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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베테랑>에서 신진물산의 기획조정실장인 재벌 3세 조태오(유아인)는 시종일관 흉포하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막무가내로 대한다. 자신이 세운 기준에 맞지 않으면 화를 내고 자신의 길을 가로막으면 분을 참지 못한다. 정당한 노동의 댓가를 받으러 온 배 기사(정웅인)를 폭행하고, 함께 운동하던 수행원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자신을 수사하는 서도철 형사(황정민)를 죽이려 하며, 여자 모델 다혜(유인영)를 데리고 놀다가 버린다. 영화 후반부에서는 끝내 그를 물고 늘어지는 형사를 향해 폭주한다.



그런데 단 한 장면, 조태오가 흉포하게 보이지 않는 장면이 있다. 그룹 회장인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병원을 찾은 조태오가 수행원들이 자신을 위해 잡아둔 엘리베이터를 타더니 밖에 서 있는 환자들을 향해 타라고 손짓하는 장면이다. “태우세요, 환자분들.” 그는 환자들을 향해 좁은 공간으로 들어오라고 재촉한다. 환자들은 눈치를 보다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간다. 환자들 중엔 배 기사의 아내(장소연)도 있다. 조태오는 뒤에서 무덤덤하게 이들을 쳐다본다.


이 장면은 이게 끝이다. 더 이상 부연설명은 없고 그 다음 장면은 바로 회장과의 대화다. 아마도 감독은 남들 보는 데서 선행을 베푸는 척하는 재벌 3세의 가식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이 장면을 삽입했을 것이다. 관객은 그의 뜬금없는 면모에 어리둥절해 하다가 다시 악행이 계속되는 것을 보며 역시 이중적이었다며 실소를 지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또다른 생각이 들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전 그 짧은 순간, 시종일관 나쁘기만 했던 조태오가 갑자기 선행을 베풀기로 했을 때 그것을 막연히 남의 눈을 의식하고 한 행동으로만 볼 필요가 있을까 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조태오의 무의식적인 행동은 아니었을까? 자신도 모르게 어릴 적부터 몸에 밴 행동이 밖으로 드러났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쩌면 조태오는 태생부터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니지 않았을까?



우리가 나쁜 놈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무엇이 나쁜 놈을 나쁜 놈이라고 규정할까? 여기서 좋고 나쁨을 이야기하기 위해 우리는 ‘선과 악’, 그리고 ‘정의와 부정의’ 개념을 끌어와야 한다.


우선, 선과 악에 대해 생각해보자. 일부 종교에서는 선과 악을 단지 ‘믿음’의 문제로 단순화하지만, 아마도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기준은 공동체에 대한 배려가 아닐까 싶다. 즉, 나보다 공동체에 대한 배려가 있으면 그 사람은 선하고, 나를 위해 공동체를 해치면 그는 악하다. 공동체를 무너뜨리려는 세력을 우리는 악의 세력이라고 부른다.


칸트는 인간의 마음 속에서 도덕과 충동이 투쟁해 도덕이 이기면 선한 행동을 하고, 충동이 이기면 악한 행동을 한다고 봤다. 그러면서 “선은 감정에 따라 충동적으로 베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고 했다. 즉, 나와 다른 사람을 언제나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우하는 것이 곧 선이라는 것이다. 이 기준에 따르면 조태오의 엘리베이터 선행은 ‘선’이 아니다. 충동적인 일회성 행동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정의는 공동체 내에서의 공평한 가치 추구다. 정의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기 자신에게 합당한 몫이 자신에게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고, 존 롤스는 ‘정당화될 수 없는 불평등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정의는 공동체 내에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 비해 차별대우받지 않을 권리를 지키는 것이다. 평등, 공정 등이 주요 키워드다.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추구하는 '정의'는 선과 다르다.


‘선/악’은 ‘정의/부정의’와 항상 연결되지는 않는다. 중세시대에 마녀가 공동체를 파괴하는 악이라고 믿었던 당시 권력자들은 마녀를 화형시키는 것이 선이라고 믿었지만 공동체 내의 기회균등 가치로 보면 이는 분명 정의롭지 못한 행동이다.


민주주의에 익숙한 우리는 ‘선/악’을 ‘정의/부정의’와 연결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선한 자는 언제나 정의로운 자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선이라는 명목 하에 우리를 배신하기도 한다. 선거를 통해 당선된 독일의 히틀러도, 사실상 일당 독재인 북한 체제도 겉으로는 ‘민주주의’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이들은 정의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그렇다.


하지만 우리 일상에서는 이를 혼동해 쓴다고 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공동체 생활에 익숙한 우리는 어떤 행동을 보면 본능적으로 그것이 선인지 악인지, 또 정의로운지 부정의한지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민폐’라고 부르는 행동들, 지하철에서 다리를 벌리고 앉아 옆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행위, 식당 종업원에게 반말을 일삼는 행위, 고위 관계자에게 전화를 걸어 병원 진료시간을 새치기하는 행위 등을 볼 때 우리는 눈쌀을 찌푸린다. 이는 모두 공동체를 파괴하면서 나와 타인을 불평등하게 만드는 행위다. 따라서 악이고 부정의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 보자. 조태오는 남을 업신여기는 악한 자이면서 이를 통해 기회 균등을 파괴하는 부정의한 자다. 어떻게 봐도 나쁜 놈임에는 부정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나쁜 놈은 시종일관 나쁘기만 할까?


아무리 착한 사람도 간혹 발끈해 일탈을 저지를 때가 있듯이 나쁜 놈도 가끔 선행을 베풀 때가 있다. 부하 직원 괴롭히기로 악명 높은 직장 상사도 눈을 마주치며 소주잔을 기울이면 참았던 눈물을 보이고, 수십명을 학살한 갱단 두목도 손자에게는 용돈을 쥐어주며, 온몸에 문신 가득한 조폭도 가끔은 순한 눈망울을 꿈벅인다. 나쁜 놈이 갑자기 착해 보이는 이유는 그도 역시 우리처럼 나약한 인간이라서 그렇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나약한 존재다. 태어난지 일주일 만에 성장을 마치고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다른 포유류와 달리 인간은 최소 15년 이상을 보호받아야만 비로소 독립할 수 있는 존재다. 따라서 아무리 강한 사람도 어릴적 나약했던 15년을 기억하고 있다. 머릿속에 그 기억이 있는 한 인간은 한없이 사악할 수만은 없다. 나는 언제든 다시 약해질 수 있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조태오가 약해지는 순간은 언제일까? 그것은 자신이 가진 것이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것을 자각할 때이다. 그는 재벌가의 사생아이며 첩의 아들이라는 점을 늘 의식하고 있다. 그래서 형 조태진과 누나 조지수에게 모든 것을 빼앗겨 한 푼도 상속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다. 그에게 두려운 것은 빈털털이가 되는 것이다. 그가 경멸하고 무시해온 돈 백만원에 벌벌 떠는 사람들처럼 되는 것 말이다.



조태오는 막내다. 그것도 배다른 막내다. 가정에서 막내들은 부모로부터 사랑을 얻는 과정에서 항상 형제들과 투쟁한다. 홀로 배다른 아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막내는 이복형제에 대한 경쟁심이 더할 것이다. 아버지인 조 회장(송영창)이 자신을 뒤늦게 실수해 낳은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조태오가 모를 리 없다. 따라서 그는 겉으로는 여유로워 보이지만 항상 생존을 위해 눈치보는 삶을 살았을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한 연구에 따르면 막내들은 부모와 가장 닮거나 혹은 가장 달라진다고 한다. 성인이 된 뒤 안정보다는 모험을 추구하는 성향도 다른 형제에 비해 더 강하다. 조태오를 보고 있으면 버림받지 않기 위해 아버지와 닮아지려 했을 그의 어린 시절이 연상된다. 잘못해서 아버지 눈밖에 나면 쫓겨날 수도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체화했기 때문에 그는 철저히 아버지를 모방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가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아버지가 하는 것을 본대로 행하는 것이다. 조 회장이 잘못한 조태오에게 화를 내면서도 직접 때리지 않는 것은 그에게서 자신의 분신을 봤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 장면 이후 이어지는 다음 장면은 바로 조태오와 아버지의 대화다. “한 번만 더 사고치면 회사에서 십원짜리 한 장 못 가져간다는 거 알아둬.” 회장은 조태오에게 경고한다. 이제 조태오는 코너에 몰렸다.


물론 조태오는 적당히 계열사 하나를 물려받고 큰 욕심 없이 살아갈 수도 있었다. 왕조 시대에 세자가 되지 못한 왕자들이 쾌락을 즐기며 조용히 숨어 지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조태오는 혁명을 꿈꾸는 이방원처럼 형을 제거하고 1인자가 되려고 한다. 재벌 2세인 그의 아버지가 최 상무(유해진)의 아버지를 제거하고 필시 그렇게 했을 것이듯 말이다.


그렇다면 그는 이방원처럼 왕이 될 자질을 갖추었는가? 안타깝게도 영화 속에 보여지는 조태오의 모습은 이방원보다 사도세자에 가까워 보인다. 그는 좌충우돌 하면서도 능력을 보여준 적은 거의 없다.



“방법은 모르겠고 빨리 알아서 해결해”


조태오가 자주 하는 대사다. 그는 사고를 쳐놓고 수습하지 못할 만큼 무능하다. 수하들에게 지시는 하지만 아이디어는 없다. 아무런 생각이 없는데 지시만 있다면 그 지시가 잘 이행될 리 없다. 설사 해결된다고 해도 그것이 그의 능력으로 인정받기도 힘들다.


능력은 없는데 자기 능력보다 더한 것을 원하는 자가 권력을 쥐게 됐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자명하다. 역사 속에서 우리는 이런 사례를 수없이 목격해왔다. 그가 국가의 지도자라면 자신의 무능을 감추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국민을 통제하려 할 것이고, 기업의 최고경영자라면 기업이 명성을 잃고 휘청거리는 것도 모른 채 우왕좌왕할 것이다.


조태오는 지금껏 자기가 해온 것처럼 아버지의 방식으로 신진그룹을 접수하려고 했다.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방식 말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에게 능력 밖의 것을 얻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이때 갑자기 두 남자(배 기사와 서도철 형사)가 나타나 그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위기에 처한다. 작은 구멍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가 점점 거세지더니 둑을 무너뜨리고 결국 지금까지 자신이 일궈온 모든 것을 덮쳐온다. 당황한 그는 생존 위기에 몰린다.



모든 것을 얻으려다가 전부 잃게 된 상황에서 그는 폭주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시내를 질주하는 그의 폭주를 보는 것은 불편하다. 단지 형사 한 사람으로부터 도주하기 위해 거리의 수많은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는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진그룹이라는 울타리 안에 갇힌 채 살아온 그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정의인지 모른다. 450억이 아닌 450만원 때문에 사람이 고통스러워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단지 아버지처럼 돈의 탑을 쌓으면 자신을 우러러보는 사람이 더 많아질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영화 <폭스캐처>


조태오를 보며 떠오른 영화 속 인물이 있다. 영화 <폭스캐처>(2014)의 재벌가 상속인 존 듀폰(스티브 카렐)이다. 두 인물의 성격은 전혀 다르지만 능력 이상의 것을 원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듀폰 역시 거대한 저택을 갖고 있고 마음 먹으면 온갖 대회를 개최해 트로피를 수집할 수 있지만 실제로 올림픽에서 메달을 딸 수 있는 능력은 없다. 하지만 그는 메달을 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가 올림픽 메달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의 어머니 때문이다. 그의 어머니는 모든 것을 이룬 사람이다. 듀폰은 어머니의 보호 아래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랐다. 어머니의 말은 거역할 수 없는 성경 같은 것이었다. 그는 성인이 된 어느 순간 자신은 어머니가 얻어낸 것을 관리해주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어머니가 이루지 못한 올림픽 메달을 따면 그녀를 넘어설 수 있다고 믿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영광의 순간은 찾아오지 않는다. 최고의 선수를 영입하고, 최고의 시설을 지어줘도 그가 갑자기 최고의 코치가 될 수는 없다. 단지 최고의 코치처럼 보이도록 연기하고 있을 뿐이다. 어머니를 결코 넘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그의 실패는 더 비참하게 다가온다.


조태오에게도 야망이 있었을 것이다. 단순히 생존을 넘어 아버지로부터 그룹을 승계해 최고의 글로벌 기업으로 키우고 싶다는 야망 말이다. 이를 위해 그는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 야망이 조태오로 하여금 엘리베이터의 문을 열게 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 행동이 가식적이라고 비웃지만 그가 그것을 알 리 없다. 그렇게 하면 자기가 선해 보일 것이고 그것이 그를 남들보다 더 우월하게 만들어줄 것이라는 허영심만 있을 뿐이다. 그것이 허영심인 이유는 지금까지 자신의 행동과 다른, 필요 이상의 겉치레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허영심은 야망을 강화하는데 도움이 된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원하는 이미지로 포장하기 위한 필요 이상의 노력, 즉 허영심은 무언가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추력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엘리베이터 문을 열어준 작은 친절은 이를 통해 그룹 승계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믿는 자의 예기치 못한 순진한 행동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영화 <아메리칸 싸이코>


영화 <아메리칸 싸이코>(2000)의 재벌가 아들 패트릭 베이트먼(크리스찬 베일)도 조태오와 비슷한 행동을 한다. 그는 월스트리트에 그럴 듯한 회사를 차려놓고 출퇴근하지만 그가 회사에서 하는 일이라곤 최고급 식당을 예약하라고 비서에게 시키고, 친구들에게 명함을 자랑하고, 포르노를 보는 게 전부다. 싸이코패스인 그는 자기 기분에 따라 온갖 살인을 저지르지만 가끔 뜬금없는 행동을 하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의 인종차별 발언을 교정해 주는 것이다. 그의 이런 행동 역시 허영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를 더 돋보이게 만들고 싶은 마음이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지적 사기로 이어진 것이다.


조태오는 한국영화에 등장한 전혀 새로운 악당은 아니다. <성난 변호사>(2015) <검사외전>(2016) <특별수사: 사형수의 편지>(2016) 등 영화 속에서 재벌은 잊을 만하면 악역으로 등장한다. 이중 조태오의 존재감은 단연 돋보여 ‘재벌 3세=조태오’로 통할 정도로 재벌 3세의 안하무인격인 행동을 대표하는 이름이 됐다. SK가 3세 최철원씨의 맷값 폭행, 현대가 3세 정모씨의 대마초 흡입 등 실제 사건을 모티프로 했다는 점에서 매우 현실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맷값 폭행의 주인공 최철원씨


재벌가의 악행이 부각된 것은 비단 최근의 일은 아니다. 20년 전에도 롯데가 2세 신동학씨의 경찰 폭행 등이 회자됐다. 어느새 한 세대가 지나 이젠 재벌 3세가 중심에 선 것뿐이다. 이들이 대를 이어 악하고 부정의한 모습을 보여주는 이면에는 우리가 이들의 패악을 알면서도 눈감아주고 있다는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 숨어 있다. 영화 속 서도철 형사는 대리만족을 위한 도구일 뿐 현실에는 서도철이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자유를 얻은 돈은 인간을 돈의 많고 적음에 따라 구분짓고 소수의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권력을 주었다.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하기 마련이라는 격언처럼 재벌의 부패는 필연으로 다가왔고, 우리는 그들을 현실에서는 어쩌지 못하면서 스크린으로 불러내 욕보이면서 고소해한다. 만약 실제 서도철이 나타나 조태오를 잡았다고 해도 그는 기업 활동이 위축되면 일자리가 줄어들고 경제가 침체된다느니 하는 갖가지 이유를 대며 법적 책임을 최소화했을 것이다. 또 우리들은 쉽게 그들의 악행을 잊고 그들이 만드는 제품을 구입해주는 착실한 소비자가 되었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시종일관 악행을 저지르던 조태오는 갑자기 엘리베이터를 붙잡더니 환자들을 태워주는 선행을 베푼다. 엘리베이터에 탄 환자들 중엔 나중에 조태오를 꽤 친절한 기업가로 기억하게 될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른다. 별 것 아닌 선행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받는 사람은 더 과장해서 기억하는 법이니 말이다. 그들은 다음에도 신진그룹의 의료센터를 또 이용할 것이고 신진전자의 전자제품을 살 것이며, 축구장에 가면 신진FC를 응원할 것이다. 어쩌면 그들 중 일부는 나중에 퇴원한 뒤 극장에 가서 재벌 3세가 악인으로 등장하는 영화를 보며 혀를 끌끌 찰 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선행을 베푼 엘리베이터의 그 남자가 바로 그 악인이라는 것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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