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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일상은 분리될 수 없고 분리되서도 안 된다. 과학은 진실, 경험, 그리고 삶에 바탕을 두고 설명해준다.

- 로잘린드 프랭클린 (1920~1958)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불운한 시대를 살았던 여성 과학자입니다. 그녀는 1920년 7월 25일 영국 런던 노팅힐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대를 졸업하고 생물물리학자가 되어 X선 결정학을 비롯해 DNA, 바이러스, 석탄, 흑연의 구조를 밝히는 데 기여했습니다. 이렇게 화려한 업적을 이룬 그녀는 왜 불행했을까요? 그녀의 업적이 당대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 동료 과학자들은 그녀의 발견을 가로채기까지 했습니다. DNA 이중나선 구조의 발견을 비롯해 수많은 뛰어난 업적을 이루었음에도 우리에게 그녀의 이름이 익숙하지 않은 이유입니다. 그녀는 1958년 37세의 젊은 나이에 런던 첼시에서 사망했습니다. 숱한 X선 촬영으로 방사선에 노출돼 난소암을 얻은 것이 사망의 원인입니다.


20세기 인류의 가장 큰 성과로 불리는 DNA 이중나선 구조의 발견은 제임스 왓슨, 프랜시스 크릭, 모리스 월킨스 세 사람이 노벨 생리의학상을 공동 수상한 업적이지만 이 명단에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이름은 보이지 않습니다. 프랭클린은 DNA 구조 연구를 위해 1953년 왓슨, 크릭과 함께 연구를 했습니다. 그녀의 데이터가 실제로 왓슨과 크릭의 논문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왓슨과 크릭은 그녀의 이름과 기여를 제대로 명기하지 않았습니다.



DNA의 구조를 연구할 때 왓슨과 크릭은 풋내기 과학자였습니다. 왓슨은 미국 인디애나 대학에서 동물학 박사 학위를 받은 지 1년 된 젊은이였고 크릭은 12살 더 많았지만 런던 유니버시티 칼리지 출신으로 내세울 경력이 없었습니다. 이들에 비해 영국 킹스 칼리지의 월킨스와 프랭클린은 좀 더 진전된 연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월킨스와 프랭클린이 사이가 좋지 않다는 데 있었습니다. 월킨스는 프랭클린을 따돌리고 왓슨, 크릭과 더 잘 어울렸습니다. 이 과정에서 월킨스는 프랭클린이 찍은 DNA X선 사진을 왓슨과 크릭에게 제공했고 프랭클린이 의학연구위원회에 제출한 비공개 보고서를 은밀하게 입수하기까지 했습니다. 월킨스는 프랭클린의 허락도 없이 프랭클린이 찍은 DNA X선 사진을 분석했고 이를 바탕으로 왓슨과 크릭이 곧 나선형 모형을 만들었습니다. 1953년 왓슨이 [네이처]를 통해 DNA 이중나선을 발표했고 1963년 세 사람이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1958년 프랭클린이 죽은 지 5년 후의 일이지요.


그녀가 살았던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입니다. 여권 운동이 활발하긴 했지만 그 당시만 해도 여성이 과학자로서 활동하기 쉽지 않은 시대였죠. 대학은 여자에게 학위를 주지 않았고 여교수는 식당 출입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이런 환경 속에서도 밤을 지새우며 연구에 매진했습니다. 그녀는 다른 학자들과의 접촉과 토론 없이 묵묵히 혼자 연구하던 스타일의 과학자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과연 이런 성격이 그녀가 따돌림당한 유일한 이유였을까요? 역사는 승자들만 기록하고 DNA 나선구조의 발견은 노벨상 수상자들의 업적으로 남겠지만 그 화려한 업적의 뒤에 로잘린드 프랭클린이라는 여성 과학자가 있었다는 것을 누군가는 기억해줘야겠습니다.


다행인 것은 최근 그녀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 포브스지는 '최근 50년간 세계를 바꾼 15인' 중 한 명으로 그녀를 선정했습니다. 또 미국의 한 의과대학은 그녀의 이름을 따 '로잘린드 프랭클린 의과대학'으로 명명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구글 두들에서 로잘린드 프랭클린이라는 이름을 기린 것도 의미 있는 일이겠네요.



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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