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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0 재보선 전남 순천, 곡성에서 새누리당의 이정현 후보가 당선됐다. 1988년 소선거구제도가 도입된 후 광주, 전남에서 26년만이다. 26년이라. 참 공교롭게도 전두환을 저격하는 웹툰과 영화의 제목이 <26년>이었다. 그때 26년은 광주로부터 흘러온 시간을 뜻했는데 이젠 전남이 내준 시간을 뜻하게 됐다. 시간은 필히 망각을 동반하는 것이지만, 지역주의가 대구 경북이 아닌 호남에서 먼저 깨졌다는 점에서 아쉽고 씁쓸한데 한편으론 변화가 시작되는 것 같아 자꾸만 눈길이 간다.


어찌됐든 단단했던 지역주의의 벽에 26년만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정현은 당적보다는 개인의 역량과 인기로 3전 4기 끝에 당선된 것이기 때문에 다음에 다른 후보에 의해 호남에서 또 이런 일이 벌어질 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역사적인 사건인 것은 분명하다.


지금으로부터 26년 전, 노태우 정권 초기인 1988년 3월 8일, 4당 합의에 의해 소선거구제 법안이 국회 통과됐다. 도입한 이유는 투표의 등가성과 지역 대표성 원칙이라고 하는데 사실 당시 민주화세력이 소선거구제를 원했기 때문이다. 1대1로 맞짱 뜨면 군사세력을 이길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이게 지역주의의 발목을 잡게 된다.


소선거구제는 각 지역을 작게 나눠 대표자 1명을 뽑는 방식이기 때문에 지역을 기반으로 한 정당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제도다. 처음엔 군사정권과 민주세력의 대결이었기에 이러한 단점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단 2년 만인 1990년 3당 합당으로 정치권에 지각변동이 일어나면서 각각 영남과 호남을 대표하는 세력으로 뒤바뀐 것이 지금까지 고착화되어 왔다. 2.4:1인 영호남 인구비율상 늘 열세에 놓일 수밖에 없게 된 민주세력은 1997년 대선땐 충청권과 연합, 2002년 대선땐 단일화라는 컨벤션 효과를 통해 지지세를 끌어모았지만 어느새 이런 전략은 한계에 봉착했다.


당장 이번 선거에서도 나타났지만 몇몇 정당이 후보 단일화를 하려고 하면 거대정당에서는 '선거공학적 야합'이라고 비판한다. 영혼없는 언론은 이를 실어나르고 유권자들은 그 비판이 그럴듯하다며 수긍한다. 그런데 사실 소선거구제는 애초에 1대1로 맞짱뜨라고 만든 제도다. 후보 여러 명 나와서 그중 한 명만 뽑게 되면 오히려 사표가 많아져 민의를 제대로 반영할 수 없다. 1대1일 때는 탈락한 한 명의 표만 사표지만, 다수의 후보일 때는 탈락한 모든 후보의 득표가 사표가 되기 때문이다. 만약 단일화가 정말 '야합'이라서 지양해야 할 선거공학에 불과하다면 수적으로 열세에 놓인 지역 정당은 선거에서 이길 방법이 없다. 인물로 승부하면 되지 않냐고? 그럴거면 정당은 왜 필요한가? 한 명의 스타가 아닌 시스템이 일을 하게 해야 제대로된 정치다. 애초에 게임의 룰이 공정하지 못하다면 규칙을 바꿔야 한다. 지역을 좀 더 큰 단위로 나눠 대표자 2~5명을 뽑는 중선거구제가 그 대안이 될 수 있다.


국회의원 선거 때마다 헷갈리는 게 있다. 바로 갑, 을, 병, 정이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이번에도 동작을, 수원을, 병, 정 등에서 재보선이 이루어졌는데 이 구분을 명확히 할 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동작구가 어디부터 어디까지인지를 아는 것도 쉽지 않은데 그걸 갑과 을로 나누는 것은 정치에 웬만큼 관심이 있지 않고서야 쉽지 않을 것이다. 수원 갑, 을, 병, 정은 한술 더뜬다. 도대체 어디부터가 병이고 어디가 정인가? 그리고 또 굳이 그걸 왜 나눠야 하나? 같은 동작구 내에서 갑 지역과 을 지역에 각각 따로 적용해야 할 정책이 있을까? 수원 을과 정 주민들 모두 같은 수원시장을 뽑는 동일 행정구역 내에 살고 있다. 올해부터 지번 주소를 대신 도로명 주소를 사용하는 것으로 바뀌었는데 소선거구제의 갑, 을, 병, 정은 도로명 주소를 반영하지 못하는 지번 주소 시대의 유산이다. 인구 비율의 형평성을 다른 지역과 맞추느라 억지로 갑과 을로 나누었을텐데, 차라리 중선거구제를 도입해 동작구 전체에서 1등과 2등을 당선자로 해 두 명의 의원을 뽑는다면 이런 불편함은 사라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선거 때마다 피곤한 단일화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되고, 군소 정당도 당선 가능성이 높아지니 다양한 민심을 정치에 반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석이조다.


물론 이것은 해묵은 논쟁거리 중 하나다. 그동안 중대선거구제 개편은 물론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석패율제 등 온갖 이야기가 나왔었지만 흐지부지됐다. 그러나 지역구도에 금이 가기 시작한 마당에 소선거구제를 고집할 명분은 없어 보인다. 지금이야 새누리당이 그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소선거구제를 버리고 싶지 않겠지만 이 변화가 조금만 더 이어지면 명분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이야 이미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됐으니 두말 할 나위가 없다.


호남에서 새누리당 의원이 탄생한 사건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는 뜻인지까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단단했던 벽에 금은 갔다. 호남이 열었으니 어쩌면 다음 번 총선에선 김부겸이 대구에서 일을 낼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그토록 견고했던 지역주의의 벽에 생긴 금이 점점 더 커지게 될 것이다. 한 번 금 간 벽에 몇 번의 충격이 더해지면 벽 전체가 한꺼번에 무너질 수도 있다. 이것이 유권자의 힘이다. 변화는 작은 것에서 시작해 한 순간에 전체를 휘감는 법이다. 중선거구제로 바꾼다면 이 변화를 더 빨리 보게 될 것이다.


아예 지역대표를 줄이고 비례대표를 늘리는 것도 방법이다. 지금처럼 지역에 애정이 없는 후보가 전략공천이라는 이유로 당선되면 사실상 비례대표와 다를 게 없다. 이번 선거에서도 동작을을 비롯한 몇몇 지역은 사실상 정당의 인기 투표 성격이 강했다. 지금처럼 1대1로 승부가 갈리는 소선거구제에서는 1위를 하기 위해 인물의 인기에 의존하는 공천을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역에 연고가 없는 후보가 정작 선거날 투표도 하지 못하는 웃기 힘든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중선거구제에도 단점은 있을 것이다. 정치학 책을 찾아 보면, 후보자 난립으로 인한 유권자 피로감과 정치 무관심 등이 단점이라고 한다. 그런데 가만, 정치 무관심이 단점이라고? 투표율 32.9%보다 더 무관심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막상 시행하다보면 다른 문제점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소선거구제가 우리 정치에 끼치고 있는 폐해를 생각하면, 중선거구제의 장점이 더 커 보인다. 무엇보다 중선거구제는 1등이 혼자 다 먹는 제도가 아닌, 2등에게도 기회를 주는 제도다. 때로는 제도 하나가 세상을 바꾼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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