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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토스트로 가볍게 식사를 하고 8시에 숙소를 떠났습니다. 오늘 일정은 빠듯합니다. 어제 집주인이 추천해준 스카이섬 동쪽 해안의 킬트 록(Kilt Rock)에 갔다가 11시 30분에 탈리스커 디스틸러리(Talisker Distillery)에서 1시간가량 투어를 하고 글렌피넌(Glenfinann)에서 영화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에 나온 기차길을 본 뒤 에든버러 숙소까지 가야 합니다.


오후 4시부터는 한국 대 멕시코의 월드컵 경기가 있기 때문에 만약 펍을 발견하면 들러서 경기를 보기로 했어요. 스카이섬에서 에든버러까지는 차로 8시간 거리인데 과연 이 일정을 모두 소화할 수 있을까요?


다음날 아침에 찾은 킬트 절벽.


뭐, 못하면 어때요? 하나씩 해보는 과정이 여행의 재미인 거죠. 우리는 일단 1시간을 달려 스카이섬 동쪽 해안의 킬트 록으로 갔습니다. 멋진 절벽과 그 절벽으로 떨어져 내리는 시원한 폭포가 아름다운 곳이더라고요. 이 멋진 곳에서 우리는 또 한 번 점프샷을 찍었습니다. 저와 같이 간 일행들은 참 점프샷을 좋아해요. 참 적극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일정을 무리없이, 아무 문제없이 소화할 수 있는 거겠죠.



곧바로 피나클 리지 근처로 돌아와서 스카이섬 반대편의 탈리스커 디스틸러리 양조장으로 갔습니다. 처음엔 탈리스커 마을로 위치를 잘못 찍어서 엉뚱한 곳으로 갈 뻔했는데 나중에 발견하고 돌아서 디스틸러리로 향했습니다. 정확히 11시 30분에 도착했어요.


스카이섬에 있는 탈리스커 양조장입니다.

탈리스커 양조장 전경.

탈리스커 양조장 투어 가이드가 보리로 만드는 위스키의 원리를 설명합니다.

증류된 위스키는 저렇게 보관해 놓더라고요.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잉글랜드와 독일에서 온 관광객과 한국에서 온 우리 일행은 함께 양조장을 돌아다니며 위스키를 만드는 과정에 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수천 리터가 들어가는 거대한 장치들이 곳곳에 있어서 발효하고 증류하는 과정을 거치며 술이 만들어지는데요. 사실 다른 건 잘 모르겠고, 보리를 발효시켜 만드는 과정까지 맥주와 똑같다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물이 워낙 좋고 보리가 좋으니 스코틀랜드는 위스키의 성지가 됐죠. 1시간의 투어는 조금 지루했습니다. 또 술기운이 올라와서 너무 졸린 나머지 서서 꾸벅꾸벅 졸기도 했습니다. 다른 과정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투어 가이드가 맨 앞에 서서 졸고 있는 저에게 다가와서 놀리고 갔던 기억만은 생생합니다.


투어 마지막 코스로 탈리스커 스톰을 한 잔 했는데 강합니다. 잠기운이 확 달아날 정도예요. 가이드에 따르면 위스키에 취향에 따라 물을 몇 방울 떨어뜨려 마시면 좋다고 합니다. 위스키가 워낙 순수해서 뭐든 섞어 마시는 건 나쁜 게 아니래요. 콜라도 섞어 마시라나요. 농담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네요.


탈리스커 위스키 샘플을 몇 개 산 뒤 양조장을 나왔습니다. 일정에 따르면 바로 글렌피넌으로 출발해야 하지만 다들 배가 고픈 눈치였습니다. 밥까지 굶어가며 일정을 빠듯하게 소화할 필요 있나요? 우리는 가까운 식당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어요.


올드 인(The Old Inn)이라는 숙박과 식사를 함께 하는 식당이었는데요. 마침 여기 하기스(Haggis)라는 메뉴가 있더라고요. 하기스는 돼지고기를 순대처럼 만든 스코틀랜드 전통 요리로 스코틀랜드 오기 전부터 꼭 먹어보라는 추천을 받은 적 있습니다. 먹어보니 부드럽고 담백하네요. 혹자는 냄새 때문에 못 먹는다고도 하는데 제가 여기서 먹은 하기스는 냄새도 나지 않고 맛도 괜찮았습니다.


점심을 먹으러 올드 인 식당에 갔어요.

송아지 간 요리를 시켜봤습니다. 플레이팅은 예쁜데 먹기는 힘들더라고요.

스코틀랜드에서 꼭 먹어봐야 한다는 돼지고기 하기스.

식당 밖에는 이런 풍경이 펼쳐지고요.

보트가 있어서 잠시 앉아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기스를 비롯해 다양한 메뉴를 시켰는데요. 송아지 간요리(House Liver Pate)는 신선했지만 맛이 무거워서 다 먹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위스키 양조장 바로 옆이어서인지 시그니처 커피로 '탈리스커 커피'가 있었는데요. 아래는 따뜻한 커피, 위는 차가운 위스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차갑다가 뜨거워지는, 톡 쏘는 맛이 독특합니다.



점심식사를 만족스럽게 끝냈으니 이제 글렌피넌으로 가야겠죠. 벌서 2시가 넘었네요. 8시간을 운전해 에든버러에 도착하면 10시가 넘을텐데요. 여유 부릴때는 좋았는데 이제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합니다.


차를 타고 목적지를 글렌피넌 뷰포인트(Glenfinnan viaduct viewpoint)로 찍고 갑니다. 지난 3일 간 차 안에서 스트리밍으로 다양한 종류의 음악을 틀었는데요. 가장 반응이 좋았던 음악은 역시 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노래들이었어요. 다들 그때 추억이 많아서인가봐요.


글렌피넌으로 가는 길의 안개 낀 풍경.

예쁜 다리가 있어서 잠깐 내렸어요.

산책하기 좋은 오솔길이네요.


스코틀랜드의 광활한 자연이 창밖으로 지나가고 우리는 언제 다시 올지 알 수 없는 길을 달립니다. 가끔 2차선 도로의 맞은편에서 차가 오기 때문에 운전하는 동료는 계속 긴장을 해야 했고, 조수석에 앉은 저도 계속해서 지도를 체크해야 했어요. 그런데 어제부터 계기판에 빨간 등 하나가 계속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디젤차를 몰아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니까요. 'Ad Blue'가 부족하니 채워넣으라는 뜻 같은데요. 문제는 'Ad Blue'가 뭐고, 어디로 넣어야 하고, 또 무슨 역할을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거예요. 구글링해봐도 안 나오더라고요.


중간에 무인 주유소가 있길래 주유하기 위해 잠시 멈췄는데요. 거기서 만난 독일 여행객에게 물어봤습니다. 그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Ad Blue' 없어도 엔진 멈추는 일은 없으니 걱정 말라고 말해주네요. 그래서 그냥 안심하고 다시 차를 탔습니다.


내비게이션이 알려준 길로 가니 아르마데일(Armadale)까지 왔습니다. 여기서부터는 거대한 화물선을 타고 바다를 건너야 합니다. 자동차를 싣고 배로 이동하는데 인원 수에 따라 티켓을 구입해야 하더라고요. 배는 아르마데일에서 말레이그(Mallaig)로 가는데 20분 정도 걸립니다. 섬으로 들어갈 때는 스카이 브릿지를 건너갔는데 나올 때는 배를 타고 나오니 여러 경험을 해본 것 같아 좋았습니다.


아, 월드컵은 어떻게 했냐고요? 펍에 가긴 갔는데 경기 시간을 잘못 알아서 3시에 도착했어요. 1시간이나 더 허비할 수는 없어서 펍에서 보는 것은 포기하고 차 안에서 라디오로 듣기로 했습니다. SBS 고릴라 앱을 깔았더니 방송이 잡히더라고요. 한국말로 된 라디오 방송이 나오자 우리는 차 안에서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저는 앱으로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기도 했는데 방송에서는 소개를 안 해주더라고요. 스코틀랜드에서 한국 대표팀 경기를 귀로 듣겠다며 앱을 설치한 청취자가 보낸 사연을 소개해주지 않다니, 너무한 거 아닌가요?


차를 배에 싣고 북대서양을 건넙니다. 배 안에서 한국 대 멕시코전을 봤어요.


차가 배 안으로 들어간 뒤엔 모두 차에서 내려야 했기에 배 안 객실 TV로 축구를 봤습니다.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 경기에 전혀 관심이 없다가 우리가 열심히 관전하자 조금씩 관심을 갖기 시작하더라고요. 특히 몇 명의 프랑스인들이 우리 옆에서 함께 경기를 봤습니다.


배가 말레이그에 도착하고, 우리는 다시 차를 타고 이동했습니다. 5시가 넘었고, 차 안에서는 배성재 아나운서와 박지성 해설이 후반전을 중계하기 시작했어요. 경기는 0대 1로 한국이 지고 있었는데요. 귀로 듣기만 해도 참 안타까워요. 차라리 경기를 안 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후반전 끝나갈 때쯤 라디오가 잡히지 않아서 최종 스코어를 모르고 있다가 다시 인터넷이 재개된 뒤 확인했는데 인저리타임에 한 골을 더 먹었더라고요.


축구의 결과는 아쉬웠지만 경기가 끝나는 시점에 우리는 창밖으로 증기기관차가 서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얼른 차에서 내려 뛰어갔어요. 해리포터에 나온 증기기관차는 하루에 두 차례만 운행한다고 하는데 마침 오후 열차가 거기 서 있던 거예요. 글렌피넌에 가면 이미 기차 시간이 지나서 못 보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다른 곳에서라도 보게 되니 반갑더라고요. 이곳은 한쪽 선로가 막힌 열차의 종점이었습니다.


로얄 하이랜더 증기기관차. 하루에 두 번 운행한다죠.

떠나는 증기기관차를 갈매기가 배웅해요.


증기기관차 사진을 찍고 나서 우리는 다시 길을 찾아 목적지인 글렌피넌(Glenfinann)에 도착했습니다. 글렌피넌은 트래킹 코스로 유명한 곳이지만 우리가 여기 온 목적은 영화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에 나온 기차 다리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가까이서 본 돌다리는 웅장한데다가 마치 동화같은 느낌이 있습니다. 저는 돌다리 바로 아래까지 가봤는데요. 다리 아래 유채화가 예쁘게 피었더라고요.


영화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에 나왔던 글렌피넌 기차길.

다리 밑에 유채꽃이 피었어요.


이제 여행이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차를 타고 3시간만 더 가면 에든버러입니다. 음악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피곤해서 잠자는 사람도 있을테니 저는 조용한 음악을 틀었습니다. 아까부터 계기판이 계속 신경 쓰였는데 이젠 'Ad Blue' 옆에 'Engine will not start'라는 경고문구까지 떴어요. 정말 걱정 안 해도 되는 걸까요? 하지만 하루만 버티면 되는데 괜찮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들어서 우리는 일단 숙소까지 그냥 가기로 했습니다.



저녁 10시가 다 되어서 드디어 에든버러에 도착했습니다. 해가 저물어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어요. 줄곧 내달리느라고 저녁도 먹지 못했지요. 우리는 슈퍼마켓에서 저녁거리를 사기로 했어요. ASDA라는 대형 슈퍼마켓 주차장에 차를 세웠습니다. 여러 종류의 스테이크와 과일 등을 푸짐하게 사서 돌아왔습니다. 스코틀랜드는 고기가 확실히 싸요. 등심 스테이크 한 덩어리가 5천~6천원 밖에 안 합니다. 초원에 방목해 기른 소에서 나온 고기이니 품질도 최상급이죠. 숙소에서 구워먹을 스테이크를 상상하며 차에 올랐는데요. 그런데 이런! 정말로 시동이 걸리지 않는 겁니다. 정체를 알 수 없던 애드블루(Ad Blue)가 결국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차는 계속 시동이 걸리지 않을 거라고 경고를 해왔는데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말만 믿고 무시해왔던 거죠.


집단멘붕에 빠진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헤맸습니다. 일단 애드블루를 구해와야 했고, 또 이걸 어디에 넣어야 하는지를 알아야 했습니다. 렌트카 업체에 전화를 걸었지만 토요일 밤이어서인지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네요.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마지막으로 주차한 곳이 대형 슈퍼마켓 주차장이라는 거예요. 숙소로 바로 갔다면 이 야심한 밤에 어떻게 했을지 아찔하네요. 저는 슈퍼마켓을 한참 뒤져서 애드블루를 찾아냈습니다. 처음엔 직원도 어디 있는지 모르길래 없는 것 아닌가 싶었는데 모서리 진열장에 있더라고요. 가격은 5파운드였습니다.


이제 집단지성이 효과를 발휘할 시간입니다. 그렇게 찾아도 보이지 않던 애드블루 주입구가 조수석과 뒷좌석 사이 아래 부분에 있더라고요. 아니, 구글링 해보니 다른 차들은 전부 주유구 옆에 있던데 왜 푸조 트래블러만 이렇게 전혀 다른 위치에 애드블루 주입구를 설치한 걸까요? 어쨌든 우리는 애드블루를 투입하고 시동을 걸었고, 차는 거짓말처럼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일정 끝에 우리는 겨우 11시쯤 숙소로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숙소는 에든버러 외곽의 낡은 2층집이었어요.


에딘버러 숙소에서 마지막 파티. 고기 순삭.


밤이 늦었지만 배가 고픈 우리는 슈퍼마켓에서 두둑하게 산 스테이크로 마지막 파티를 벌였습니다. 내일이면 스코틀랜드를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어요. 막상 에든버러에 도착하고 나니 지난 3일 간 하이랜드 대자연 속을 헤집고 다녔던 여정이 꿈처럼 느껴졌습니다.


감회에 젖어 있는데 갑자기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합니다. 고기 굽는 연기 때문에 화재경보기가 울린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하루네요. 의자를 받히고 천정에 부착된 화재경보기를 두 번 눌렀더니 다행히 경보음이 꺼집니다. 가슴을 쓸어내리고 창문을 활짝 열고 환기를 시켰습니다.


진정이 된 우리는 다시 바닥에 둘러 앉았습니다. 더 이상 사건이 없기를 바라면서 탈리스커에서 산 위스키를 꺼내 마셨습니다. 그렇게 스코틀랜드의 마지막 밤이 저물어 가고 있었습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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