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티나 폰타나는 미디어그룹 억만장자 회장의 비서입니다. 뉴욕주립대를 졸업했지만 그녀가 하는 일이라곤 상류층이 가는 고급 식당, 골프 클럽, 항공편 일등석 예약하기, 샌드위치와 커피 사오기 등 회장의 잔심부름 뿐입니다. 회장을 따라다니며 상류사회 사생활을 간접 경험하고는 있지만 정작 그녀에겐 그림의 떡입니다. 직장생활 6년 만에 남은 것이라곤 30세라는 한숨 쉬게 되는 나이와 언제 갚을지 모르는 학자금 대출 뿐입니다.



어느날 티나에게 행운이 찾아옵니다. 사실 행운이라기보다는 그녀를 시험에 들게 한 것인데요. 회장이 타고 갈 일등석 항공권 값 2만 달러를 그녀의 개인 신용카드로 대신 결제했다가 나중에 취소되는 과정에서 환급금을 양쪽에서 받는 뜻밖의 횡재를 하게 된 것입니다. 회사에 돈을 돌려줄까 고민하던 그녀는 눈 딱 감고 그 돈으로 학자금 대출을 갚아버립니다.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이후 그녀는 불안감에 시달립니다. 회장이 부를 때마다 깜짝깜짝 놀랍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발각되지 않네요. 이렇게 완전범죄로 별 탈 없이 대출자 생활이 끝나고 그녀의 삶에도 햇살이 비치는 걸까요? 그런데 그 순간, 회계팀의 비서 에밀리가 그녀를 찾습니다. “나는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다.” 당황한 티나에게 에밀리는 이렇게 제안합니다. “나도 학자금 대출이 7만달러나 있어.”


이야기는 타이탄 그룹 내부에서 여비서들이 학자금 대출 상환을 위해 연대하는 과정으로 발전합니다. 범법행위를 들키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하던 티나는 얼떨결에 조직의 대장이 되고요. 티나의 남자친구 케빈이 속도 모르고 티나를 좋은 일을 하는 뉴요커로 언론사에 제보하는 바람에 티나는 이제 페미니스트로서 스포트라이트까지 받게 됩니다. 이제 그녀의 인생은 어디로 흘러가게 될까요?



[도둑비서들(The Assistants)](북로그컴퍼니 펴냄)의 줄거리입니다. 학자금 대출에 고민하는 흙수저 청춘, 고학력에도 취업하기 힘든 현실, 한 공간에서 일하지만 알고보면 막대한 빈부격차 등 속깊은 주제를 가볍고 발랄한 ‘칙릿(Chick-lit)’ 형태의 문장으로 써내려간 소설입니다. 간결한 문체가 속도감 넘치고, 매순간 유쾌하고 코믹해 페이지가 술술 넘어갑니다.


저자는 ‘에스콰이어’ 잡지 책면 편집자였던 카밀 페리(Camille Perri)로 이 소설은 그녀의 데뷔작입니다. 그녀 역시 티나처럼 뉴욕주립대에서 예술 학사 학위를 받았고 퀸스 칼리지에서 도서과학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 소설은 그가 ‘에스콰이어’ 편집장의 비서로 일할 때 썼다고 하네요.


저자와 소설 속 티나가 닮아서인지 티나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생생합니다. TV 드라마나 영화 속 인물들과 비교하며 등장인물을 품평하기도 하고 시시각각 자신의 감정을 생중계하기도 하는데 그녀의 속마음을 엿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카밀 페리와 <도둑비서들> 영문판 표지


사실 티나는 우리 주위 어디에나 있는 여자입니다. 평범한 노동자 계층의 가정에서 자라 아이비리그까지는 아니어도 이름 있는 대학을 졸업했지만 딱히 하고 싶은 일은 없어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대기업 비서로 취직한 여자. 범법행위라곤 해본 적 없이 착실하게 살아온 여자. 예쁘고 가슴 빵빵한 여자들을 질투하며 자신의 평범한 외모에 자괴감을 느끼는 여자. 그러나 자신감이 없는 건 아니어서 여자들에게 더 사랑받는 터프한 스타일의 여자. 연애경험은 짧지만 잘 생긴 변호사 케빈이 자신에게 추파를 날리자 왠 떡이냐며 행복한 고민에 빠지는 여자...


티나에 공감하면 할수록 그녀가 비자발적으로 처하게 되는 상황이 극명하게 대비되면서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어가게 됩니다. 애초에 불평등이니 해방이니 하는 용어들을 외치며 살아온 사람보다 이렇게 평범한 사람이 자본주의 시스템의 폐해를 자각하며 만들어가는 이야기가 더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법이니까요.



소설은 미국에서 베스트셀러로 등극했고요. ‘버라이어티’에 따르면 영화사 콜드 아이언 픽처스가 이 소설의 판권을 구입해 영화화를 추진하고 있다고 합니다. 콜드 아이언 픽처스는 대니얼 래드클리프 주연의 <스위스 아미 맨>을 만든 중소규모의 영화사입니다. 누가 티나 역할을 맡을지도 궁금하네요. 참, 소설에선 티나의 외모를 1990년대 위노나 라이더 스타일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댓글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