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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이 올해 천만 관객을 동원한 세 번째 한국영화가 됐다. 다른 두 편은 <국제시장>과 <암살>이다. 오달수는 세 편 모두에 출연해 무려 3천만 배우가 됐고, 황정민과 김민재도 <국제시장>과 <베테랑>에 출연했다.


<암살>이 1930년대, <국제시장>이 1950~1980년대를 다룬 시대극이었던 것과 달리 <베테랑>은 요즘 시대를 다룬 영화다. 역대 천만 관객 한국영화 13편 중 시대극이 아닌 영화는 <괴물>, <해운대>, <7번방의 선물>, <도둑들>에 이어 <베테랑>이 다섯 번째다. 그만큼 대히트한 한국영화는 대부분 시대극이었는데 조선시대 3편(<왕의 남자>, <광해>, <명량>), 일제강점기 1편(<암살>), 한국전쟁 이후 4편(<태극기 휘날리며>, <실미도>, <국제시장>, <변호인>)이었다.


13편의 천만 관객 한국영화들은 대부분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었고, 그 메시지가 흥행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순수하게 오락영화로 흥행한 영화는 <해운대>, <도둑들> 뿐이었다. <베테랑>은 처음엔 여름 시즌 시원한 오락영화로 소개됐지만 정작 영화가 개봉한 뒤엔 사회적 메시지가 예사롭지 않다는 평이 많았다. <베테랑>을 놓고 동아일보 논설주간 칼럼과 한겨레 박권일 칼럼이 맞붙은 것이 그 단적인 예다. 동아일보 칼럼은 영화로 인해 반재벌 정서가 확산될까 걱정했고, 이에 대해 한겨레 칼럼은, 동아일보 칼럼이 현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영화 한 편이 재벌개혁 문제를 오랜만에 화두로 올려놓은 셈이다.



<베테랑>은 경찰이 악당을 잡는 단순한 줄거리의 영화인데 각각의 캐릭터가 대표하는 계급성은 대한민국 사회의 축소판이다. 휠체어를 타고 TV에 등장한 재벌 회장(송영창)이 야구방망이를 든 모습은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2007년 보복폭행과 닮았고, 서민의 삶을 전혀 모르는 망나니 재벌 3세 조태오(유아인)는 최종관 SKC 전 고문의 아들 최철원 전 M&M 대표의 2010년 맷값 폭행을 떠오르게 한다. 죄를 대신 뒤집어 쓰면서까지 조태오를 비호하는 월급쟁이 최 상무(유해진), 수사를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지으려는 경찰 고위간부, 아들이 보는 앞에서 구타당하는 화물연대 소속 트럭기사 배 기사(정웅인), 배 기사의 고용주 전 소장(정만식) 등 다양한 인물들이 돈으로 얽힌 먹이사슬을 구성한다.



실제 류승완 감독은 최근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던 사건들을 취재해 시나리오를 썼고, 이를 통해 관객이 가상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를 바랐다며 연출 의도를 밝혔다. 그는 전작 <부당거래>에서도 한국사회의 부패상을 드러낸 적 있는데 <부당거래>가 모두를 공범으로 엮어 현실의 민낯을 거울에 비춰보게 한 영화였다면 <베테랑>은 뚜렷한 선악구도로 그 거울을 깨부수는 영화다.


재미있는 것은, 영화가 악당을 그릴 때는 리얼리티에 기반을 두고 있는 반면, 이들을 잡는 경찰을 그릴 때는 마치 슈퍼히어로를 묘사하는 방식의 판타지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형사 서도철(황정민)은 익살스럽지만 정의감 투철한 전형적인 할리우드식 히어로인데 그가 일을 벌여놓으면 동료 형사인 미스 봉(장윤주)이 긴 다리로 화룡점정을 찍고, 오 팀장(오달수)이 인자한 형처럼 뒤처리를 한다. 상황이 종료된 뒤 그의 팀은 마치 '판타스틱4'처럼 슬로모션에 맞춰 멋지게 걷는다.



서도철은 수사중 관할 담당형사(김민재)의 뇌물수수를 의심하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류승완 감독이 오래전 강수연 부산국제영화제 공동집행위원장이 술자리에서 한 말에서 영감 받아 쓴 이 대사는 영화 <베테랑>의 메시지를 한 마디로 요약해준다. 그것은 돈의 노예가 돼 기죽어 살지 말자는 것이다. 돈으로 얽히고 설켜 악행을 눈감아주는 각종 인물들을 앞뒤 재지 않고 단번에 처단하는 이 대사에 관객들은 지지를 보냈다.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서 악덕 재벌3세의 대항마를 경찰관에서 시민으로 확장한다. 조태오와 서도철이 명동 한복판에서 몸싸움을 벌일 때 구경하는 시민들 사이에서 한 남자(마동석)가 틈새를 비집고 나와 한 마디 한다. "나 요앞 아트박스 사장인데, 젊은 친구가 말이 좀 짧네." 관객들 모두 빵 터진 이 대사의 주인공인 아트박스 사장은, 영화 속 캐릭터들이 상징하는 계급성으로 따져보면, 재벌에 의해 상권 침해당한 자영업자를 대변한다. 그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는 듯했지만 이내 뒤에 숨는다. 그 대신 슬금슬금 물러서면서도 스마트폰을 놓치 않은 시민들이 촬영한 동영상이 그대로 소셜미디어를 타고 퍼지면서 영화는 무소불위 권력자를 감시하는 역할은 시민에게 있음을 분명히 한다.



2015년 한국영화계엔 세 편의 천만 관객 영화가 탄생했는데 세 편 모두 지금의 한국사회를 관통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한 편은 한국전쟁 이후 산업역군을 통해 경제부흥의 역사를 돌아봤고, 한 편은 일제강점기의 독립군 활동을 조명하며 청산되지 못한 친일파 문제를 제기했으며, 또 한 편은 돈이 절대가치가 된 지금 우리가 잊고 있던 정의가 뭔지를 되돌아보게 했다.


세 편 중 <베테랑>은 가장 가볍고 단순한 스토리의 영화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세 편 중 가장 무거워 보인다. 영화가 경찰관이 망나니 재벌3세 잡는 상황을 과장된 판타지 전략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우리 현실에 참조할 만한 리얼리티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암살>과 <국제시장>이 그린 어둡고 침울한 시대를 거쳐 가장 밝고 경쾌한 <베테랑>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어쩌면 가장 대적하기 힘든 적을 만나 가장 '가오 없이'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나마 한국사회에 희망이 있다면 우리는 류승완 감독이 텐아시아와의 인터뷰에서 감사인사를 전한 이런 사람들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침몰하는 배에서 학생들을 구하기 위해 힘썼던 선생님, 불이 난 건물에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활용해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준 간판 전문가, 열악한 현장에서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애쓰는 소방관, 범죄와 싸우며 사우나에서 잠자기를 밥 먹듯 하는 일선 경찰들, 비리와 맞서기 위해 진실을 파헤치는 기자들… 진짜 베테랑들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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