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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살은 기로에 서는 나이다. 지금 하는 일을 계속 하느냐, 접고 다른 길로 가느냐. 새 길을 찾기에는 다소 늦은 듯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늦은 것까지는 아닌 나이. 만년 고시생은 이 나이가 되면 고시 포기를 고민하기 시작하고, 오매불망 입봉만을 꿈꾸던 조감독은 이 나이부터 슬슬 영화가 아닌 다른 프로덕션을 기웃거리기 시작한다. 35세는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창조적인 인물들이 뛰어난 업적을 남기는 나이기도 하다. 에디슨은 35세에 100여개의 특허를 출원했고, 아인슈타인은 35세에 일반 상대성이론을 발표했다. 그러니까 35세는 잠재력이 폭발하는 나이이자 그 잠재력을 믿고 진로를 변경하는 결정적 시기이기도 하다.


©Youchang


여기 한 조연배우가 있다. 험궂은 인상의 그는 긴장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와 악수를 청한다. 인터뷰를 시작하는데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입술이 부르텄다며 계속 양해를 구한다. 아직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지금 41살인 그는 35살에 배우가 됐다. 그전까지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주로 영업직으로 일했다. 대학에서 러시아어를 전공한 그는 러시아 호텔을 돌아다니며 LCD TV를 팔았다. 나중에는 직장을 옮겨 대우조선해양 기획조정실에서 근무했다. 그렇게 그는 10년차 직장인으로 35살을 살고 있었다.



2011년 어느날 회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그는 TV에서 흘러가는 자막을 보게 된다. SBS에서 ‘기적의 오디션’이라는 프로그램의 참가자를 모집한다는 자막이었다. 어릴 때부터 배우가 되고 싶던 그는 뒤늦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다음날 바로 오디션에 접수해버린다. 그리고 이 행동이 그의 인생을 바꾼다.


오디션이 열리기 전 2주 동안 그는 <올드보이>의 최민식 연기를 보고 또 보며 그대로 연습했다. 마침내 오디션에서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른 채 연습한 연기를 했다. 결과는 합격. 그는 부산 최종 오디션 15명 중 한 명으로 선발돼 방송에 출연했다. 그때 그는 생각한다. 아, 어쩌면 배우가 내 인생이 될 수 있겠구나.


그때가 결혼한지 6개월 정도 됐을 때였다. 대기업 다니는 안정적인 직장인과 결혼한 아내는 갑자기 배우를 하겠다고 나선 남편을 어떻게 바라봤을까?


“아내는 털털한 성격이라서 배우가 되겠다고 했을 때 반대하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해보라고 응원해줬죠.”


부모님과 직장 동료, 친구들은 하나같이 반대했다. 직장이 아깝지 않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아내만큼은 응원군이 되어주었다. 과장 진급이 눈앞이었지만 그는 과감히 사표를 던졌다.


연봉 6천만원이 넘는 대기업 직원이 계약직 단역배우가 되자 가장 먼저 표가 나기 시작하는 것은 경제적 사정이었다. 당장 살림살이가 줄어들자 그는 아내에게 할 말이 없었다.


“그 미안함은 이루 말할 수 없죠. 나 때문에 피해를 입은 가족에게 미안해서 배우 생활이 아무리 힘들어도 마음을 다잡곤 합니다.”


©Youchang


배우 생활을 시작한 뒤 그는 50편이 넘는 단편영화에 출연하며 기본기를 갈고닦았다. 연기 경험이 없었기에 작품을 고르기보다는 어떤 배역이든 해보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러다가 드라마 <무신>에 단역으로 합류하면서 본격적인 연기자로서의 생활이 시작된다. 첫 영화는 <광해: 왕이 된 남자>로 죄인을 고문하는 나장 역이었다. 분량은 고작 1초. 하지만 그는 이 때의 떨림을 잊을 수 없다.


“흥분됐죠. 제가 이병헌 선배님 같은 대배우와 같은 화면에 나오다니요. 비록 화면에 가려서 그 1초도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제게는 뜻깊은 첫 작품입니다.”



이때 만난 이병헌을 그는 5년 뒤 <남한산성>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이때 재회를 그는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5년 전에 비교해서 용골대라는 배역은 꽤 비중이 크잖아요. 이병헌 선배님에게 5년 전 광해에서 함께 했다고 말씀드렸더니 기억을 못 하시더라고요. 그럴 수밖에요. 그때는 거의 엑스트라였으니까요."


5년 전 엑스트라였던 허성태를 신스틸러 조연배우로 각인시킨 작품은 <밀정>(2016)이었다. 그동안 <상의원> <하이힐> 등에서 단역을 전전하던 그는 <밀정>에서 송강호에게 뺨을 차지게 맞는 장면 하나로 일약 존재감을 드러냈다.


<밀정>


“<밀정> 이후로 많이 달라졌습니다. 거리에서 알아보시는 분들도 늘었고요.”


그는 평소 김지운 감독의 영화를 좋아했다. <놈놈놈>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한 편이기도 하다. 김 감독의 작품에 무조건 출연하고 싶었던 그는 오디션을 봤다. 1시간 반 동안 진땀 흘리면서 연기했다. 어떤 배역을 맡게될 지는 몰라 이 역할 저 역할 시키는대로 했다. 그리고는 다음 날부터 초조하게 연락을 기다렸다.


"2주 정도 지났을까. 제작사에서 전화가 왔어요. 하일수 역으로 캐스팅하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날 너무 기뻐서 뒷산 올라가서 소리를 질렀어요.”


<밀정>에서 보여준 존재감은 충무로에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대작들에 속속 캐스팅되기 시작했다. 올해만 해도 그는 <남한산성>에 이어 OCN 드라마 <터널>, <범죄도시>, <부라더> 등 다양한 작품에 출연했다. 추석 때는 TV에서 <밀정>을 방영해주는 바람에 극장과 TV에 모두 등장했다. 틀면 나온다고 해서 ‘틀성태’라는 별명까지 생겼다.


"최근 마동석 선배님과 <부라더> 무대인사를 다녔는데 선배님이 “올해는 너의 해다” 라고 말씀해주셨어요. 송강호 선배님은 며칠 전 전화하셔서 "네가 최고다" 라고 해주시더라고요. 몸둘 바를 몰랐죠."


<남한산성>


그는 <남한산성>의 여진족 장수 용골대 역할을 위해 머리카락을 삭발했다. 다른 작품은 안 해도 좋으니 이 작품 하나에 올인하겠다는 결단이었다. 그는 <최종병기 활>에서 류승룡의 연기를 참고하며 만주어를 연습했다. 두 달 동안 매일 만주어를 입에 달고 살았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진짜 여진족을 캐스팅한 줄 알았다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로 그의 연기는 호평 일색이었다. 애초의 우려와 달리 그는 다른 영화들에도 잇따라 캐스팅됐다.


"삭발 후에도 다른 배역을 할 수 있더라고요. <부라더>의 스님, 드라마 <터널>의 살인마 정호영 역시 그 머리 그대로 했고, <범죄도시>도 연변 조폭이라서 짧은 머리가 필요했습니다.”



그는 겸손하게 말하고 있지만 올해 주목받은 한국영화들이 그를 캐스팅한 이유는 단지 그의 머리카락이 짧아서만은 아닐 것이다. 낭비된 적 없는 신선한 마스크, <밀정>에서 확인한 존재감, <남한산성> 촬영장에서 보여준 잠재된 연기력이 합을 이뤄 그를 충무로의 새로운 신 스틸러로 떠오르게 한 것 아닐까.


©Youchang


회사생활을 그만둔 지 6년 만에 그는 한국영화에서 눈에 띄는 조연배우로 점점 입지를 굳혀가고 있다. 함께 직장에 다니던 동료들은 그의 든든한 응원군이다. 그들은 그가 출연한 작품을 모니터링하고 때론 신랄한 비평도 해준다.


TV에서 흘러가는 자막을 보고 재미삼아 응모한 오디션이 허성태의 인생 항로를 변경시켰다. 35살은 그런 나이다. 28~35세에 만난 이성이 평생 함께 할 배우자가 될 확률이 높은 것처럼, 35세는 그동안 잠들어 있던 잠재력을 시험해 보고 싶은 절실함이 극에 달하는 나이다. 이 나이에 천재들의 걸작이 탄생하고, 퇴사와 창업이 많아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렇다면 당신도 제2의 허성태가 될 수 있을까? 그는 자신처럼 어린 시절부터 오래 간직한 꿈을 펼쳐보고 싶은 ‘35세들’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제가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하는 일을 그만 두고 꿈에 도전하려면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눈을 항상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없으면 본인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도 민폐죠. 준비와 열정. 두 가지가 꼭 필요합니다. 제가 첫 오디션을 볼 때 심사위원들이 공통적으로 해주신 말이 있었어요. 열정이 보인다고요. 열정 하나로 버텼다고 생각합니다."


©Youchang


허성태(41)

주요 출연작: 꾼, 부라더, 범죄도시, 남한산성, 터널(OCN), 사내본색, 밀정, 쓰리 썸머 나잇, 상의원, 해무, 하이힐, 광해: 왕이 된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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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창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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