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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킥복싱 벨기에 챔피언인 알리(마티아스 쇼에나에츠). 코치가 죽은 뒤 그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5살 난 아들을 데리고 누나와 함께 살기 위해 프랑스로 온다. 나이트클럽의 기도로 취직한 그는 출근 첫날 클럽에서 폭행사건에 휘말린 여자 스테파니(마리옹 꼬띠아르)를 도와준다. 돌고래 조련사인 여자와 파이터였던 경비원 남자의 첫 만남. 예사롭지 않은 직업을 가진 두 사람은 각자의 인생에서 바닥을 치던 중이었다.


다시 만날 일 없을 것 같던 두 사람의 인연은 그러나 스테파니가 돌고래 조련 도중 사고를 당해 두 다리를 잃은 뒤 계속된다. 절망에 빠진 스테파니는 자신을 도와준 적 있던 알리에게 전화한다. 그녀에게 알리는 자신이 두 다리가 없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게 해주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에게 수영 가자고 제안한다. 남의 시선을 의식해 밖으로 나가는 것도 꺼렸던 스테파니는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바다에서 다시 수영을 즐기면서 점점 생기를 찾아간다. 그렇게 두 사람의 인생에도 다시 햇살이 내리쬐기 시작한다.


이야기는 요약하기 쉬울 정도로 단순하다. 남자는 다시 파이터가 되고 여자는 의족을 하고 자신감을 찾아간다. 두 사람은 우정인지 사랑인지 모를 관계를 쌓아간다. 파이터인 남자와 장애인 여자의 사랑이라는 점에서 한국영화 <오직 그대만>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극적인 사건으로 두 사람이 드라마틱하게 다시 만나는 <오직 그대만>이 신파처럼 보였다면 <러스트 앤 본>은 좀 더 건조하고 현실적인 영화다. 마치 비슷한 노년의 사랑을 그렸지만 만듦새와 분위기는 전혀 다른 추창민 감독의 한국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와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유럽영화 <아무르>의 차이와 비슷하다고 할까?


이 영화에는 한 사람의 희생을 강요하는 간지러운 숭고함 따위는 없다. 즉, 여자의 수술비를 마련하려고 싸우는 남자 이야기는 아니다. 알리는 스스로를 위해 싸운다. 싸우는 게 좋아서 싸운다. 마치 스테파니가 돌고래가 좋아서 돌고래 조련을 했던 것처럼. 이 영화에서 싸움은 ‘교감’이다. 남자가 싸우면 여자는 그 남자를 보며 상처를 치유할 용기를 얻는다. 남자는 그 여자가 응원해주면 더 신이 나서 싸운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그려진 뒷골목에서 돈을 걸고 싸우는 장면은 결코 비열하거나 추잡하게 그려지고 있지 않다. 누가 더 센가를 가리는 열정 가득한 공간으로서 순수함까지 느껴지는 싸움이다. 세상과의 싸움, 자신과의 싸움, 과거와의 싸움, 열등감과의 싸움, 그리고 온갖 남루한 것들을 잊게 만드는 싸움 그 자체로의 싸움이다.



알리를 만나면서 스테파니는 점점 자신감을 회복해간다. 주눅 들어 있던 그녀는 다리가 없어도 알리와 섹스하고, 허벅지에 문신을 새기고, 클럽에도 가고, 또 알리의 매니저까지 된다. 자유분방하게 여자를 만나던 알리는 스테파니가 아들과 함께 있을 때 가족이라는 것을 느낀다. 이렇게 이 영화 속 사랑은 두 사람이 서로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고 서로 조금씩 보완해가는 사랑이다. 점점 강인해지는 스테파니를 연기한 마리옹 꼬띠아르는 고전적이면서 섹시한 이미지에 어느 영화에서건 자신만의 아우라를 보여주는 배우다. 마티아스 쇼에나에츠는 짧은 머리에 어리숙하면서도 강렬한 인상이 알리 역에 제격이다.


<예언자>로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던 자크 오디아르 감독은 <내 마음을 읽어봐>의 청각장애인 여비서에 이어 이번에도 여주인공을 장애인으로 그렸다. <그들이 어떻게 추락하는지 보라>로 센세이셔널한 데뷔를 한 이후 <위선적 영웅> <내 심장이 건너뛴 박동> 등 만드는 작품마다 뛰어난 완성도를 보여준 그는 스스로 각본을 쓰며 3~4년에 한 편의 작품을 만드는데 프랑수아 오종과 함께 다음 영화가 기다려지는 프랑스 감독이다.


영화의 첫 장면은 한 아이의 얼굴과 물이 차오르는 영상 등 여러 이미지의 아름다운 합성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그 이미지가 어떤 맥락에서 나온 장면이었는지는 영화의 마지막에 확인된다. 처음엔 그저 아름다워 보였지만 사실 그것은 그들에게 가장 악몽 같던 순간이었다. 제3자에겐 아름다움 같은 추상적인 의미로밖에 기억되지 않을지라도 세상엔 실체를 알고 나면 당사자들에겐 거대한 의미를 지닌 사건들이 있다. 우연히 누군가를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되는 것도 결국 그런 경험과 비슷할 것이다. 섣불리 깊은 상처를 치유하려 하는 것은 위험하다. 단지 함께 교감할 수 있을 뿐이다.



영화 중반부에 스테파니가 의족을 하고 예전에 일하던 직장을 찾아가는 장면이 있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자신의 두 다리를 잃게 만들었던 그 돌고래를 다시 만난다. 그곳에서 돌고래를 만나 손으로 어루만지는 장면은 <그랑블루>에 이어 또 하나의 멋진 돌고래와의 교감 장면이다. 이 장면 하나 만으로도 이 영화는 볼 가치가 있다.


상영시간 120분. 5월 2일 개봉. ★★★★☆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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