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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아이덴티티>는 인도 출신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11번째 영화입니다. 이 영화를 볼 땐 반드시 나이트 샤말란 감독 영화라는 것을 상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허탈해지기 때문입니다.


일단 제가 나이트 샤말란 영화에 대해 갖는 느낌부터 설명하겠습니다. 그는 영화로 사기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를 유명하게 한 <식스 센스>(1999)부터 일단 거대한 사기극이었죠. 이후 <싸인>(2002)은 불가사의한 싸인의 정체를 알고 나면 허탈해지는 영화였고, <빌리지>(2004)는 배신도 이런 배신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다 죽었는데 괴물은 이미 사라졌다니요. <해프닝>(2008)의 결말은 말 그대로 병맛스런 해프닝이었고, <라스트 에어벤더>(2010)는 차마 끝까지 보기 힘들 정도였으며, <애프터 어스>(2013)는 제목만 거창하지 그냥 윌 스미스 가족 영화였습니다.


한 마디로 나이트 샤말란 영화는 용두사미입니다. 뭔가 그럴 듯한 것을 기대하게 하지만 다 보고 나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거대한 낚시질이라고 할까요. 이것이 인도인 특유의 정신승리에 기반한 것이라면 할 말 없지만 관객 입장에선 매번 뒤통수 맞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는 뜻이니 나름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빌리 밀리건


영화의 배경부터 살펴보겠습니다. <23 아이덴티티>는 실제 다중 인격을 갖고 살면서 범죄를 저지른 빌리 밀리건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영화입니다. 1955년에 태어난 빌리 밀리건은 양아버지로부터 성적 학대에 시달린 끝에 정신분열증을 얻었고 이것이 악화돼 무려 24개의 다중인격을 갖게 됩니다. 그는 1977년 납치, 강간, 강도 사건을 저지르고 붙잡혔지만 이듬해 해리성 인격 장애인으로 판명돼 정신과 치료를 조건으로 무죄를 선고받습니다.


그가 갖고 있던 24개의 인격들은 번갈아 가며 정신과 육체를 지배했다고 하는데요. 이 인격들의 나이와 성별, 출신지, 성격, 직업 등이 모두 제각각이어서 그는 고등학교 중퇴의 학력임에도 인격에 따라 아랍어를 구사하기도 하고, 전문가 수준의 물리학과 의학 지식을 이야기할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빌리 밀리건의 이야기는 작가 대니얼 키스가 그와 그를 치료한 정신과 의사, 지인 등을 인터뷰해 쓴 [빌리 밀리건]이라는 논픽션으로 유명합니다.



빌리 밀리건에서 따온 캐릭터인 케빈은 23개의 다중인격을 지닌 남자입니다. 제임스 맥어보이가 연기하는데 영화 속에 23개의 인격이 모두 나오는 것은 아니고 데니스, 패트리샤, 헤드윅 등 8개의 인격만 등장합니다. 제임스 맥어보이는 이 캐릭터들을 발음과 연기의 톤을 조금씩 달리해 표현합니다. 그의 연기는 훌륭합니다만 카리스마라고 하기엔 뭔가 결여되어 있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뒤에 다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영화의 오프닝은 나이트 샤말란 영화답게 기대감을 갖게 합니다. 혼자 있는 것을 즐기는 소녀 케이시(안야 테일러 조이)가 있고, 그를 억지로 생일파티에 초대한 두 친구, 클레어(헤일리 루 리차드슨)와 마르샤(제시카 술라)가 있습니다. 그런데 세 소녀는 갑자기 데니스에게 납치돼 어느 지하실에 갖힙니다.



여자들이 납치, 감금돼 탈출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스토리는 공포영화의 클리셰라고 할 정도로 많습니다. 이런 영화의 특징은 여성의 옷을 벗기고 적당히 노출된 몸매를 카메라가 훑는다는 것이죠. <에이리언>부터 <나이트메어>, <이웃집 소녀>, <피라냐> 등등에 <완전한 사육> 같은 일본영화, <실종>, <날 보러와요> 같은 한국영화까지 비슷한 전략입니다. 굉장히 소모적이고 또 피로합니다. 이런 영화 좀 그만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나이트 샤말란이 또 하고 있군요. 이렇게 또 낚여줘야 하나요? 일단 한 번 지켜봅시다.


(지금부터는 영화의 후반부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지하 감옥에서 소녀들의 반복되는 탈출 시도, 데니스와 플레처 박사(베티 버클리)의 숨바꼭질 끝에 한 가지 메시지를 내놓습니다. 그것은 "부서진 사람은 더 특별하다"는 것입니다. 케빈과 케이시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고 엄마 혹은 삼촌에게 학대받으며 고통스런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이것이 그들을 더 특별하게 만들었다고 영화는 말합니다. 그래서 결정적 순간 케빈, 아니 그의 24번째 인격인 비스트는 케이시를 살려줍니다.


이 메시지는 꽤 그럴 듯해서 2시간 가까운 러닝타임을 견딜 수 있게 만듭니다. 아동학대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보게도 합니다. 그런데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서 뜬금없는 반전으로 이 모든 것을 또다시 뒤집어 버립니다. 그것은 브루스 윌리스를 등장시켜 이것이 한 정신질환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이트 샤말란표 초능력 세계관의 일부임을 드러낸 것입니다. <언브레이커블>(2000)에서 데이비드 던(브루스 윌리스)은 기차 사고에서 홀로 살아남은 초능력자였는데 <23 아이덴티티>의 케빈은 이 열차 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엄마의 학대를 누구도 막아주지 못해 정신병을 얻게 됐다는 것입니다. 또 영화는 온몸이 부서지는 미스터 글래스(사뮤엘 L 잭슨)를 언급하며 24개의 정신분열 역시 부서지는 현상의 하나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반전은 영화를 흥미로운 퍼즐맞추기 게임처럼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만 한편으론 지금까지 영화가 차곡차곡 쌓아온 "부서진 사람은 더 특별하다"는 메시지를 한 방에 날려버리는 재앙같은 반전이기도 합니다. '부서진 사람'이 아동 학대의 고통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부서진 사람'인 미스터 글래스를 뜻한다니요. 초능력을 찾아다니는 미스터 글래스와 케빈을 연결시키기 위해 이 모든 설정을 만들었다니요. 이것은 역시 나이트 샤말란표 사기라고 부를 수밖에 없겠네요.


제임스 맥어보이의 연기는 차가운 분위기의 좁은 공간 속에서 영화를 끌고 가는 기관차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기술적인 면에서만 뛰어날 뿐 여러 인격을 오가는 역할 속에서 폭발적인 카리스마는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뭔가 근원적인 억압된 기운이 부족하다고 할까요? 이것은 아마도 케빈이라는 캐릭터 자체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린 시절 테이블 밑에서 엄마가 나오라고 소리쳤다고 정신분열증에 걸렸다는 설명 자체가 미약합니다. 세 소녀가 받는 고통에 비하면 케빈의 과거는 너무 두루뭉술하게 넘어가고 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돌이켜보건데 나이트 샤말란은 자기 나름대로의 '엑스맨'을 구상했고, 이를 위해 빌리 밀리건을 끌어들인 것처럼 보입니다. 나이트 샤말란표 '엑스맨'의 첫 번째 영화인 <언브레이커블> 역시 1962년부터 1970년까지 기차 탈선 사고, 비행기 사고, 버스 전복 사고 등 대형 사고에서 살아남은 실제 크로아티아 남자를 모델로 한 영화였다는 것을 상기하면 심증은 더 굳어집니다. 개인적으로 <언브레이커블>은 나이트 샤말란 영화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인데 그 이유는 낚시질이 심하지 않아서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16년만에 속편으로 뒤통수를 치다니 이 사기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23 아이덴티티 ★★★

탁월한 장르 세공능력. 못 말리는 낚시질.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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