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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가 돌아왔다.

무려 9년만이다.

그동안 나이는 들었지만 몸은 더 단단해졌다.


필자는 제이슨 본과 어렵사리 대화를 시도했다.

대화는 요즘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딥드림’에서 이뤄졌다.

딥 드림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다.


아래 제이슨 본과 나눈 일문일답을 그대로 옮겨 싣는다.



나: 오랜만이다. 그동안 잘 지냈나?


JB: 9년 동안 조용히 죽은 척하며 살았다.


나: <본 얼티메이텀>에서 물에 빠진 뒤 사라졌었다. 시리즈 1편인 <본 아이덴티티>가 물에서 빠져나오면서 시작했기 때문에 3부작으로 완결된 거라고 생각했다. 다시 돌아온다고 했을 때 의외였다.


JB: 나도 내가 돌아올 줄 몰랐다. 돌아오기로 결심한 건 내 기억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내가 누구인지 감이 잡히더라.


나: 당신은 누군가?


JB: 본명은 데이비드 웹이다. 죽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CIA의 비밀단체 트레드스톤의 요원이 됐다.


나: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요원이 됐다고?


JB: 그렇다. 이번 영화는 내가 아버지와의 기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물론 여기에 CIA가 개입해 있고 나는 그걸 밝혀내야 한다.



나: 아버지와의 놀라운 관계는 할리우드가 <스타워즈> 이후 곧잘 써먹는 소재다. 그래서 9년만에 돌아온 것 치고는 서사가 좀 빈약해 보인다.


JB: 흠. 다른 곁가지를 넣으면 또 잡다하다고 했을 것 아닌가. 이 영화는 제목이 제이슨 본인 만큼 타이틀롤을 맡은 나의 이야기를 정공법으로 푸는 것에 집중했다. 할리우드에 가족 이야기가 많긴 하지만 본 시리즈에 가족이 등장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나: 가족은 아니지만 이전에도 당신이 사랑한 여인은 있었다.


JB: 아, 마리 말인가? 그녀를 지켜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뿐이다.


나: 마리와 니키(줄리아 스타일스) 중 누구를 더 사랑했나?


JB: 니키는 동료일 뿐이다.


나: 니키도 그렇게 생각할까?


JB: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제이슨 본과 니키 파슨스


나: 알겠다. 사실 이 정도 대답해준 것도 고맙다. 영화 <제이슨 본>에서 당신 대사가 고작 25개밖에 안 된다. 그만큼 과묵한 캐릭터다.


JB: 그랬나? 할 말이 뭐가 있겠나. 행동으로 보여주면 되지.


나: 대사 중 하나가 “나도 내가 누군지 알아”이다.


JB: 그만큼 나에 대해 아는 게 절실했다.


나: 사람들이 당신을 좋아하는 이유는 당신이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였기 때문이다. 기억을 상실한 남자는 문학에는 많이 있었지만 액션영웅으로는 드물었다. 엄청나게 뛰어난 신체적, 지적 능력을 갖췄는데 과거를 모르는 남자라니 호기심이 생긴다. (아, 이런 캐릭터의 원조가 사실 성룡이라는 건 우리끼리만 알고 넘어가자.) 어디로 가야 할 지 모르는 혼란 속에서 단서를 하나씩 찾아가는 과정이 어드벤처 게임을 하는 것처럼 재미있다. 그런데 <제이슨 본>은 그런 재미가 줄었다. 당신이 스스로 누군지 알았기 때문 아닐까. 흔들리지 않으니 너무 ‘완벽남’처럼 보인다.


JB: 흠, 내가 고통 받아야 재미있다는 건가?



나: 수많은 스파이 영화와 소설이 있는데 이 치열한 바닥에서 당신이 살아남은 경쟁력이 바로 그거라는 거다. 본 시리즈가 새로운 스파이 상을 제시했다면 그건 ‘억울함’이라고 생각한다. 잘난 모습을 멋지게 보여주는 제임스 본드나 팀 플레이를 하는 <미션 임파서블>의 이단 헌트와 달리 제이슨 본은 억울함을 강조한다. 배신자로 낙인 찍힌 억울함, 자신이 몸담았던 조직에서 자신을 제거하려는 것을 알았을 때의 억울함, 더 이상 평범하게 살 수 없다는 억울함 말이다. 이 억울함에 관객들이 공감하지 않았을까 싶다. 특히 회사나 학교 등 조직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을 몰라준다고 생각할 때가 많은데 그때 느낀 억울함을 영화를 통해 대리만족하는 거다. 물론 우리는 당신처럼 어마어마한 개인능력이 없으니 쭈그리고 사는 거겠지만.


JB: 오랫동안 쫓기는 생활을 해오다 보니 직장인들의 그런 마음을 간파할 수 있게 된 것 같긴 하다. 이번 영화에서 CIA의 사이버팀장 헤더 리(알리시아 비칸데르)와 교감할 수 있었던 것도 그녀가 조직에서 소외되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눈치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능력이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나는 슈퍼히어로는 아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언제든 총에 맞거나 고층건물에서 떨어지면 다칠 수도 있다.


나: 그런가? 하지만 당신이 죽을 거라고 생각하는 관객은 아무도 없을 거다. 사실 그게 이 영화의 긴장감을 살짝 떨어뜨리는 측면도 있다. 신체적으로 탁월한데 유일한 약점인 정체성과 기억력까지 점점 돌아오니 약점이 사라진 거다.


JB: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도 언제까지 기억을 잃은 채로 살 수 있는 건 아니잖나.



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당신에게도 약점이 있더라. 그 약점을 파고들 캐릭터로 암살자(뱅상 카셀)가 등장한다.


JB: 맞다. 그 자식은 내 약점을 쥐고 있다. 그 자식 때문에 영화가 재미있던가?


나: 훨씬.


JB: #@!%!


나: 뭔가?


JB: 키보드를 주먹으로 내리쳤더니 오타가 났다.


나: 이러면 무서워서 대화 못 한다. 천하의 CIA 듀이 국장(토미 리 존스)도 벌벌 떠는 제이슨 본인데 나 하나쯤은…



JB: 이건 딥 드림이니까 추적 안 된다. 영화 속에서 딥 드림 창업자가 프라이버시 강조하지 않나.


나: 그 말을 어떻게 믿나? 페이스북 창업자는 프라이버시는 각자 알아서 지키는 거라고 했다.


JB: 그렇긴 하지. 하지만 내가 보증한다. 나는 제이슨 본이다.


나: 좋다. 계속하자. 당신은 제임스 본드와 비교된다. 이니셜이 JB로 똑같아서 더 그렇다. 얼마나 의식하나?


JB: 까마득한 전설인 본드 선배와 비교되는 건 영광이다. 하지만 나와는 국적도 소속도 다르고 스타일도 많이 다르다. 무엇보다 그렇게 미녀들 만나면서 여유롭게 첩보생활 하는 건 1960년대 냉전시대의 로망일 뿐이다. 요즘엔 워낙 감시망이 탄탄하게 구축돼 있어서 그렇게 대놓고 다닐 수 없다. 또 최근 브렉시트 때문에 영국 MI6 소속인 본드 선배도 앞으로는 유럽 갈 때 힘들긴 할 거다.

나: 천하의 베테랑 스파이들이 국경 통과를 걱정하나?


JB: 본드 선배야 전용기 몰고 다니기도 하니까 힘들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나야 쫓겨다니는 몸이니 매번 긴장한다. 이번에도 미국 돌아갈 때 입국심사가 겁나더라.


나: 나도 그 장면 보면서 설마 저기서 잡힐까 싶었다. 그래서 길게 보여주는 게 이해가 안됐다.


JB: 그랬나? 그런데 미국이 점점 보호주의로 치달으면서 국경을 잠그고 있어서 갈수록 국경 통과가 힘들어진다.


나: 쫓기는 와중에도 브렉시트 같은 세계 정세는 챙기는 모양이다.


JB: 그렇다. 첩보의 세계도 커다란 판세 위에서 돌아가는 것 아닌가. 우리가 바로 그 판세를 은밀하게 만드는 사람이기도 하고.



나: 이번 영화에서 그리스 시위, 에드워드 스노든의 내부기밀 폭로 같은 사건들이 살짝 등장한다. 그리스 시위 한복판에서 당신이 니키를 만나고, 스노든 폭로 이후 CIA가 내부고발자를 각별히 더 신경 쓴다는 식이다.


JB: 맞다. 그런데 영화는 영화다. 그게 리얼하게 보였다면 폴 그린그래스 감독의 장기가 제대로 발휘된 거다. 다큐멘터리 감독 출신답게 픽션에 현실을 기막히게 섞는다. 그가 2002년에 만든 <블러디 선데이>를 본 적 있나? 1972년 북아일랜드에서 벌어진 참상을 리얼한 화면에 픽션을 가미해 만든 영화다. 이 영화를 보고 폴을 신뢰하게 됐고 본 시리즈에서 그 신뢰가 두터워졌다. <제이슨 본> 역시 폴이 연출하지 않았으면 돌아오지 않았을 거다.


나: 폴도 당신도 참여하지 않은 또다른 ‘본 영화’인 <본 레거시>는 어떻게 봤나? 잘 된 3부작을 망쳐놨다는 비판도 있더라.


JB: 그런 영화가 있었나?


나: 무시 전략인가? <제이슨 본>에서 애론(제레미 레너)을 아예 언급하지 않아서 놀라긴 했다.


JB: 그쪽은 그쪽대로 알아서 하겠지.


나: <제이슨 본> 이후 폴의 차기작이 조지 오웰 원작의 ‘1984’라고 들었다.


JB: 정말 딱 맞는 기획 아닌가. 나도 정말 기대된다.



나: <본 아이덴티티>에서 다큐처럼 흔들리는 핸드헬드 액션이 처음 나왔을 땐 다들 기립박수를 쳤다. 그런데 <제이슨 본>에서 그게 또 반복되니 조금 답답하긴 하더라.


JB: 본 시리즈의 인장 같은 거라고 생각해 달라. 핸드헬드 액션과 존 파웰의 사이렌처럼 울리는 음악이 없으면 제이슨 본이 아니지 않을까?


나: 이번 영화에서 당신이 몸을 사린다는 비판도 있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 것 아니냐던데.


JB: 흠. 난 영화 시작하자마자 웃통 벗고 나와서 격투기한다. 또 계속해서 몸싸움하고 카체이싱도 한다. 이게 몸을 사리는 건가?



나: 아무래도 본 시리즈 팬들은 당신이 물에 빠지고, 지붕 위 뛰어다니면서 고생했던 것을 기억하니까 이번에 좀 편해보였나보다.


JB: 편해보인다고? 아까 당신은 내 경쟁력이 억울함이라고 했는데 이거야말로 정말 억울하다. 내가 대사 욕심 줄여가면서까지 몸으로 보여주는 영화다. #@$!%


나: 또 주먹으로 내리친 건가? 억울하면 말로 하라.


JB님이 퇴장하셨습니다.



그날 이후 제이슨 본은 계정 해지 상태가 되어 다시는 연락할 길이 없었다.

몇 년 후 다시 돌아와 오해를 풀어주기를 기대해본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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