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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이 병신년이라고 놀려댔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병신년도 갖가지 황당한 사건들을 남겨놓고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대체 시간이 언제 이렇게 빨리 가버린 거지?”


영화 ‘가려진 시간’은 시간의 블랙홀에 빠진 한 소년의 이야기입니다. 영화 속의 강동원은 무척 억울해 보입니다. 그리 대단한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갑자기 나이가 들어버리니까요.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른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우리가 실제로 체감하는 시간은 공평하지 않습니다. 어떨 땐 정말 지루하게 안 가지만 또 어떨 땐 나에게만 가혹할 정도로 빠르게 흐른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시험시간엔 1시간만 더 주어지면 좋을 것 같고, 출근길 지각을 앞두고는 제발 10분만이라도 더 늘릴 수 있길 바라는 게 우리의 주관적 시간입니다.


하루에 비해서 한 달, 한 달에 비해서 일 년은 특히 더 금방 지나갑니다. 시간이 쏜살같다는 느낌이 들 땐 차라리 시간을 멈추고 싶어집니다. 시간을 붙잡아 놓고 나만 쓰고 싶습니다.


영화 제작자들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나봅니다. 시간을 멈추는 상상이 영화 속에 곧잘 등장하는 걸 보면 말이지요. 멈춘 시간 속에서 영화 주인공들은 해방감을 만끽하고, 악당을 물리치고,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구해냅니다.



영화 ‘가려진 시간’ 마지막 장면에서 강동원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시간을 멈춥니다.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자세히 말씀드릴 수 없지만, 그 장면이 울림을 준다면 그것은 시간을 멈추는 행동이 때론 희생정신을 상징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이 현실 세계에선 점점 드물어지고 있으니까요. 다들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자기 시간을 쓰려 하지요.


청와대에 있는 누군가는 평생 가려진 시간이길 바랄 7시간을 떠올려 보면, 만약 그 순간 진도에 시간을 멈출 수 있는 능력자가 있었다면 세상은 지금처럼 비극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팽목항에는 여러 쪽지들이 붙어 있는데 그중 하나에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엄마가 그 전날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나는 너를 아무데도 보내지 않을 거야." 유가족들은 아직도 멈춰진 시간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서론이 길었네요. 영화 ‘가려진 시간’처럼 시간을 멈추는 장면이 나오는 영화 8편을 모아봤습니다. 시간이 멈춘다는 것은 영화 속에서 어떤 의미였을까요? 한 편씩 살펴보겠습니다.




캐시백 (2006)


가장 먼저 살펴볼 영화는 감각적인 영국산 로맨틱 판타지 ‘캐시백’입니다. 이 영화에서 시간을 멈추는 행위는 일탈과 해방감입니다. 아마도 사춘기 소년들이 한번쯤 해봤을 법한 상상을 구현한 영화이지 않을까 싶은데요.


불면증에 시달리던 화가 지망생 벤은 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시간을 멈추는 상상을 합니다. 그는 시간이 멈추자 마트에 쇼핑하러 온 여자 손님들의 옷을 죄다 벗기고는 누드화를 그립니다. 매일 엇비슷한 사람들로 분주하던 마트가 벤의 손길에 따라 미술 작품으로 재탄생합니다. 지루한 일상에서 상상의 나래를 펴던 벤은 그 속에서 샤론을 발견하고 사랑에 빠지니 그에게 시간의 멈춤은 곧 사랑의 발견이었네요.




빅 피쉬 (2003)


누군가에게 첫눈에 반하게 되면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지요? 영화 ‘빅 피쉬’는 그 순간을 정말로 시간이 멈추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인생의 사랑을 만나게 되면 시간이 멈춘다는 말은 진실이야. 그러다가 흘러가기 시작하면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빨리 지나가지.”


주인공 윌의 아버지는 엄마를 처음 만났을 때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녀의 모습은 주위의 모든 것이 정지한 것처럼 느껴질 만큼 강렬했습니다. 하지만 사랑에 익숙해지고 나면 시간은 쏜살같이 흐릅니다. 그러니 시간을 아껴쓰려면 첫 만남처럼 사랑해야하지 않을까요?



소스코드 (2011)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을 때도 시간이 멈춥니다.


영화 ‘소스코드’는 폭탄이 터지기 전 8분 동안 기차에서 테러범을 찾아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콜러 대위가 무한히 같은 시간을 반복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흥미진진한 스릴러의 대미를 장식하는 장면에서 시간이 멈춥니다. 모든 사건을 해결한 콜러 대위가 여자친구 크리스티나와 키스하는 순간, 시간이 멈추고 카메라는 기차 안의 풍경을 보여줍니다. 승객들 모두 행복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랬는지 영화 역시 이 장면 이후 전혀 다른 이야기로 바뀝니다. 멈춰진 시간의 단면에서 보면 세상은 가끔 이처럼 아름답습니다.



타임머신: 클락스토퍼 (2002)


이번엔 시간을 멈추는 기계가 나오는 영화를 살펴볼게요. 영화 ‘타임머신: 클락스토퍼’에는 시간을 멈추게 하는 아주 특별한 손목시계가 나옵니다. 손목시계를 작동시키면 시간이 ‘탁’ 멈춥니다.


이 시계를 누가 만들었냐고요? 주인공 잭은 과학자인 아버지의 지하 연구실에서 시계를 우연히 줍게 됩니다. 국가안보국(NSA)이 후원하는 퀀텀 테크놀로지사가 하이퍼타임을 개발했는데 그것을 손목시계로 만든 것이죠.


악당 과학자들이 이 시계를 노리고, 잭과 그의 친구들은 이 손목시계의 능력을 이용해 세상을 악당으로부터 구해야 합니다.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 (2014)


시간을 멈추는 능력으로 악당과 싸우는 영화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엑스맨’의 퀵실버 캐릭터입니다. 돌연변이 중 하나인 퀵실버의 능력이 바로 시간을 멈추는 것입니다. 사실 멈춘다기보다 극도로 느리게 흘러가죠.


그는 첫 등장부터 요란합니다. 혼자서 탁구를 치고 있습니다. 한쪽에서 공을 친 뒤 시간을 멈춰 놓고 반대편으로 가서 탁구공을 받아 치는 식으로 노는 ‘혼놀족’입니다. 그는 울버린과 함께 펜타곤에 침입해 활약을 펼치는데 이때 주방 액션 시퀀스가 기막힙니다. 시간을 멈춰놓은 뒤 헤드폰으로 느린 음악을 들으면서 마치 ‘매트릭스’처럼 총알을 일일이 옮겨놓는 그의 활약은 정말 멋집니다.


퀵실버는 ‘엑스맨: 아포칼립스’에도 등장합니다. 이 영화에서는 시간을 멈춰놓고 비교적 경쾌한 유리스믹스의 ‘Sweet Dreams’에 맞춰 학교에서 사람들을 대피시킵니다. 이처럼 시간을 멈추는 능력은 악당과 싸울 때 뿐만 아니라 재난 상황에서 사람을 구출하는데도 엄청난 힘을 발휘합니다.


한편 퀵실버는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도 또다른 캐릭터로 등장합니다만 마블 영화에선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기보다는 그만큼 빠르다는 것에 더 중점을 두고 있는 듯 보입니다.



타이밍 (2015)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 시간을 멈추는 영화로는 강풀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민경조 감독의 애니메이션 ‘타이밍’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 영화에는 시간 능력자 4명이 나오는데 그중 김영탁이라는 캐릭터가 시간을 멈추는 타임스토퍼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늘 인간적인 캐릭터를 만드는 강풀답게 김영탁 역시 완벽한 모습은 아닙니다. 퀵실버처럼 재빠르게 이동하는 능력은 없고요. 퀵실버에 비해 한참 겸손하기까지 합니다. 또 그는 공기 저항과 호흡곤란 때문에 괴로워하고 죽은 영혼들과도 맞닥뜨립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그는 사람들의 연쇄 자살을 막기 위해 시간을 멈추는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합니다.



다크시티 (1998)


시간이 멈추는 장면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시간을 멈춘 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은 시간이 멈춰졌는지 전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겐 그저 잠깐의 시간이 지났을 뿐입니다.


‘다크시티’는 멈춘 시간 동안 모든 인간이 세뇌당할 수 있다고 말하는 영화입니다. 이방인들이 접수한 다크시티에선 밤 12시가 되면 모든 인간들이 잠을 자야 합니다. 유일하게 주인공 존 머독과 이방인들의 실험을 돕는 부역자만이 깨어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시간을 멈춰 놓고 인간들의 기억을 서로 바꿔가며 다크시티를 재구성합니다.


이 그로테스크하고 암울한 영화에서 인간은 ‘매트릭스’처럼 옴싹달싹 못하고 하루하루 주어진대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이처럼 시간을 멈춘다는 것은 인간의 세뇌를 뜻하기도 합니다. 멈춘 시간 속에서 인간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요.




초능력자 (2010)


마지막으로 꽃미남 강동원과 고수가 서울 한복판에서 대결하는 영화 ‘초능력자’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영화에서 강동원은 사람의 마음을 읽는 초능력자입니다. 그가 마음을 읽는 장면에서 시간이 멈춥니다. 엄밀히 말하면 시간이 멈췄다기보다는 사람들을 움직이지 않게 한 것이지만 영상으로는 차이가 없습니다. 이 영화에서도 마음을 읽는 것, 즉 세뇌 과정은 시간을 멈추는 것과 같습니다.


강동원의 초능력은 그러나 고수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움직이지 못할 때 고수는 홀로 일어나 강동원에 대항합니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멈춘 시간도 풀립니다. 시간은 때로 이처럼 의지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


지금까지 시간을 멈춘 영화 8편을 살펴보았는데요. 여러분에게 만약 시간을 멈출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어떻게 쓰고 싶으신가요?



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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