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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천사들의 도시' LA의 삼류잡지 '허쉬 허쉬' 편집장 시드 허드젠스(대니 드 비토)의 나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영화 <LA 컨피덴셜>은 무너진 아메리칸 드림에 관한 영화이자 '적은 내부에 있다'는 이후 흥행공식이 된 플롯의 시초이면서 장르적으로는 1950년대 필름 느와르를 1990년대식으로 재해석한 영화입니다.


1997년에 나온 영화 중 최고의 작품으로 커티스 핸슨 감독의 경력에서도 단연 베스트입니다.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이후 이만한 걸작이 나오지 않은 것을 보면 그의 능력이 조루현상을 겪었거나 혹은 이 작품을 만들 때 그에게 잠시 신이 내렸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커티스 핸슨은 이 영화 이전에 <배드 인플루언스> <요람을 흔드는 손> <리버 와일드>를 만들었지만 모두 걸작이라기보단 괜찮은 수준의 영화들이었습니다. 텐트폴로 우뚝 솟은 <LA 컨피덴셜> 이후 만든 영화로는 <원더 보이즈>, <8마일> 정도가 있지만 사실 그다지 기억에 남는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최근엔 건강이 악화돼 심장수술을 받는 등 영화 일에서는 손을 놓고 있다고 하는군요.



커티스 핸슨과 함께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 역시 최고의 인재는 아니었습니다. 물론 지금 기준으로 보면 명배우들의 젊은 시절을 볼 수 있지만 당시에 그들은 최고가 아니었습니다. 러셀 크로우와 케빈 스페이시, 가이 피어스는 막 할리우드에서 연기를 시작한 배우였고, 커티스 핸슨과 함께 각본을 맡은 브라이언 헬겔렌드의 경력은 <나이트메어 4>에 불과했습니다. 대니 드 비토와 제임스 크롬웰은 물론 유명했지만 이미 전성기가 지난 시기였습니다. 오직 킴 베이싱어만이 슈퍼스타였을 뿐입니다.


또 이 영화의 원작인 제임스 엘로이의 소설 역시 당시엔 베스트셀러가 아니었습니다. 엘로이가 1990년 출간한 'LA 4부작' 중 동명의 세번째 소설이 원작인데 (나머지 세 작품은 '블랙 달리아' '빅 노웨어' '화이트 재즈') 느와르 팬들은 열광했지만 대중적인 소설은 아니었습니다. 워낙 이야기가 방대하고 내용이 복잡했기 때문이었죠. 엘로이마저 자신의 소설은 영화화가 쉽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이처럼 중간 레벨의 감독이 막 신인티를 벗어나려는 배우들과 함께 베스트셀러도 아닌 소설을 각색해 만든 영화가 <LA 컨피덴셜>입니다. 그것도 1953년 LA를 배경으로, 장르는 액션도 아닌 선과 악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은 느와르 스릴러입니다. 이게 왜 독특한지를 알려면 1997년 할리우드의 개봉작들을 살펴봐야 합니다.


우선 1997년의 최대 히트작은 <타이타닉>입니다. 제임스 카메론의 말처럼 전세계를 제패했죠. 그리고 <굿 윌 헌팅> <부기 나이트> 등의 드라마 역시 히트를 쳤습니다. 또 <쥬라기 공원 2> <스타쉽 트루퍼스> <제5원소> <맨 인 블랙> <콘택트> <배트맨과 로빈> 등 SF 판타지 영화들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LA 컨피덴셜>은 '갑툭튀'였던 셈입니다. 이 영화들과 경쟁하겠다며 갑자기 등장한 1953년 배경의 느와르는 <LA 컨피덴셜> 속에서 강력계를 지망한 엑슬리(가이 피어스) 만큼이나 생뚱맞아 보였을 겁니다. 하지만 엑슬리가 뚝심으로 범인을 잡았듯 <LA 컨피덴셜> 역시 그해 다른 영화들을 제치고 최고의 영화로 살아남았습니다.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어 제작비 3600만달러에 흥행수입은 1억2600만달러로 4배 장사를 했습니다.


<LA 컨피덴셜>은 1998년 LA, 뉴욕, 보스턴, 시카고, 전미 비평가협회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각본상을 수상했습니다. 개성 강한 평론가들이 의견 일치를 본 것은 전무후무한 일입니다. 그러나 정작 할리우드 영예의 꽃인 골든글러브와 아카데미에서는 <타이타닉>에게 작품상과 감독상을 내주었습니다. 아마도 이때 제임스 카메론에게 밀린 뼈아픈 경험이 커티스 핸슨에겐 재능의 소진으로 나타난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나의 히트곡만 남기고 사라진 가수를 '원 히트 원더'라고 하는데 이 경우엔 한 편의 걸작만 남기고 사라졌으니 '원 마스터피스 원더'라고 해야겠군요. 어쨌든 안타까운 일입니다.



커티스 핸슨 감독의 <LA 컨피덴셜>은 지금 다시 봐도 참 멋집니다. 우아하면서도 적당히 속물적이고, 1950년대의 고전적인 멋이 1990년대식 세련된 감각과 공존합니다. 선과 악의 구분이 힘든 느와르의 남자 주인공들과 팜므 파탈은 겉으로는 밝아보이는 도시 LA의 이면과 환상적인 조합을 이룹니다. 캐릭터와 도시가 말을 하고 스토리는 자연스럽게 이들을 엮어냅니다. 대사는 맛깔스럽고 플롯은 영리합니다. 관객은 마치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복잡한 이야기를 따라가다가 후반부엔 스릴러의 쾌감을 온존하게 느낍니다. <차이나타운>에 이어 고전의 반열에 충분히 오를 만한 걸작입니다.


그동안 <LA 컨피덴셜>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이 있습니다. 이를 다섯 가지로 정리해봤습니다.



<LA 컨피덴셜>에 대해 몰랐던 5가지 사실:


1. 워너 브라더스는 커티스 핸슨에게 메인 캐릭터를 한 명으로 줄이라고 했다


영화는 에드 엑슬리, 버드 화이트, 잭 빈센의 세 축으로 나누어 진행됩니다. 하지만 워너 브라더스는 이것이 너무 복잡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커티스 핸슨에게 주인공을 한 명으로 바꿀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빅 네임의 배우를 캐스팅해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커티스 핸슨은 이를 거절합니다. LA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는 브라이언 헬겔렌드와 함께 원작 소설의 각색에 전력을 다하고 있었고 주인공은 셋이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다행히도 뉴 리젠시 프러덕션의 CEO 마이클 네이던슨은 커티스 핸슨의 스크립트를 좋아했고, 결국 그의 계획대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2. 영화는 원작 소설과 아주 많이 다르다


경찰 내부의 적이나 블러디 크리스마스, 나이트 올빼미 사건 등 큰 틀에서의 주제나 사건은 같습니다. 하지만 캐릭터와 시대 배경은 많이 다릅니다. 결정적으로 소설은 1951년부터 1958년까지 8년이라는 시간동안 일어나는 일을 다룹니다. 소설은 'LA 4부작'의 두번째 편인 '빅 노웨어'의 주인공 버즈 믹스가 더들리 스미스의 부하에게 죽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하지만 영화에서 버즈 믹스는 잠깐 등장했다가 어느새 시체로 나타날 뿐이죠. 나이트 올빼미 용의자에게 강간당한 뒤 살아남은 이네즈 소토 역시 책에서는 버드 화이트(러셀 크로우)와 에드 엑슬리(가이 피어스) 사이에서 삼각관계로 훨씬 큰 역할을 하지만 영화에서 그 역할은 린 브라켄(킴 베이싱어)에게 옮겨갔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영화에서 충격의 반전을 안겨줬던 '롤로 토마시'의 존재 여부입니다. 더들리 스미스(제임스 크롬웰)가 잭 빈센(케빈 스페이시)을 쏠 때 잭 빈센이 유언처럼 남기는 이 대사는 그전에 에드 엑슬리가 잭 빈센과 나누는 대화에서 아버지의 살인범으로 언급된 이름으로 아주 효율적으로 잭 빈센이 에드 엑슬리에게 범인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장치입니다. 이 영화의 각본이 <차이나타운> 이래 최고 각본으로 칭송받는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이 장면 설정의 스마트함 때문일 것입니다. 이는 원작 소설에는 없습니다. 원작에는 '롤로 토마시'라는 이름이 아예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대신 소설에서 잭 빈센은 탈옥수에 의해 거의 우발적으로 죽습니다. 더들리 스미스가 갱단의 두목이라는 것은 이 소설의 전작인 '빅 노웨어'에 이미 나오기 때문에 소설 'LA 컨피덴셜'에선 초반부터 더들리 스미스가 왜 갱단 두목이 됐는지 동기를 설명하는데 많은 분량을 할애합니다. 따라서 영화의 '롤로 토마시'는 순전히 시리즈가 아닌 이 영화만을 위한 아주 멋진 장치였던 셈입니다.


또 소설에서 엑슬리의 아버지는 영화에서와 달리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그대신 형이 살해당했습니다. 영화에서 엑슬리의 아버지는 소설 속 아버지와 형을 결합해 만든 인물인 셈입니다. 소설에서 더들리 스미스는 죽지 않고 살아남아 다음 편인 '화이트 재즈'에까지 등장합니다.



3. 커티스 핸슨은 촬영에 들어가기 전 작은 영화제를 열었다


배우들과 스태프를 모아 놓고 자신이 영감 받은 영화들을 상영하는 작은 영화제를 여는 이유는 그들에게 레퍼런스를 던져주기 위함입니다. 감독이 생각하는 바를 툭 던져 놓음으로서 각자 맡은 역할을 할 때 참고하라는 것입니다. 마틴 스콜세지와 크리스토퍼 놀란도 이렇게 합니다. 당시 상영한 영화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빈센트 미넬리의 <The Bad and the Beautiful> <Some Came Running>, 니콜라스 레이의 <In a Lonely Place>, 돈 시겔의 <The Lineup> <Private Hell 36>, 로버트 알드리치의 <Kiss Me Deadly>, 더글러스 서크의 <The Tarnished Angels>, 스탠리 큐브릭의 <The Killing> 등입니다. 그 인연을 강조하기라도 하듯 영화 속에 <The Bad and the Beautiful>을 상영중인 극장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4. 1950년대의 장면을 대부분 LA 시내에서 찍었다


무려 40년 전이 배경이지만 LA 시내에 당시의 건물들이 많이 남아있었고, 예산이 적었기에 대부분의 장면을 로케이션으로 찍었습니다. 마지막 장면의 빅토리 모텔만 세트 촬영이었습니다. 영화 속 경찰 본부로 등장하는 곳은 영화 <드라그넷>에서도 경찰 본부로 등장합니다.



5. TV 시리즈 속편이 만들어질 뻔했다


뉴 리젠시는 영화를 만들기 전부터 이 소설을 미니시리즈로 만들고 싶어했습니다. 마침내 2000년 TV 시리즈의 파일럿이 공개됐는데요. 주인공은 잭 빈센 역을 맡은 키퍼 서덜랜드였습니다. 영화에서 실패한 '원톱'이 TV에서 부활한 것이죠. 조쉬 홉킨스가 버드 화이트 역, 데이빗 콘래드가 에드 엑슬리 역, 프룻 테일러 빈스가 시드 허드젠스 역, 멜리사 조지가 린 브래큰 역, 톰 노위키가 더들리 스미스 역, 에릭 로버츠가 피어스 팻챗 역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TV 시리즈는 최악이었습니다. 캐스팅부터 배역에 맞지 않았고 플롯은 전형적인 경찰 액션에 불과했습다. 결국 파일럿에 그쳤을 뿐 정식 TV 시리즈로는 제작되지 못했죠.


마지막으로 <LA 컨피덴셜>과 함께 제임스 엘로이의 'LA 4부작'을 이루고 있는 나머지 세 편의 영화화 상황을 살펴볼까요? 형만한 아우 없다고 아쉽게도 나머지 세 편의 영화화는 그다지 신통치 않습니다. 첫 번째 소설 <블랙 달리아>는 2006년 브라이언 드 팔마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최악의 평가를 받았고, <화이트 재즈>는 <더 그레이>의 조 캐너한 감독이 준비했지만 무기한 보류 상태입니다. 조지 클루니가 주연을 맡기로 했다가 하차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습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더들리 스미스의 극중 이름을 바꾸기로 하고 (<LA 컨피덴셜>에서 그가 죽었으니까) 커티스 핸슨과 브라이언 헬겔렌드도 각색에 참여하기로 했지만 이후 커티스 핸슨이 심장 수술을 받는 등 건강이 악화돼 현재 진행 상황은 알 수 없는 상태입니다. 마지막 <빅 노웨어>는 <아이 앰 러브>의 이탈리아 감독 루카 구아다니노가 각색중입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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