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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향신료이며

샤프란에 이어 두 번째로 비싼 향신료는 뭘까요?

정답은 바닐라입니다.


바닐라는 우리 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식물입니다.



전 세계 아이스크림의 3분의 1을 차지할 뿐만 아니라



컵케이크 등 많은 디저트는 바닐라 없이 만들 수 없습니다.



초콜릿에도 쓰이고, 콜라의 주 향료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고급 향수인 샤넬 No.5, 입생로랑 오피움에도

세계에서 가장 비싼 바닐라가 들어 있습니다.



이밖에 화장품, 세척제, 양초에도 사용됩니다.



이처럼 쓰임새가 많은 바닐라는

주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보니

원래부터 있던 것 아닌가 생각하기 쉬운데요.

예전에는 아주 귀한 식물이었습니다.


2010년 바닐라 빈 생산량은 대략 500만개로

인도네시아, 중국, 케냐, 멕시코 등이 주요 재배지입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174년 전인 1841년만해도

오직 멕시코에서만 생산되었는데

바닐라 빈은 2000개에 불과했습니다.


바나나 빈


스페인 사람들이 멕시코 아즈텍 사람들을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이 바닐라를 향신료로 사용해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1519년 이를 유럽으로 가져오려 합니다.


하지만 바닐라는 유럽에선 꽃을 피우지 않았습니다.

제아무리 정복자라 해도 꽃을 피우지 않는 바닐라 앞에선

총칼로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지요.


나중에야 19세기 후반 찰스 다윈의 진화론 이후

유럽에 서식하지 않는 녹색 벌이

바닐라의 수분 매개자라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300년 동안 바닐라 난초는

유럽에서 수정시키기 불가능한 식물로 여겨졌습니다.


유럽에서 바닐라는 아주 귀한 향신료로 취급받으며

오직 멕시코에서만 가져다 썼습니다.


그렇다면 19세기 중반 바닐라는 대체 어떻게

전 세계로 퍼져나갈 수 있었을까요?

재미있게도 그 비밀의 열쇠는

아프리카 동쪽의 프랑스령 식민지 섬에 살던

한 흑인 노예 소년이 쥐고 있습니다.


300년 동안 유럽의 석학들이 풀지 못한 난제를

한 흑인 소년이 풀어낸 것입니다.


Edmond Albius


아프리카 동부 인도양에 레위니옹이라는 섬이 있습니다.

마다가스카르, 세이셸보다 더 오른쪽에 있는 작은 섬입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이 섬을 한때 보나파트르 섬이라고 불렀다고 하네요.


레위니옹 섬에 살던 에드몽이라는 12살난 흑인 노예 소년은

주인 보몽의 남동생인 페레올의 농장을 가꾸며 살고 있었습니다.

식물 재배에 관심이 많던 페레올은

1822년부터 바닐라 덩굴을 가져와서 키워보려 했습니다만

다른 바닐라와 마찬가지로 그의 바닐라 역시 열매를 맺지 않았죠.



그러던 1841년 어느날 아침,

에드몽이 바닐라를 수분시키는 방법을 발견합니다.

바닐라 꽃잎을 뒤로 젖힌 다음

대나무 가지로 자가 수정을 방해하는 부분을 들어올리면서

화분을 품고 있는 꽃밥과 함께 화분을 받아들이는 암술머리를 부드럽게 쥐면

바닐라 꽃이 수분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죠.


페레올은 처음엔 에드몽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눈앞에 보이는 바닐라 꽃은 명백한 증거가 되었죠.

에드몽은 농장을 찾아다니며 다른 노예들에게

바닐라를 수분시키는 비법을 전수하였고

그뒤 레위니옹 섬은 바닐라 재배지로 주목받게 됩니다.


프랑스인들은 에드몽이 발견한 이 방법을

‘르 제스트 데드몽(Le geste d’Edmond)’

즉, ‘에드몽의 손짓’이라고 부르는데

오늘날에도 바닐라 수분에는

이 방법이 여전히 사용된다고 합니다.



1841년까지 전세계 연간 생산량이

1~2톤에 불과하던 바닐라는

‘에드몽의 손짓’ 기법 이후 19세기 말엔

200톤에 이를 정도로 성장합니다.


에드몽은 바닐라를 수분시키는 법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은 인류의 역사를 바꾼 위대한 발견입니다.

그 업적을 평가받아 레위니옹 섬에는

에드몽 알비우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알비우는 훗날 그가 노예에서 해방될 때

백인들이 그에게 붙여준 성입니다.


레위니옹의 에드몽 동상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의 이름이 역사에 남게된 과정입니다.

페레올은 주인이라는 명목 하에 얼마든지

그의 업적을 가로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에드몽이 발견했다는 것을

앞장서서 홍보해주었습니다.

그리고 1848년 6월 에드몽을

자유의 몸으로 풀어주었습니다.


언젠가 레위니옹 식물원 책임자인

장 미셸 클로드 리샤르가

자신이 그 기법을 개발한 것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페레올은 리샤르가 망상에 빠져 있다고

대신 반박해주었습니다.

이러한 페레올의 노력 덕분에

에드몽은 역사에 남을 수 있었습니다.



역사엔 수많은 발견과 창작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중 대부분은 발견자 혹은 창작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기록하는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발견자를 중시하는 문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물려받은 것들을

필요에 맞게 고치고 바꾸어

다시 후대에 물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구텐베르크가 활판 인쇄술을 발명한 15세기쯤 되어서야

비로소 창작자가 누구인지 중시하는 문화가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중세와 근대는 계급사회였기에

에드몽 역시 페레올처럼 올바른 생각을 가진

주인을 만나지 못했다면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 확률이 높았겠죠.


오늘날까지 기록되어 남아 있는

에드몽의 발견뿐만 아니라

기록되지 않은 역사 속 무명의 창작자들에게

이 포스트를 바칩니다.



참고자료: The Little Boy Who Should've Vanished, But Didn't., How to Fly a Horse by Kevin Ashton (창조의 탄생, 북라이프).



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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