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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1억명 이상의 관객이 한국영화를 봤다. 5년 연속이다. 천만영화는 1150만명을 동원한 ‘부산행’ 한 편뿐이지만 970만명의 ‘검사외전’, 700만명대의 ‘인천상륙작전’ ‘터널’ ‘밀정’, 600만명대의 ‘곡성’ ‘럭키’ 등으로 푸짐했다.


한 해 동안 사랑받아온 한국영화에는 어떤 특징이 있는지 다섯 가지 포인트로 짚어봤다.



1. 리얼 헬조선 영화가 떴다


‘부산행’ ‘터널’ ‘판도라’ 등 대작 재난영화 세 편이 나란히 흥행에 성공했다. 세 편의 공통점은 사이다 같은 현실 비판이다. 흥행 대박은 아니지만 ‘아수라’도 마니아층을 양산하며 강펀치를 날렸다. ‘곡성’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며 샤머니즘이라는 권력의 치부를 드러낸 영화로 재평가받았다.


현실 비판이 흥행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초기에 주목을 끌 수 있다는 점에서 한국영화는 적극적으로 사회비판 요소를 영화 속에 담으려 했고 대부분 성공을 거두었다.


‘부산행’에서 가만히 있으라는 정부, ‘터널’에서 이제 그만하자는 정치인, ‘판도라’에서 언론을 통제하는 총리 등 영화는 현실을 모방했고 이는 씁쓸한 기시감을 주며 관객의 공감을 얻었다.



TV 등 기존 매체가 다루지 않는 진실에 대한 갈증은 정치적 다큐멘터리의 흥행으로도 이어졌다. 국정원의 간첩조작 사건을 파헤친 ‘자백’이 14만명, 영호남의 두 도시를 배경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지역주의 타파 노력을 그린 ‘무현, 두 도시 이야기’가 20만명을 동원할 정도로 다큐멘터리가 이례적인 흥행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자백’에서 드러난 김기춘의 공안검사 시절 수많은 은폐 의혹과 모르쇠 답변은 현실에서 벌어진 청문회와 오버랩되며 파장을 몰고 왔다.


박찬욱 감독


2. 속속 귀환한 거장들 중 박찬욱만 빛났다


홍상수, 김기덕, 박찬욱, 강우석, 허진호, 김성수, 김지운 등 빅 네임 감독들이 신작을 잇따라 선보였다. 그러나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성공을 거둔 감독은 박찬욱과 김지운뿐이다.


이중 박찬욱이 단연 돋보였다. ‘아가씨’는 뉴욕타임스 ‘올해의 영화’에 오른 것을 비롯해 해외 평단의 뜨거운 찬사를 받고 있다. 미국의 한 영화전문 사이트는 ‘아가씨’가 박찬욱의 최고 걸작이자 지난 10년간 최고의 한국영화라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박찬욱은 인복도 있어서 그의 조감독을 지낸 이경미 감독이 ‘비밀은 없다’로 호평받았고 그가 미장센영화제 심사위원일 때 인연을 맺은 엄태화 감독이 ‘가려진 시간’으로 본격 상업영화 감독 진출하며 한국영화계에 ‘박찬욱계’의 등장을 알렸다.



3. 저예산 영화 개봉이 급증했다


제작비 10억 미만을 보통 ‘저예산 영화’로 분류하는데 2005년 16편, 2009년 64편, 2015년 160편으로 늘더니 올해는 약 250편으로 급증했다. 이는 올해 개봉한 한국영화 총 327편(영진위 12월 22일 기준)의 75%에 달하는 비중이다.


저예산 영화가 급증한 배경에는 IPTV, VOD 등 부가판권 시장의 성장이 있다. 하루 이상 극장에서 상영된 영화들이 ‘개봉작’의 자격으로 부가판권 시장으로 넘어가면 비개봉작에 비해 높은 금액을 받을 수 있다. 때론 2배 가까울 정도로 큰 차이가 나기도 한다.


저예산 영화들 중 수작도 많았지만 대부분 퀄리티가 떨어지는 에로 영화라는 점은 아쉽다. 극장 외 영화시장의 파이가 커지는 과정에서의 성장통이길 바래본다.


저예산 영화가 느는 것과 동시에 대작 영화도 늘고 있다. 보통 제작비 80억원 이상을 대작으로 분류하는데 2014년 11편, 2015년 17편에서 올해 20편 가량으로 늘었다. 이에 따라 겨울방학과 여름방학 등 대작 시즌에 극장 관객 쏠림 현상도 심해졌다. 올해 6~8월의 월평균 관객 수는 다른 달의 2배 이상이었다.


이처럼 영화 제작 규모가 양극화되면서 10억∼50억원 규모의 중예산 영화는 2011년 40편에서 2015년 30편, 올해는 20편대로 줄었다.


올해 한국영화 개봉 편수는 급증했지만 극장 수입으로 손익분기점을 넘긴 영화는 고작 15편에 불과했다. 크게 투자해 블록버스터로 확실한 극장 수입을 얻거나 혹은 적게 투자해 부가시장에서 투자금을 회수하거나, 이렇게 한국영화는 양극화의 길을 걷고 있다.



4. 여성 영화인들이 할 말을 하기 시작했다


강남역 화장실 살인사건, 메갈리안 사태, 문화계 성폭력 등 ‘여혐’ 담론이 어느 때보다 활발했던 올해 영화계에서도 여성이 주체적으로 활약하는 영화들이 쏟아져 나왔다. 여성 감독들이 속속 신작을 선보였고 여성 배우들도 앞다퉈 출연하며 여성 영화를 새로운 트렌드로 이끌었다.


이경미 감독의 ‘비밀은 없다’,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 이언희 감독의 ‘미씽: 사라진 여자’, 이현주 감독의 ‘연애담’ 등이 주목을 끈 여성 영화들이다. 박찬욱을 빼고 모두 여성 감독이 만든 영화다.


‘비밀은 없다’는 남편마저도 믿을 수 없게 된 여성이 정신 똑바로 차리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주체적으로 기어이 사건을 해결하는 여성의 성장담이고, ‘아가씨’는 남성들의 세상을 무너뜨리고 여성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체제 전복의 이야기다. ‘미씽: 사라진 여자’는 여성 이주 노동자의 불합리한 처우와 싱글맘의 양육권 문제 등을 다루고 있고, ‘연애담’은 여성 동성애자의 알콩달콩한 연애를 통해 그들의 사랑도 여느 이성애자들의 사랑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네 편의 영화는 여성을 더 이상 남자 주인공의 상대역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극을 주도하는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부산행', '밀정',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


5. 좀비에 판타지까지… 장르가 다양해졌다


좀비(‘부산행’), 탐정판타지(‘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 누아르(‘밀정’)


한국영화의 장르가 다양해진 것도 수확이다. 사실 그동안 한국영화 흥행작의 장르는 천편일률적이었다. 사극(‘명량’, ‘관상’ 등)과 가족드라마(‘7번방의 선물’, ‘국제시장’ 등)와 액션(‘베테랑’ ‘도둑들’ 등)이 삼분하는 가운데 가족드라마와 액션을 결합한 재난영화가 가끔 밀물처럼 들이닥치는 정도였다. 로맨틱코미디와 호러 등은 정해진 관객 범위 안에서만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 천편일률적인 흥행 장르는 모두 리얼리티라는 키워드 위에서만 작동했다. 현실에서 조금이라도 동떨어진 영화는 “말도 안된다”는 핀잔 속에 잊혀지곤 했다. SF도, 판타지도, 뮤지컬도, 탐정추리극도 한국영화에선 설 자리가 없었다. 올해 청룡영화상과 대종상의 작품상을 ‘내부자들’이 휩쓴 것만 봐도 리얼리티 강박을 엿볼 수 있다. ‘리얼리티=완성도’라는 공식이 이상하게 통용되는 곳이 한국영화계다.


‘부산행’은 이 편견을 정면으로 깬 블록버스터다. 좀비라는 소재는 그동안 한국에서 거의 시도되지 않았지만 연상호 감독은 재난영화의 포장지를 씌워 좀비를 대중문화 장르로 선보였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또 ‘밀정’은 그동안 숭고하게만 다루어졌던 독립군 소재를 누아르 장르의 틀 안에 집어 넣어 향후 이 소재가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고,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은 아예 비현실적인 공간을 창조한 뒤 그 속에서 정교한 장르 세공 솜씨로 이야기를 전개시켜 판타지 영화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동안 완고했던 한국영화 장르의 벽은 이처럼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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