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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계약



# 한국서 작품을 만들 기회를 찾지 못하던 A 감독은 요즘 한국에 있는 시간보다 중국 베이징에 머무는 시간이 더 많다. 한중합작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서다. A 감독은 한국에서 작업할 때보다 더 많은 진행비를 받고 작업할 수 있고 마음이 맞는 한국인으로 스탭을 꾸릴 수도 있어 작업이 한결 수월하다며 웃었다.


# 중국에서 영화를 만들고 돌아온 장윤현, 오기환, 안병기 감독은 최근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후배들을 위해 경험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들은 “중국 영화계가 능력 뛰어난 한국 영화인들을 원하고 있다”며 “장비 수준도 좋고 통역도 원활해 촬영하는 데 불편함이 없었다”고 말했다.



한국 영화계에 늦가을 황사가 불고 있다. 막강한 자본력을 갖춘 중국 영화사들은 숙련된 한국 영화인을 모셔간다. 흥행에 성공한 영화에 참여한 인재들 중 한동안 작품이 뜸하다고 생각되면 십중팔구 중국에서 작업중이다. 한류스타가 된 배우들 뿐만 아니라 감독, 촬영감독, 미술감독, 무술팀, CG, 특수효과, 편집, 사운드팀 등 다양한 분야의 영화인들이 중국영화에 참여하고 있다.


최근 중국과의 교류가 부쩍 늘어난 데에는 지난 7월 시진핑 주석 방한 이후 체결된 영화공동제작협정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 협정은 한중합작영화를 중국 내에서 자국영화로 인정하게 해 외화수입 제한 없이 중국에서 자유롭게 상영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을 골자로 한다.


중국이 이처럼 한국에 문호를 개방한 배경에는 콘텐츠 산업을 키우려는 야심이 숨겨져 있다. 최근 몇 년 새 중국 영화시장에서 할리우드 영화의 점유율이 늘었는데 이를 반전시키기 위해 대규모 해외 자본과 기술, 인력을 유입시켜 자국 영화산업을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중국이 WTO 가입 당시 유예한 쿼터제가 폐지되기에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다. 중국은 올들어 한국을 비롯해 영국(4월), 이탈리아(6월)와 영화공동제작협정을 체결했다. 마침 한국은 2006년 스크린쿼터 축소에도 불구하고 영화산업이 발전한 역사가 있어 중국으로서는 그 경쟁력의 비밀이 궁금하기도 했을 것이다.


중국의 연간 영화제작 편수는 600~800편 가량으로 많지만 영화의 수익률은 10%에 못 미칠 정도로 좋지 않다. 양적으로는 늘고 있지만 창의력과 감각을 지닌 인재를 배출하기엔 검열 등 장애물이 많다. 실제로 중국 영화계는 펑샤오강, 장이머우 등 스타 감독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편이다. 홍콩 반환 이후엔 홍콩 출신 스타 감독인 쉬커, 우위선, 청룽, 저우싱츠, 두치펑, 천커신 등이 본토로 진출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고 그 틈새를 채워줄 대상으로 한국 영화인들에게 러브콜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평안도


작년 오기환 감독이 한중합작영화 <이별계약>으로 중국서 제작비 대비 10배인 370억원을 벌어들이며 주목받은 것을 시작으로 허진호 감독이 장동건, 장쯔이 주연의 <위험한 관계>를 만들었고, 김용화 감독이 <미스터 고>를 완성했다. 공포영화 전문 안병기 감독은 <필선> 시리즈로 중국서 감독한류를 이끌고 있다.


최근엔 장윤현 감독이 <평안도>를, 김태균 감독이 지진희와 <두 도시 이야기>를 작업중이고, 이재한 감독은 송승헌을 주연으로 <제3의 사랑>을 찍고 있다. 또 허인무 감독이 유인나와 함께 <웨딩 바이블>의 촬영을 마쳤고, 조진규 감독은 주원과 <하유교목, 아망천당>을 준비중이다.


한국영화의 중국 내 리메이크도 활발해서 <그 해 여름>의 조근식 감독은 <엽기적인 그녀>의 속편인 <엽기적인 두번째 그녀>를 차태현, 빅토리아 주연으로 기획중이고, 오리지널 <엽기적인 그녀>의 곽재용 감독은 중국 톱 배우 저우쉰과 <내 여자친구는 조기갱년기>의 촬영을 끝내고 후반작업중이다. 한국서 올해 초 흥행에 성공한 <수상한 그녀> 역시 <20세여 다시 한 번>이라는 제목으로 중국서 리메이크된다.


배우로서는 송혜교, 지진희, 권상우, 비, 장나라, 추자현 등의 행보가 눈에 띈다. 송혜교는 우위선 감독의 <태평륜>과 이능정 감독의 <나는 여왕이다>에서 주연을 맡았고, 지진희는 최시원과 함께 출연한 홍콩영화 <헬리오스>에 이어 <두 도시 이야기>를 촬영하고 있다. 권상우는 중국 영화 <적과의 허니문>을 차기작으로 선택했고, 비(정지훈)는 <노수홍안>으로 재기를 노리고 있다. 한국보다 중국에서 인기가 더 많은 장나라는 <플라잉 위드 유>에서 천방지축 아가씨 역을 맡았으며, 2011년 본격적으로 중국 TV 드라마에 진출해 대륙 스타가 된 추자현은 영화 <전성통집>으로 스크린에서도 활약을 예고했다.


태평륜


중국영화계는 한국 인력을 빨아들이는데 만족하지 않고 최근엔 한국 영화계에 직접 자본 투자까지 하고 있다. 작년 돌풍을 일으킨 배급사 NEW가 중국의 엔터테인먼트사 화책미디어로부터 535억 원의 투자를 받은 것이 대표적이다. 화책미디어는 178만 주를 매입해 지분 15%를 가진 2대 주주가 됐는데 이는 소후닷컴이 배용준과 김수현의 매니지먼트사 키이스트에 투자한 150억원의 3배가 넘는, 역대 중국의 한국 엔터테인먼트 투자 최대 규모다.


또 올해 부산국제영화제가 거의 중국인들을 위한 잔치가 된 것도 차이나머니의 위력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내년 4월부터 사전에 허가 받지 않은 해외드라마의 인터넷 방영을 금지하겠다는 중국 광전총국의 규제 이후 중국 콘텐츠 업계는 한국드라마보다 한국영화쪽에 더 집중하는 모양새다.


특히 중국의 대형 온라인 엔터테인먼트 기업인 아이치이와 유쿠투더우는 부산에서 큰손 노릇을 톡톡히 했다.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의 온라인 독점 방영권을 사들여 엄청난 재미를 본 아이치이는 부산에서 아시아필름마켓 개막식 파티를 전액 후원하는 등 배포를 과시했고 유쿠투더우는 이에 질세라 폐막식을 후원했다. 두 회사는 각각 따로 ‘한-중 영화의 밤’ 행사를 열면서 신경전을 펼치기도 했다.


‘중국판 유튜브’라고 불리는 유쿠투더우는 회장이 직접 내한해 부산국제영화제와 양해각서를 체결하며 2015년부터 3년 동안 아시아 신인 감독 4명과 거장 4명을 선정해 단편영화 제작비를 지원하기로 했다. 부산국제영화제의 부대 행사인 아시아프로젝트마켓(APM)의 경우 당초 자금난 때문에 상 2개를 취소하려 했으나 유쿠투더우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행사를 열 수 있었다.


엽기적인 두번째 그녀


물론 중국 영화계가 한국에게만 손을 뻗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할리우드와도 점점 거리가 가까워져 작년 <아이언맨 3>의 중국버전을 따로 만든 수준을 넘어서 <쿵푸팬더 3> <티벳 패스워드>의 경우 제작과 파생상품의 마케팅까지 함께 하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또 미국 최대의 연예 매니지먼트사 CAA가 베이징에 자회사를 설립했고, 파라마운트, 폭스, 드림웍스 등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사들 역시 일찌감치 중국에 사무소를 개설해둔 상태다.


중국 영화시장은 점점 세계 영화인들의 각축장으로 변해가고 있다. 미국은 물론 한국을 비롯한 공동제작협정 체결 8개국, 태국, 인도, 일본, 러시아 등이 현재 중국과 합작영화 제작을 진행중이다. 시장 규모에서 2012년 일본을 추월한 중국은 할리우드에 이어 세계 2위 영화시장이다. 2013년엔 극장 수입 217억 위안(3조7천억원)을 기록했는데 이는 한국(1조5천억원)의 2.5배 수준이다.


자본력이 풍부하다보니 요즘 중국 영화사들은 한국 기업들과의 공동 투자는 되레 꺼리는 분위기다. 정산과정이 복잡해지는 게 싫다는 것이 감춰진 이유다. 돈은 대줄테니 창작능력 갖춘 인재만 오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지금 황금의 땅을 찾아 중국으로 떠난 한국 영화인들이 결국 노하우만 빼앗기고 돌아오지 않을지 걱정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를 헐값에 넘겨 결국 '왕서방' 배만 불려준 결과를 영화계가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한국영화계가 중국에 '접수'되지 않을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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