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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곡성’에서 낚시꾼인 외지인(쿠니무라 준)은 카메라를 손에 들고 다닌다. 그의 숲 속 거처 비밀의 방에는 죽은 자들의 죽기 전과 후의 모습을 찍은 인물사진들이 빼곡히 전시돼 있다. 그는 새 도감을 갖고 있고 영화에는 곡성의 멋진 풍경도 자주 등장하지만 그는 새나 풍경을 찍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인물사진만 찍는다. 그와 기묘하게 연결돼 있는 무당 일광(황정민) 역시 죽음을 앞둔 인물들을 사진으로 남긴다. 이들에게 인물사진은 어떤 의미일까?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외지인의 비밀의 방에 걸린 사진들


사진이 발명됐을 때 일부 문화권의 사람들은 자신과 똑같은 모습이 종이에 찍혀 나오는 것이 영혼을 빼앗아간다고 생각해 극렬히 저항했다. 사진사가 구타당하고 쫓겨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오스만 제국의 압둘 메지트 술탄은 자신의 사진을 찍으려 한 프랑스 사진사의 목을 가져오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사진을 발명한 조세프 니엡스가 처음 찍은 사진도 인물사진이 아니었다. 풍경사진이거나 혹은 동물사진이었다. 스스로를 카메라 앞에 놓고 사진 찍히는 행위는 그조차도 꺼림칙했던 것이다. 요즘 사람들이 스마트폰의 카메라로 너도나도 인물사진, 특히 셀카를 찍는 것을 생각해보면 사진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알 수 있다.



인물사진에 대해 깊게 탐구한 사람은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이었다. 그는 사진과 같은 기술을 통한 복제가 오리지널리티를 거세해 아우라를 실종시킨다고 비판했지만 유일하게 인물사진의 가치만은 인정했다. 그가 인물사진에서 주목한 것은 ‘제의가치’였다. 예술의 아우라를 숭상하는 태도가 인물사진에는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장례를 치를 때 죽은 사람의 사진을 놓고 추모하게 되는데 이때 이미 죽어 사라진 이를 대신하는 인물사진이 아우라를 창출한다는 것이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언젠가 죽어야 할 운명, 그 연약하고 변하기 쉬움을 기록하는 행위다. 모든 사진은 시간의 불가항력적인 소멸의 흐름 속에서 그 인물이 덧없이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발터 벤야민


벤야민의 이 말 속에 인물사진에 대한 그의 시선이 담겨 있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사진은 언젠가 죽을 운명인 그를 기록한다. 사진 속의 그는 그가 살아있었음을 증명한다. 그래서 “사진은 허구화한 현재이며 부재의 증거다.”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는 이를 구체화했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바탕으로 사진론을 전개한 저서 [카메라 루시다]에서 그는 사진이 죽은 어머니와 재회하도록 돕는 마술적 엑스터시를 체험하게 해준다고 썼다. 그에 따르면 사진의 힘은 “사진사가 그 자리에 있었고 찍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 찍혔을 때 그 순수한 우연이 만들어낸 거부할 수 없는 유혹”에서 온다.


롤랑 바르트


그는 이를 ‘푼크툼’이라는 용어로 정의했다. 사진에 대한 보편적인 가치인 스투디움(Studium)과 반대되는 의미의 푼크툼(Punctum)은 화살처럼 ‘나’를 꿰뚫는 주관적인 가치다. 제의가치가 창출하는 아우라 역시 푼크툼의 일종이다. 가령 영화 ‘곡성’에서 외지인이 굿을 할 때 그의 앞에 놓여 있는 사진 속 인물이 박춘배(길창규)라는 ‘사실’은 스투디움이지만 그 사진을 보며 외지인이 품은, 검은 닭의 피를 바쳐 그를 살려내겠다는 간절한 마음은 푼크툼이다.


염소 머리 위에 올려진 박춘배 사진


바르트에 따르면 푼크툼은 ‘유령이 거처하는 곳’이다. 사진은 움직이지 않는 이미지여서 보이는 것 외에는 존재를 증명할 수 없지만 푼크툼이 존재하기 시작한 순간 사진 밖의 인물이 드러난다. 사진의 표면에는 존재하지 않는 그는 사진을 찍는 사진사일 수도 있고 그를 죽인 살인범일 수도 있고 혹은 사진을 보는 이가 떠올린 상상의 인물일 수도 있다. 그는 유령처럼 숨어 있어서 실재하지 않지만 그 힘은 스투디움의 보편적인 가치를 허물어버릴 만큼 막강하다. 외지인의 푼크툼은 죽은 자를 깨어나게 하는 것이었고 그 영적인 힘으로 인해 기어이 박춘배는 죽음으로부터 부활한다. 이 과정은 서양에서 죽은 자를 깨어나게 만드는 흑마술을 닮았다. 유령을 소환하는 사진의 푼크툼 역시 흑마술과 비슷한 작용을 한 것이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 산 자를 괴롭히는 것은 현대에선 오컬트의 영역이지만 고대 사람들은 이것이 실제로 가능하다고 믿었고 두려워했다. 그래서 고대의 연극 배우들은 죽은 사람을 연기할 때 얼굴을 가리거나 심하게 찌푸렸다고 한다. 토템 연극에서 흰색 상반신, 중국 연극에서 얼굴에 색칠한 인물, 일본 노의 가면 등이 모두 비슷한 경우다. 죽은 자를 연기한 배우는 한동안 공동체에서 격리되기까지 했다. 이는 관객이 죽은 이를 연기한 배우를 통해 푼크툼을 찾아내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영화 ‘곡성’의 외지인도 노의 가면을 갖고 있다. 그가 그 가면으로 무엇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굿을 할 때 가면이 죽은 자를 대행하는 역할을 했음을 짐작해볼 수는 있겠다.


해가 저무는 곡성


사진 역시 노의 가면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사진 찍힌 자가 죽었거나 혹은 죽을 것임을 입증하면서 한편으로는 사진을 보는 사람이 죽음 그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뽀샤시하게 필터링된 사진을 보면서 그 사람의 죽음을 연상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결국 사진은 박제 당한 영상이다. 사진 속 인물들은 영화에서처럼 움직이지 않고 또 튀어나오지도 않는다. 그들은 마취 당한 나비들처럼, 핀으로 꽂혀 있다. 박제를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푼크툼 뿐이다.


그렇다면 푼크툼은 어떻게 획득할 수 있을까? 어떻게 스투디움의 보편성을 깨뜨리고 나만의 활시위를 당길 수 있을까? 여기서 잠깐 사진의 본질로 돌아가 보자.


일광이 찍어온 사진들


사진은 ‘지금 여기의 존재’를 기술적으로 ‘복제’한 영상이다. ‘지금 여기의 존재’는 ‘존재했었음의 증명’이라는 말로 설명했으므로 이번엔 또 다른 중요한 키워드인 복제에 대해 살펴보자. 복제라는 개념을 받아들이려면 나와 똑같은 대상을 인정해야만 한다. 사진의 복제는 고작 2차원적인 표현일 뿐이라고 일축할 수도 있지만 개념상으로는 ‘복제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복제’를 은유적으로 그린 영화 ‘어나더 어스(Another Earth, 2011)’에는 지금의 지구와 꼭 닮은 또 다른 지구가 등장한다. 일종의 평행우주인 셈인데 그곳에는 지금의 나와 똑같이 생긴 또 다른 내가 살고 있다. 두 행성은 서로의 존재를 모르고 있다가 어느 날 ‘어나더 어스’가 지구에 신호를 보내오면서 서로를 인식하게 된다. 이곳과 저곳에서 똑같이 생긴 정치인이 인공위성을 통해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두 사람은 서로 같은 기억을 갖고 있다는 것까지 확인하고 이는 전세계에 생중계되며 세상에 알려진다. ‘도플갱어’의 전지구적 버전인 셈이다.


영화 '어나더 어스'


영화의 결말은 지구의 고달픈 현실에서 괴로워하던 주인공이 ‘어나더 어스’로 가서 새 인생을 살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어차피 여기나 거기나 똑같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주인공은 인생을 변화시키기 위해 모험을 감행한다. 지금까지 ‘어나더 어스’는 지구와 똑같은 역사를 가졌지만 두 행성 간의 왕래가 시작된 이상 두 행성의 데칼코마니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어나더 어스’는 지구를 그대로 복제했다는 점에서 사진과 똑같은 본질을 갖는다. 또 다른 지구가 거기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을 땐 완벽한 복제품으로 기능했다. 그곳의 내가 죽으면 이곳의 나도 죽는 곳이었다. 그런데 우주선이 오가며 행성 간 왕래가 시작되면서 복제품은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것(unheimliche)이 되어간다. 이곳을 떠난 내가 그곳에서 또 다른 나와 공존하기 때문에 더 이상 동시 죽음은 가능하지 않게 된다. 이 균열을 만든 것은 변화에 대한 갈망이었고 그 갈망을 이끈 것은 이렇게 가만히 죽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결국 균열, 즉 푼크툼을 만든 것은 인간의 의지였다.


외지인의 집을 찾아온 전종구와 양이삼


다시 영화 ‘곡성’으로 돌아와 보자. 외지인은 자신의 거처로 쳐들어온 전종구(곽도원)와 오성복(손강국)이 인물사진들을 발견한 뒤 그 사진들을 불태워버린다. 아니, 실제로 불태웠는지 혹은 일광이 가져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비밀의 방에서 치워버리고는 종구에게 불태워버렸다고 말한다. 그가 사진들을 숨긴 것은 사진들이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죽음들에 대한 증거로 기능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종구가 사진을 보며 푼크툼을 갖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어리숙해 보이는 종구는 딸을 지키겠다는 의지 하나로 마을에서 유일하게 고군분투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몸에 두드러기가 나고 정신적인 착란 증세를 보이다가 결국 살인을 저지른 사람들의 공통점은 외지인과 접촉했다는 것이다. 이를 가장 먼저 의심하는 사람은 종구다. 딸의 허벅지에서 흔적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외지인이 인간인지 사령인지는 알 수 없으나 딸과 접촉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하다. 그는 쉽게 현혹되는 우유부단한 사람이지만 딸을 지키려는 의지는 누구보다 확고하고 이는 그를 합리적인 의심으로 이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의지에 걸맞는 능력이 없다. 마을은 쑥대밭이 되고 두 발 달린 것들은 죄다 사라질 위기에 처하지만 해결할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무당도 신부도 병원도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종구는 외로이 저항하지만 계속해서 의심에 사로잡힌다. 그는 딸을 지켜내는데 실패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읊조린다. “괜찮아. 아빠가 다 해결할 겨. 아빠가.” 그의 마지막 대사는 한 나약한 인간의 공허한 말로 스크린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맴돈다.


"아빠가 다 해결할겨. 아빠가."


풀 죽어 있는 종구의 모습은 영화의 첫 장면에서 그가 발견했던 박흥국(정미남)의 모습과 수미쌍관을 이룬다. 흥국 역시 양손에 수갑을 찬 채 눈이 풀린 채로 허망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마도 외지인은 종구가 도착하기 전 이미 흥국의 사진을 찍어갔을 것이다. 흥국은 이후 병원에서 목이 꺾인 채 처참하게 죽는다.


종구의 사진은 일광이 찍는다. 슬그머니 종구의 집으로 들어온 그는 죽은 자들의 얼굴을 사진에 담기 시작한다. 그가 외지인과 같은 전략이라면 죽기 전 종구 아내(장소연)의 사진도 찍어뒀을 것이다.


종구 사진을 찍는 일광


외지인은 같은 인물의 사진을 두 번 찍었다. 한 번은 죽기 전, 또 한 번은 죽은 후의 모습이었다. 죽기 전에 찍은 사진은 그가 죽을 것임을 증명하기 위해서였고, 죽은 후에 찍은 사진은 푼크툼, 즉 그 인물의 의지를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카메라가 총의 승화이듯, 사진을 찍는 것은 살인의 승화이다. 그것은 슬프고 두려운 이 세상에 어울리는 부드러운 살인이다.”


미국 비평가 수전 손택의 이 말처럼 영화 ‘곡성’에서 카메라는 살인의 무기다. 물론 영화 속 살인이 실제로는 칼부림과 화재로 일어나지만 이들을 조종한 자들이 들고 있는 도구는 다름 아닌 카메라다. 세상은 이를 알지 못한 채 애꿎은 독버섯에 원인을 돌리고 죄를 묻고 있다. 독버섯은 손쉬운 희생양이다.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의 마음은 일시적으로 편안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묻힌 진실의 대가는 더 혹독할 것이다. 영화는 유대인들이 가장 쉬운 희생양으로 나사렛 예수를 의심하고 죽였던 것을 상기시키며 그 결과가 처참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양이삼 사진을 찍는 외지인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일광은 카메라로 확인사살한다. 종구가 다시 분연히 떨쳐 일어나 외지인이 악마임을 밝혀내고 딸을 악마의 손아귀에서 구해낼 것이라는 작은 희망의 불씨, 그 미약한 의지를 끄기 위해 카메라를 들이댄다. 끝까지 마을을 구하려 했던 무명(천우희)은 결국 주저앉는다. 외지인이 악마임을 아는 유일한 존재인 양이삼(김도윤)이 동굴을 빠져나와 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을 수 있을까? 하지만 외지인은 이미 그를 사진에 가뒀다.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이제 죽음이 마을을 뒤덮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곡성에는 여전히 그림 같은 해가 뜨고 지겠지만 말이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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