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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윤성현 감독의 전작 '파수꾼'(2010)의 속편처럼 시작한다. 편의점에서 기훈(최우식)과 장호(안재홍)가 욕을 주고받으며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영락없이 '파수꾼'의 고등학생들이 자란 모습이다. 편의점 TV에선 IMF 구제금융을 위해 정부가 협상하고 있다는 뉴스가 나온다. 얼핏 보면 1998년을 떠올리게 하지만 이들이 편의점을 나올 때 영화의 배경이 가상의 근미래임이 드러난다. 희뿌연 연기 자욱한 거리엔 전기차들이 돌아다니고 건물들은 높지만 심하게 낡았다. '공각기동대' '블레이드 러너' 등에서 봐온 가상의 미래보다는 덜 화려하지만 느낌은 비슷하다.



기훈과 장호는 교소도로 가서 3년만에 출소하는 준석(이제훈)을 맞이한다. 세 청년은 다시 의기투합하는데 곧 돈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영화 속 근미래 한국에선 IMF 구제금융 실패로 원화 가치가 폭락해 시중에선 달러만 통용되는데 이들에게 남은 돈은 수천 달러에 불과하다.


세 청년이 살아가는 이곳은 경제가 무너진 뒤 무법천지로 변한 황폐화된 도시다. 거리 곳곳에서 시위가 벌어지고 있고 갱들이 총으로 무장하고 활보한다. 곳곳에 폐건물들이 즐비해 을씨년스럽다. 한때 유행어였던 '헬조선'의 비주얼 버전이랄까.



준석은 기훈과 장호에게 자신이 3년 동안 감옥에서 꾸었던 꿈 이야기를 들려준다. 대만의 하와이라는 컨팅 섬에서 집을 구해 수영하고 낚시하면서 사는 꿈이다.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준석은 친구들에게 갱단이 운영하는 도박장을 털자고 제안한다. 도박장의 돈은 훔쳐도 뒤탈이 없을 것이라는 게 이유다. 하지만 갱들을 상대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 이들은 사람답게 살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판돈으로 내놓는다. 도박장에서 일하는 상수(박정민)가 준석 일당에 합류하고 이제 영화는 케이퍼 무비로 변한다.



준석이 신뢰하는 봉식(조성하)에게 빌린 각종 총기류를 어깨에 둘러메고 네 친구들은 도박장에 침입해 한창 도박에 빠져 있는 사람들과 경호원들을 제압한다. 하지만 이런 일이 처음인 네 청년들의 행동은 어설프다. 준석은 식은땀을 흘리고 장호는 호흡이 가빠오고 기훈은 어쩔 줄 모른 채 소리만 지르고 상수는 도박장 경호원들이 자신을 알아봤을까봐 안절부절못한다.


도박장을 턴 이후 영화는 전혀 다른 길로 간다. 아마도 여기서부터가 관객의 호불호가 갈리는 지점일 것이다. 보통의 케이퍼 무비라면 4명의 주인공은 도박장을 운영하는 갱단과 대결을 벌였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친구들의 우정에 금이 가거나 혹은 서로를 위해 희생하는 과정이 드라마틱하게 그려졌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익숙한 길로 가지 않는다. 뜬금없게도 '한'(박해수)이라 불리는 미스터리의 남자가 등장하고 절대적으로 강한 이 남자에게 주인공들은 모두 쫓기기 시작한다. 영화는 이제 '터미네이터'(1984) 혹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처럼 주인공이 일방적으로 쫓기는 스릴러로 변한다.



미래가 없는 청춘을 그린 드라마에서 디스토피아 SF로, 케이퍼 무비로, 다시 탈출 스릴러로... 장르가 수시로 바뀌는 것은 '기생충'에서 보았듯이 결코 단점이 아니다. 잘만 버무린다면 전혀 새로운 영화로 탄생할 수 있다. 하지만 '사냥의 시간'은 후반부에 무리수를 둔다. 지금까지 쌓아온 이야기를 무시하고 영화를 준석을 비롯한 친구들과 한의 대결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한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남자로 영화 '로스트 하이웨이'(1997)의 미스터리 맨을 떠오르게 하는데 영화 초반에는 전혀 설명이 없던 존재다(바에서 암흑 속에 얼굴을 가린 채 준석과 전화로만 소통하는 장면은 '로스트 하이웨이'의 명백한 오마주다). 왜, 누구를 위해, 무엇 때문에 등장했는지 알 수 없는 인물이 주인공을 괴롭히는 과정을 1시간 가까이 지켜봐야 하기에 관객 입장에선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영화를 만든 윤성현 감독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아마도 그는 영화를 단지 장르영화의 쾌감을 보여주는 데서 끝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파수꾼'에서 윤 감독은 명백한 선악구도를 거부하고 학교폭력의 가해자가 어떻게 또다른 의미의 피해자가 되었는지를 파헤쳤다. '사냥의 시간'에서 준석 일당은 범죄자이지만 미지의 남자인 한에게 쫓길 때는 한없이 약한 존재이기에 관객은 이들이 암흑 같은 세상을 탈출해 그들의 꿈을 이루기를 바라게 된다. 경제가 망가진 가상의 미래에서 꿈을 짓밟힌 채 살아가는 청년들을 현재 한국사회 청년의 삶에 대입하면서 그들의 막막한 심정을 강조하기 위해 한이라는 절대적으로 악몽 같은 추적자의 존재가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감독의 욕심이 과했다. 준석이 한에게 쫓기는 과정에서 비슷한 장면이 반복되고 감정이입할 만한 순간은 지나치게 길게 늘어져 초반부의 리듬이 깨져버린다. 그래서 2시간 14분이라는 긴 러닝타임 동안 전혀 다른 영화 두 편을 보는 기분인데 문제는 전반부에 비해 후반부에 너무 힘이 들어가 있고 또 개연성이 떨어지는 장면들이 많아 지루하다는 것이다(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결말이 만족스러운 영화를 좋은 영화라고 기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에는 장점도 많다. 우선 다양한 형태의 폐건물을 꼼꼼히 활용해 디스토피아 느낌을 물씬 풍기게 한 미술은 한국영화의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했다. '블레이드 러너 2049'를 떠올리게 하는 세피아톤 조명, 추격전의 서스펜스를 만들어내는 편집과 총격전에서의 음향효과도 완성도가 뛰어나다.



또 이제훈, 최우식, 안재홍, 박정민 등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30대 남자 배우들(이 영화에는 여자배우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의 섬세한 연기도 돋보인다. 네 명의 배우들은 범죄자이면서도 매번 긴장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 인물의 심리를 꼼꼼하게 묘사하는 이 영화에서 각자의 배역을 세심하게 연기한다.


영화는 당초 지난 2월 개봉 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 확산으로 개봉이 연기된 뒤 우여곡절 끝에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옷을 갈아 입고 지난 4월 23일 공개됐다.


사냥의 시간 ★★★

한국판 디스토피아 근미래에서 터미네이터에게 쫓기는 파수꾼. 초반 리듬 좋지만 후반엔 무리수.



*매일경제에 실린 글입니다.

출처: https://www.mk.co.kr/premium/life/view/2020/05/28255/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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