 더 그렇다. 혼자서 삯힐지언정 먼저 굽히지 않는다.



제인은 기존의 사회 방식으로는 재단할 수 없는 여자다. 그녀는 누구와도 다르고 또 그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이해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고독하지만 고독에 머물러 있기보다는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어 한다. 가장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인물이다. 때론 꼰대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들때 가장 먼저 찾고 싶은 어른이다. 이 세상에 제인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꿈의 제인 ★★★★

불행한 인생에 꿈처럼 나타난 나비 같은 제인이 주는 작은 위로.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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