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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 제프리 러시, 짐 스터게스, 실비아 호에크스 주연의 <베스트 오퍼>는 2014년 6월 개봉작입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처럼 노년의 남자가 주인공이 되어 미스터리한 사건에 빨려들어가는 클래시컬한 느낌의 영화를 찾으시는 분들께 강력 추천합니다. 올해 58세인 주세페 토르나토레는 32세에 만든 <시네마 천국>(1988) 이후 <말레나>(2000) <언노운 우먼>(2006) 등 드문드문 놀라운 작품을 발표하는데 <베스트 오퍼>(2013) 역시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기억해야 할 작품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인 버질 올드만(제프리 러시)은 미술품 경매사입니다. 어린시절 고아로 자라 미술품 감별 재능을 발견한 뒤 최고의 경매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가 대학원에서 논문을 쓴 주제는 자크 드 보캉송의 '오토매타'입니다. 보캉송의 로봇은 영화의 미스터리 구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처럼 보이다가 결국엔 맥거핀에 그치고 마는데 이 보캉송이라는 인물은 자료를 찾아볼수록 흥미진진합니다.


자크 드 보캉송은 18세기 프랑스의 발명가로 자동으로 움직이는 나무로봇을 만들었습니다. 무려 18세기에 로봇을 발명했다니 믿기지 않는데요. 영화 속에 재현된 보캉송의 로봇은 영화 <휴고>에 등장했던 그림 그려주는 로봇을 닮았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현재까지 남아 있는 보캉송의 작품은 하나도 없기 때문에 영화 속 로봇이 얼마나 사실적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보캉송의 작품 중 탬버린 치는 사람, 소화하는 오리 등이 걸작으로 꼽힙니다. 소화하는 오리는 빵을 섭취해서 소화시킬 수 있었다고 하는군요. 그는 1782년 죽기 전에 모든 작품을 루이 16세에게 헌정했는데 1789년 프랑스혁명이 발발하면서 성난 시위대들이 보캉송의 오토매타들을 부수어 버렸다고 합니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 봅시다. 보캉송을 흠모한다는 것과 함께 버질에게 또하나의 특징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여자를 사귀어본 적 없다는 것입니다. 어린시절부터 가족이 없었기에 대인관계에 서먹했던 그에게 여자는 대상화된 물적 존재입니다. 감정을 교류하는 일에는 서투른 대신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미술작품 중 여인의 초상화만 따로 모아 컬렉션을 만들었습니다. 그의 집에는 비밀 공간이 있는데 그곳에는 수많은 여인의 초상화들이 전시돼 있습니다. 이 그림들은 그가 판매자에게 모두 위조품이라고 속여 저가에 구입한 것들입니다. 이를 위해 그는 화가가 되고 싶던 친구 빌리(도날드 서덜랜드)와 짜고 경매에서 그림을 낙찰받습니다.


버질 올드만의 컬렉션에 포함된 여인의 초상화는 면면이 화려합니다. 페테루스 크리스투스의 '어린 소녀의 초상', 윌리엄 아돌프 부그로의 '비너스의 탄생', 보카치오 보카치노의 '집시소녀', 알브레히트 뒤러의 '엘스베트 투허의 초상', 라파엘의 '라 포르나리나',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잔 사마리의 초상', 티티안, 브론치노, 모딜리아니, 얀스키 등입니다. 작품들이 빼곡이 걸려 있는 방은 버질이 평생 이룬 성취감을 그대로 대변해줍니다. 그는 가족도 친구도 없이 외로운 남자이지만 이 방은 그의 존재와 이력을 증명해주는 공간이기에 그는 방 안에 가만히 앉아 그림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을 느낍니다.



어느날 버질에게 의뢰인이 전화를 걸어옵니다. 부모가 죽고 고아가 된 27세 여자 클레어(실비아 호에크스)입니다. 그녀는 저택의 가구들을 경매를 통해 처분하려 합니다. 아버지가 유언으로 버질 올드만에게 맡기라고 말했다면서 감정과 경매를 맡아달라고 제안합니다. 버질은 그녀의 저택으로 찾아가지만 그녀를 만나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그녀의 집사가 이상한 말을 합니다. 자신도 그녀의 얼굴을 본 적은 한 번도 없다는 것입니다. 버질은 클레어가 숨어 있는 방으로 연결되는 벽 앞에서 그녀와 대화를 나눕니다. 클레어는 광장공포증을 앓고 있는데 지난 11년 간 방 안에 숨어서 한 번도 나온 적이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이제부터 이야기는 흥미진진해집니다. 버질은 숨어서 사는 클레어에게 동질감을 느낍니다. 외로운 사람은 다른 외로운 사람을 한눈에 알아본다고 하던가요. 버질은 몰래 숨어서 그녀의 외모를 보게 되는데 지금까지 자신이 모은 명화들에서 막 튀어나온 것 같은 여인의 모습에 놀라 생애 처음으로 사랑에 빠집니다. 온생애를 걸쳐 예술품만을 쫓던 그가 마침내 그토록 찾아헤매던 명작 속의 여자를 만난 것입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피그말리온이 자신이 만든 여자 조각과 사랑에 빠진 것처럼 버질 역시 자신만의 갈라테이아를 찾았습니다. 그는 평생 철두철미하게 지켜오던 미술품 경매 일도 잊은 채 그녀에게 집착합니다. 그녀가 어떤 비밀이 숨기고 있는지 모르는 채 말이죠.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후반부 줄거리는 생략하겠습니다. 영화의 분위기를 글로는 다 표현할 수 없으니 필히 영화를 보시기 바랍니다.)



영화의 시나리오는 촘촘하게 짜여져 있습니다. 끝나기 10분 전까지도 도대체 보캉송의 로봇과 술집에 앉아 있는 천재 소녀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마침내 로봇과 천재 소녀가 숨겨둔 역할을 하기 시작할 때 놀라운 반전에 뒤통수가 얼얼해집니다. 반전이 뛰어난 영화가 으레 그렇듯 끝나고 나면 지금까지의 스토리를 돌아보게 되는데 로버트(짐 스터게스)의 행동, 빌리의 선물, 사라(리야 케베데)의 대사 등이 갑자기 다른 의미로 해석되면서 톱니바퀴가 들어맞기 시작합니다. "모든 위조품엔 진품의 미덕이 숨어 있다." 버질이 진짜를 가짜로 속여 사기를 칠 때마다 했던 이 말 속에 반전의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영화는 유럽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대사가 영어로 되어 있어 굳이 어느 나라인지 특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촬영은 로마, 밀라노, 파르마, 빈, 프라하 등에서 했다고 하는군요. 그중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프라하의 시계탑 광장과 'Night & Day' 레스토랑은 이 감쪽같은 역-케이퍼 무비(집단 계획범죄에 당하는 영화)를 한 단계 더 끌어올려준 멋진 마무리입니다. 영화 초반, 생일까지 아직 1시간 30분 가량이 남았다며 식당에서 제공해준 디저트를 먹지 않던 남자가 마지막 장면에선 올지 안올지 알 수 없는 클레어의 자리를 비워 놓고 식당에 앉아 있습니다. 그가 앉은 테이블 주위로 톱니바퀴 모양의 시계는 계속 돌아갑니다. 평생 오래된 예술작품들을 감별하며 살아와 시간이 곧 돈이었던 버질에게 지금 흐르는 시간은 이제껏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 했던 시간일 것이기에 이 장면의 여운은 오래 남을 것 같습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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