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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튤립 피버’의 주인공 소피아는 늙은 남편과 사는 삶이 만족스럽지 않다. 그녀는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찾아온 젊은 화가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얼굴이 붉어진다. 자상한 남편은 젊은 화가에게 내 아내가 아름답지 않냐며 속편한 소리를 늘어놓는다. 그럴 때마다 소피아는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조마조마하다.


영화 '튤립 피버'


둘만 남게 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소피아와 젊은 화가는 서로의 육체를 탐한다. 그날 이후 소피아는 남편에게 거짓말을 하고 화가의 집을 찾는다. 일탈은 곧 해방구다. 소피아는 그와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자신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집에 돌아와 갖는 남편과의 잠자리는 치욕스러워 견딜 수 없다.


물은 100도씨가 되어야 끓는다. 99도씨까지는 아무리 뜨거워져도 끓지 않는다. 1도 차이지만 99도씨와 100도씨의 차이는 물의 형태를 좌우할 만큼 크다.


소피아에게는 계기가 필요했다. 이미 99도씨에 이르렀던 그녀에겐 1도 더 올려줄 명분이 필요했다. 그 1도는 곧 남편과 헤어질 이유가 되어줄 것이었다. 그녀는 돈을 받고 늙은 남편에게 팔려왔다. 비천한 신세이긴 하나 그녀의 삶은 지루할지언정 결코 비천한 것은 아니었다. 남편은 소피아를 끔찍이 아꼈다. 집안일은 하녀가 다 했으므로 소피아로선 남편의 트로피 아내로 만족하며 살면 그만이었다. 누가 봐도 소피아에겐 불만이 없어야 했다. 소피아가 빠져나갈 방법은 없어 보였다. 1도는 이토록 올리기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99도에 이른 자는 쉽게 포기할 수 없다. 이것이 다시 못 올 기회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면 그녀는 기어이 자기 몸이라도 불태워 1도를 찾아낼 것이다.


마침 하녀가 임신한다. 하녀를 임신시킨 남자는 떠나버리고 없다. 하녀는 집에서 쫓겨나게 될 위기에 처한다. 그러자 소피아는 꾀를 낸다. 남편에게 하녀가 아닌 자신이 임신한 것으로 속이고 출산 당일 산모가 죽는 것으로 하면 자신은 남편을 떠나 제2의 인생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잃을 게 없는 하녀 역시 이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다.


위험해 보이는 도박은 출산 당일까지는 일단 성공적이다. 의사까지 매수해 남편은 소피아가 아이를 낳는 것으로 감쪽같이 속고 있다. 이제 하녀가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남편에게 건네주고, 자신은 아이를 낳다가 죽은 것으로 하면 이 지긋지긋한 집에서 해방이다. 소피아는 젊은 화가와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꿈에 부풀어 있다.


영화 '튤립 피버'


완벽해 보이는 둑은 작은 구멍 하나에 무너진다. 나쁜 계략이 계속될 때 가장 약한 고리는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있다. 죄책감과 양심이라는 감정이 스스로를 괴롭힌다. 딱 거기까지만이어야 했다. 거기서 멈추거나 혹은 얼른 달아났어야 했다.


소피아는 남편의 동태를 살피다가 밖에서 초조하게 출산을 기다리고 있던 남편이 의사에게 하는 말을 엿듣고 만다.

“만약 아내와 아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저는 아내를 선택할 겁니다. 아이는 보내도 괜찮아요.”


이 말을 엿듣고 소피아는 머리를 한 방 얻어맞은 것 같다. 대체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저 남자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나만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소피아의 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린다.


영화 '튤립 피버'


소피아는 갈등에 사로잡힌다. 대체 어찌해야 하나. 계획대로 죽은 것으로 위장해 집을 빠져나가 젊은 화가를 만나야 하나. 하지만 나밖에 모르는 저 바보같은 늙은 남자가 받을 상처는 누가 위로해준단 말인가. 그렇다고 여기서 계획을 멈추면 이 방에 있는 사람들, 나의 공범들인 하녀와 의사와 산파가 난처해진다. 이제와서 없던 일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하녀는 딸을 낳고, 의사는 그 딸을 남편에게 건네준다. 의사는 남편에게 산모가 결국 깨어나지 못했다고 말한다. 울고불며 아내에게 작별인사라도 하게 해달라는 남편을 의사가 뜯어말린다. 관 속에 누워 있던 소피아의 눈에는 이미 눈물이 흥건하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 되었다. 작전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소피아는 지긋지긋한 남편의 집을 빠져나왔다. 모두들 그녀가 죽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소피아의 마음은 안정되지 않는다. 그녀의 마음은 이미 황폐화되었고 심하게 헝크러져 있다. 그녀는 젊은 화가가 아니라 늙은 남편에게 돌아가려 한다. 공범자들이 뜯어말리지만 그녀는 뿌리치고 집으로 향한다. 지금쯤 남편은 내가 죽은 줄 알고 얼마나 괴로워하고 있을까 생각하면 미안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다.


하지만 집 밖에서 창문 너머로 남편이 갓태어난 아이의 볼에 입을 맞추고 있는 것을 본 순간 소피아는 다시는 이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모든 것은 이미 끝나버렸다. 활은 이미 활시위를 떠났고, 총은 발사되었다. 그에게 그녀는 이미 죽은 여자다.


영화 '튤립 피버'


어디로도 갈 수 없게 된 소피아는 방황한다. 카메라는 높은 곳에서 갈팡질팡하는 그녀의 모습을 담는다. 소피아는 늙은 남편으로부터 물리적으로는 벗어났지만 마음은 다시 감금당했다. 그녀는 어디든 갈 수 있지만 또 어디로도 갈 수 없다. 어디에 있든 죄책감이 발목을 잡을 것이다.


그녀는 암스텔 강 다리를 걷다가 순간적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먼저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강물로 집어던진다. 그리고 몸을 던지려는데 차마 발이 안 떨어진다. 자살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포기하고 다시 정처없이 걷는다. 그녀는 이미 장례식을 치렀기에 세상에 그녀가 누구인지 증명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시간 만나기로 했던 젊은 화가는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는 소피아를 기다리고 있다. 그는 소피아를 찾아 헤매다가 강물에 떠내려오는 그녀의 파란색 외투를 발견한다. 그녀가 자살했다고 생각한 그는 파란색 외투를 부여잡고 오열한다.


영화 '세가지 색: 화이트'


위장 죽음은 영화 ‘세 가지 색: 화이트’에도 나온다. 이 영화에선 남편이 자살을 위장한다. 폴란드에서 미용사로 일하는 카롤은 아내 도미니크에게 성적 욕구불만을 이유로 이혼당한 뒤 돈을 벌기 위해 일에 몰두한다. 아내에 대한 복수심이 극에 달한 어느날 그는 유언장을 남기고 거짓으로 자살한다.


카롤의 가족은 그의 시신이 없는 상태에서 장례식을 치른다. 카롤은 자신의 장례식을 먼발치에서 바라본다. 도미니크가 장례식에 올까. 조마조마하던 그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미소짓는다. 도미니크가 자신을 향해 울어주기를 바란다. 이런 극단적인 방법으로라도 그는 자신이 그녀에게 소중한 존재였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다. 그리고 그의 기대대로 도미니크는 미안한 마음에 눈물을 흘린다.


영화 '세가지 색: 화이트'


사랑하는 이에게 버림받은 자들 중엔 종종 극단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려 하는 이들이 있다. “너 없는 삶이 의미가 없으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는 식으로 상대방을 협박한다. 미안한 마음이 들게 해 그 사람의 마음을 돌리려는 것이다. 과연 이러한 방식이 성공을 거두는 경우가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는 명백한 감정폭력이다. 꼭 물리적 위해를 가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행복을 위해 상대방에게 죄책감을 갖게 하는 것은 정신적인 폭력이다. 사랑과 증오와 폭력은 때론 이토록 경계가 모호하다.


말로 겁박하는 것도 모자라 아예 거짓으로 죽어버린 카롤은 도미니크에게 씻을 수 없는 정신적 상처를 남겼다. 도미니크는 이제 자신이 전남편을 죽게 했다는 죄책감을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한다. 도미니크가 돌아서지 않는다면 카롤의 행위는 두 사람 모두에게 최악의 결과를 낳을 뿐이다.



영화는 남자 감독의 판타지가 가미돼 결국 카롤과 도미니크가 뜨거운 밤을 보내며 카롤의 작전이 성공하는 것으로 끝난다. 세상에서 가장 지질한 남자의 해피엔딩이다(영화는 프랑스 국기의 세 가지 요소 중 ‘평등’을 주제로 하고 있는데 여기서 평등이란 헤어지기 전의 가난뱅이 카롤와 헤어진 후의 지질한 카롤이 평등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사랑이 이처럼 의도대로 이루어진다면, 그 사람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 이토록 쉽다면, 그많은 슬픈 발라드나 가슴 절절한 세레나데는 울려퍼지지 않았으리라. 사랑에 관한 수많은 작품을 남긴 모파상은 한 여자만을 사랑했지만 죽을 때까지 끝내 그 여자에게 선택받지 못했다. 평생 짝사랑만 했던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사람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사랑을 사랑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영화 '튤립 피버'


그래서 내 마음은 다시 소피아에게로 향한다. 카롤과 달리 소피아는 상대방에게 변화를 강요하지 않았다. 자기 자신을 죽임으로써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나려 했다. 사랑의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혀 마음이 시키는 대로 과감하게 결단한 여자, 결정적인 순간에 마음이 흔들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 여자, 애초에 무엇을 사랑했는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여자... 이 여자의 죄는 대체 무엇인가.


사랑에 빠진 것이 죄라면 그녀는 이미 죗값을 치르는 중이다. 그녀를 사랑했던 두 남자에게 동시에 그녀의 사망 소식을 전하게 된 것만큼 무거운 형벌이 또 어디 있을까. 그러나 너세니얼 호손이 ‘주홍글씨’를 집필하면서 주인공 헤스터에게 취한 태도처럼 ‘정열의 죄’는 독선보다 가볍다. 그것은 용서받을 수 있다. 용서받지 못할 죄는 오직 자신만이 정의라고 확신하는 독선과 오만뿐이다. 카롤의 감정폭력처럼 말이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짝사랑의 대부’ 모파상이 남긴 경구다. 응답받지 못한 사랑은 열배 더 강하다. 소피아는 죽지 않고 살아간다. 꾸역꾸역 시간이 흐른다. 영화는 기어이 6년 정도 시간이 흐른 후의 소피아를 보여준다. 그녀는 얼굴에 엷은 미소를 띄고 있다. 그녀가 있는 바로 그 성당에 자신이 온몸을 바쳐 사랑했던 젊은 화가도 와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를 모르고 있다. 이대로 영원히 모르는 편이 나을 것인가, 아니면 운명의 장난처럼 다시 만나야 할 것인가. 영화는 답을 주지 않고 끝난다. 사랑이 언제나 그랬듯이 말이다.


>> '튤립 피버' 광기의 시대, 사랑에 올인한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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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창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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