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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 신기술로 무장한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곳, 혁신기업의 산실, 창업의 요람, 인재 블랙홀 등 지구에서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곳. 영화배우가 할리우드를 동경하듯, 발레리나가 마린스키를 바라보듯, 창업을 세 번 실패하고 장래를 고민하던 27세 청년 김태용 씨는 실리콘밸리가 궁금했다. 특히 자기 또래 친구들은 그곳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고 싶었다.


아는 사람 한 명 없었지만 그는 모아둔 돈 350만원을 들고 비행기를 탔다. 공항에서 페이스북에 영상 메시지를 띄웠다. 누구든 좋으니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는 지인이 있으면 소개시켜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이었다. 세 번째 창업 아이템이 모바일 영상 콘텐츠를 만드는 일이었기에 그는 자신의 장기를 살려 현지에서 영상을 만들기로 했다. 무모해 보이는 그의 도전은 그러나 네트워크의 위력을 실감하게 해준다.


리얼밸리 연재하는 김태용 씨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고 보니 메시지가 몇 개 와있더라고요. 페친(페이스북 친구)들이 지인을 추천해줬는데 그중 핀테크 기업에서 일하는 분을 찾아갔어요."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그는 충실한 인터뷰이가 되어 주었다. 그날 김 씨는 밤을 새며 인터뷰 영상을 만들었고, 이 영상을 포트폴리오 삼아 여러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며 인터뷰 대상자를 물색했다.


"42일 동안 40명 이상을 만났어요. 도미노처럼 인터뷰이가 다른 인터뷰이를 소개해줘서 나중에는 제가 선발을 해야 했어요. 그중 스토리가 있는 16명을 영상에 담았죠."


그가 인터뷰한 사람들은 페이스북 디자이너, 우버 엔지니어, 픽사 촬영감독 등 다양하다. 그는 하루에 1~2회 꼴로 인터뷰하고 그들이 일하는 모습 촬영했다. 돈이 다 떨어지자 그는 한국으로 돌아왔고 지난 9월부터 페이스북에 '리얼밸리'라는 이름으로 자신이 만든 영상을 하나둘씩 공개하기 시작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페이스북에 올린 영상의 조회수가 500만 회를 훌쩍 넘었다. 그중 두 명의 이야기가 특히 큰 공감을 얻었다.



테슬라 사표 내고 숙취음료회사 창업한 이시선 씨


테슬라에서 프로덕트 매니저로 일하던 이시선 씨(27)가 김 씨를 만났을 때 그는 막 회사를 그만두고 스타트업을 시작한 참이었다. 그는 투자 미팅을 위해 로스앤젤레스로 가기 3시간 전 김 씨를 만났다. 시간이 없던 그는 김 씨의 제안에 따라 자신의 이야기를 15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들려주었다.


15분은 한 사람이 스타가 되기 충분한 시간이다. 자신의 비전과 독특한 사업 아이템과 살아온 배경을 마치 래퍼처럼 거침없이 쏟아내는 그의 모습을 담은 영상은 페이스북에서 100만회 넘게 조회되며 큰 화제가 됐다.


"영상을 보고 많은 분들이 연락을 주셨어요. 바이럴(입소문)의 위력을 실감했죠."


최근 사업 파트너 물색차 한국을 찾은 그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 씨는 아홉 살 때 캐나다로 이민 간 교포다. 워털루대에서 공학을 전공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페이스북과 우버 등에서 일했다.


테슬라를 나와 숙취음료 회사를 창업한 이시선 씨


"실리콘밸리 기업들은 직원들에게 업무 외 사이드 프로젝트를 장려해요. 그동안 제가 해왔던 아이템은 창업보다는 개인적인 재미를 위한 거였어요. 숙취음료도 마찬가지예요. 한국에 가서 술 마시려는데 다들 이걸 먹더라고요. 그런데 미국에는 시장이 없는 거예요. 어, 이렇게 좋은 걸 왜 안 하지? 그래서 시작했죠."


그는 풀타임으로 회사에서 일하는 틈틈이 창업 준비를 해나갔다. 까다로운 미국의 식품 관련 법규를 준수하기 위해 헛개의 의학적 효능을 증명해줄 전문가를 만나고, 시장성을 확인하기 위해 샘플을 페이스북에서 무작위로 나눠줬다. 자금 모금을 위해 진행한 프로덕트 펀드에서 목표를 초과 달성하고 회사와 병행하기 힘들만큼 일이 커지자 그는 퇴사를 결심한다.


"투자받기 위해 벤처캐피털 관계자를 만났는데 별다른 설명이 필요없었어요. '행오버 드링크'라고 했더니 다들 알아들어요. 한국에서 인기라고 하니 관심을 갖더군요. 신세계를 소개하는 기분이었죠."


벤처캐피털에서 45만 달러를 투자받고 창업 5개월째를 맞은 이 씨의 회사 '82 Labs'의 매출액은 수직 상승하고 있다. 지난 8월부터 10월까지 100만 달러 수입을 올리더니 11월에는 한 달만에 200만 달러를 돌파했다. 직원도 8명으로 늘었다.


"투자자들이 저의 강점이 뭐냐고 물어보면 저는 항상 빠른 실행력이라고 답해요. 좋은 아이템은 어디에나 있죠. 그 아이템에 진전이 보이면 누구보다 빨리 실행에 옮기는 게 중요해요."


테슬라라는 유망 기업에 다니다가 퇴사하는 것이 두렵지 않았냐고 묻자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이렇게 답했다.


"부서 보스가 제 이야기를 듣더니 자기 돈을 투자하겠다면서 얼른 나가라고 하더라고요. 망하면 언제든 돌아오라면서요. 실리콘밸리에선 실패한 뒤 돌아가면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는 경우가 많아요. 치열한 실패의 경험을 높이 사는 거죠."



대학을 4번 다닌 끝에 적성 찾은 윤일원 씨


"제가 실리콘밸리에서 만난 사람들 중 싫어하는 일을 억지로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어요. 모두들 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 알고 그 길을 향해 가고 있어요."


김 씨에게 가장 인상 깊은 인터뷰이는 가상현실(VR)을 구현하는 회사 'Off2'에서 UX디자이너로 근무하는 윤일원 씨(33)다. 그는 한국에서 공대에 다니다가 사진학과로 재입학했다. 하지만 예술 전공임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인 수업 방식에 답답해 하다 유학을 결심한다. 미국에서도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전공을 또 바꿨다.


"시카고대에서 순수예술을 전공했어요. 고양이 밥 주는 기계를 만들었는데 한국과 달리 교수님이 응원해 주시는 거예요. 학점이 없는 과목이었지만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학생들이 다들 집에 안 가요. 그렇게 학교에서 '내 것'을 만들 수 있는 시간이 참 소중했어요."


윤 씨의 첫 직장은 구글. 소셜팀에서 디자이너로 일했다. 남들은 꿈의 직장이라고 하지만 그는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없는 대기업이 답답했다. 그래서 1년 6개월 만에 작은 회사로 옮겼다.


"전공과 직장을 계속 바꾼다는 게 처음에는 콤플렉스였지만 이제 저는 그걸 저의 강점으로 밀어붙여요. 사진 찍고, 물리적 제품 만들어보고, 미디어 아트도 해봤다는 게 저만의 장점이죠. 다양한 관점에서 사물을 볼 수 있게 됐잖아요."


대학을 네 번 다닌 Off2의 UX디자이너 윤일원 씨


한 취업포털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의 2030 세대 절반 가량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답했다. 막상 취업을 해도 기대 이하 처우와 수직적인 사내 문화 때문에 적응하지 못하고 1년 내 퇴사하는 비율도 4명 중 1명 꼴로 많다(한국노동연구원 조사 결과).


만약 윤 씨가 계속 한국에 있었다면 잦은 변덕으로 끈기 없는 청년으로 낙인찍히지 않았을까. 그는 수시로 도전하고 싶은 분야가 달라지는 자신에게 실리콘밸리는 끊임없이 자극을 주는 일터라고 말한다.


"이 동네는 뛰어난 사람들이 많은데 안주해 있지 않아요. 다들 취미가 일인 것 같아요. 그걸 너무 즐기고 있는 게 눈에 보여요. 만날 때마다 자극이 돼요."



리얼밸리 연재가 인기를 얻으면서 김 씨는 1인 크리에이터로 눈코 뜰새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에게 실리콘밸리는 또 다른 의미에서 기회의 땅이 된 셈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42일 간 실리콘밸리를 꼼꼼하게 들여다보면서 느낀 점을 이렇게 털어놨다.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면 좋은 게 뭐냐고 물으면 다들 '동료가 뛰어나서 자괴감이 들 때가 많은데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만큼 성장한다'고 해요. 선언하듯 혁신하겠다고 하는 게 아니라 일상이 항상 새로움을 찾는 과정으로 가득 차 있어요. 이런 사람들끼리 끊임없이 네트워킹이 이뤄지고요. 이들과 제가 나중에 경쟁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해지는, 정말 무서운 곳이었어요."


(매일경제신문 12월 16일자에 실린 글입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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