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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의 1995년 데뷔작 <환상의 빛>에 대한 정성일 평론가의 평에는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환상의 빛>은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가지 않은 길이다."


이 문장에 동의하면서 고레에다가 '걸어온 길'과 '가지 않은 길'이 어떤 길인지 생각해봤습니다.



<환상의 빛> 이후 <원더풀 라이프> <아무도 모른다> <걸어도 걸어도> <공기인형>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로 이어지는 고레에다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보고 있으면 그의 작품은 하나의 길을 향해 계속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죽음과 상실에서 출발해 고통을 극복하고 공생하는 길입니다. 그의 영화들은 쓸쓸하고 외로운 하나의 점에서 시작해 타인을 포용하며 점을 연결하는 방식으로 나아갑니다. 이 모든 과정을 일렬로 놓고 보면 <환상의 빛>은 하나의 점 같은 영화입니다. 빅뱅 이전 무한하게 작은 태초의 빛처럼, 이 빛은 어디로 향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고레에다는 이후 하나의 방향을 택했고, 그 빛이 퍼져서 지금까지 왔습니다.


<환생의 빛>의 후반부에 유미코(에스미 마키코)가 버스 정류장에 앉아서 버스를 기다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매일 밤 잠들지 못하고 방황하던 그녀는 아마도 고통스런 일상을 탈출하기 위해 버스를 타려고 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녀는 버스가 왔는데도 타지 않습니다. 그 대신 인근 장례행렬을 발견하고는 따라갑니다.



만약 이 장면에서 그녀가 버스를 탔다면 어땠을까요? 전혀 새로운 인생을 살았을까요? 혹은 다른 곳에서 전남편의 자살을 못 잊은 채 고통스러워 했을까요?


제 생각에 고레에다 감독의 이후 영화들은 모두 그녀가 버스를 탔다는 가정 하에 출발하는 것 같습니다. 버스를 타지 않고 무거운 장례행렬을 따라가는 영화는 <환상의 빛>이 유일해 보입니다. <환상의 빛>의 후반부는 강렬한 이미지 중심의 예술영화인데 이는 고레에다 감독의 이후 영화에서는 보지 못한 장면들입니다. 이후 작품에서는 이렇게까지 멀리서 관조하면서 주인공을 쓸쓸하게 놔두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장면이야말로 고레에다 감독이 '가지 않은 길'입니다.



<환상의 빛>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하게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오사카에 사는 유미코는 밝은 성격의 여성입니다. 그녀는 어릴 적 다리 위에서 할머니가 어디론가 가는 것을 목격합니다. 할머니는 다시 올 거라고 했지만 유미코에게는 그 때가 할머니를 본 마지막이었습니다. 유미코는 그날 할머니를 강하게 붙잡지 않았다는 것을 자책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좋아하던 동네 소년 이쿠오(아사노 타다노부)와 결혼해 아들을 낳습니다. 유미코가 이쿠오와 결혼한 것은 할머니를 잃은 상실감을 만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할머니를 떠나보낸 날, 그녀를 쫓아온 소년이 바로 이쿠오였거든요. 말수가 적은 청년 이쿠오와 유미코는 행복한 나날을 보냅니다.


그러나 어느날 유미코는 경찰로부터 한 남자가 기차에 깔려 죽었다는 사실을 통보받습니다. 이어폰을 낀 채 걸으면서 의도적으로 뒤에서 오는 열차를 피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유미코는 두 번째 상실감에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습니다. 밝았던 성격에 점점 어둠이 드리웁니다.



이제 영화는 2막으로 접어듭니다. (막을 나누는 것은 깊은 어둠입니다) 유미코는 엄마 친구의 주선으로 재혼을 하게 됩니다. 오사카를 떠나 해안가 마을로 갑니다. 그곳에서 딸이 있는 남자 타미오(나이토 다카시)와 가정을 이룹니다.


영화는 이때부터 분위기를 바꾸어 유미코의 새로운 생활을 차분하게 보여주는데 시간을 할애합니다. 그녀는 계단을 하나씩 닦고, 가만히 앉아 창문 너머 바다를 내다보고, 속옷만 입은 채 더운 여름을 보내고, 추운 겨울을 대비해 대나무로 바람막이를 세웁니다. 두 아이들은 어울려 강둑을 달리고, 동굴 속으로 뛰어갑니다. 동굴 속의 햇빛, 바다에 비친 가로등, 켜지지 않는 전구, 창문 사이로 비치는 빛 등 서정적인 장면들에서 빛은 메타포 역할을 합니다. 카메라는 좀처럼 클로즈업을 사용하지 않고 멀리서 관조해 모든 장면들이 그림엽서처럼 아름답게 보입니다.



3막에 이르러 영화는 관조를 끝내고 유미코의 내면으로 깊숙이 들어갑니다. 아름다운 풍경 속에 가리워져 있던 유미코의 내면이 폭발합니다. 강풍이 몰아치는 겨울, 유미코는 또 한 번 할머니를 잃을 위기에 처해 괴로워합니다. 이번에는 할머니가 돌아오지만 그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그때 그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고, 지금은 돌아오는지. 그녀는 버스를 기다리다가 장례행렬을 따라갑니다. 그리고 바닷가에서 남편과 마주칩니다.


"난 정말 모르겠어. 그 사람은 왜 자살한 걸까? 왜 기찻길을 걸으면서 뒤돌아보지 않았을까?"

"아버지는 바다가 자기를 부른다고 하셨어. 바다에서 빛을 봤다고 하셨어. 누구에게나 그런 빛이 있는 게 아닐까?"


'환상의 빛'이 무엇인지 실체를 알기는 어렵습니다. 동굴 속에 우연히 들어오는 햇빛일 수도 있고, 갈기 위해 빼놓은 전구가 어제까지 집안을 비추던 빛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도, 전남편도 어느 순간 그 빛을 발견하고는 따라갔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빛은 어쩌면 '운명'의 은유일지 모릅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 그 사이에서 행해지는 장례식 행렬을 영화가 오랫동안 비추는 것은 그 이유일 것입니다. 장례행렬은 길과 바다의 사이에 난 좁은 길을 따라 오른쪽 끝에서 왼쪽 끝까지 롱테이크로 이어집니다. 맨 뒤에 선 유미코는 죽음으로 가는 그 행렬을 이해하지 못하고 괴로워합니다.



<환상의 빛>은 이미지 중심의 영화입니다. 관객을 설득하거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영화가 아닙니다. 30분이면 충분할 이야기를 109분 동안 지속하는 힘은 서정적인 미장센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미지가 필요한 이유는 관객이 유미코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공감하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입니다. 영화 속에 수많은 빛이 등장하고 영화를 보는 관객은 그 빛을 받아들이지만, 정작 운명을 가르는 빛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있습니다. 그 보이지 않는 빛을 묘사하기 위해 영화는 끊임없이 풍경을 빛 속에 담습니다.



다시, '가지 않은 길'로 돌아와 봅시다.


고레에다 감독이 <환상의 빛> 이후 만든 영화 <원더풀 라이프>는 <환상의 빛>의 답장 같은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는 죽은 사람이 저승으로 가기 전 림보의 세계에서 생전에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기억하도록 돕는 설정으로 진행됩니다. 아마도 <환상의 빛>에서 유미코를 떠나간 할머니와 전남편은 림보에서 유미코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후 영화들에서 고레에다 감독은 따뜻한 시선을 견지합니다. <환상의 빛>처럼 모호하고 불안정한 결말은 없습니다. 또 <환상의 빛>처럼 이미지만을 나열하는 미학 중심적인 장면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환상의 빛> 이후 고레에다 감독은 이 영화와 다른 길을 택했고, 그 길로 지금까지 왔습니다.



어떤 길이 더 좋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인생에는 다만 가지 않은 길이 있을 뿐입니다.


로버트 프로스트가 시 '가지 않은 길'을 쓴 의도도 사실 그것이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드문 길을 택해 여기까지 왔다는 '마이웨이'를 칭송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길이든 그것은 하나의 길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 길을 스스로의 결단으로 여기면 '자기 기만'이 들어갈 수밖에 없기에 모든 길은 그 나름대로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신형철 교수의 한겨레 기고 글 참조)


<환상의 빛>으로 출발한 고레에다 감독이 <바닷마을 다이어리>까지 진화한 이유를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마치 무한히 작은 점이었던 우주가 빅뱅 이후 이렇게 팽창하고 있는 이유를 인간이 알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다만 우리는 <환상의 빛>을 통해 고레에다 감독이 애초 가졌던 작은 빛의 정체를 확인할 수는 있습니다. 20년만에 살펴본 그 빛은 운명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을 쓸쓸하게 관조하는 빛이었습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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