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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비’에서 북한 No.1호를 곁에서 지키다가 끝내 죽는 송수미를 기억하는지? 북한말이 자연스러워 실제 북한에서 온 여성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는 12년차 배우 안미나(34)다. 그녀는 ‘강철비’ 제작과정에서 가장 먼저 캐스팅 물망에 올랐지만 실제로는 맨마지막으로 캐스팅됐다.


지긋지긋한 불운에 안미나는 사실 연기를 그만둘 생각이었다. 지난해 1월 매니지먼트사와 계약이 종료되자 그녀는 더 이상 계약 연장을 하지 않았다. 아침마다 소설을 쓰는 그녀는 틈틈이 책 관련 프로그램에 출연해 강의할 정도로 책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한다. 이에 따라 그녀의 미래도 어쩌면 연기자가 아닌 다른 직업, 예컨대 작가로 재설정될 뻔했다. 그때 그 전화가 오지 않았다면 말이다.


©Youchang


양우석 감독은 시나리오를 탈고한 뒤 송수미 역으로 제일 먼저 안미나를 떠올렸다. 2009년 드라마 ‘남자 이야기’에서 채은수 역으로 강한 인상을 남긴 그녀가 군사분계선을 넘어와 ‘북한 1호’를 위해 피를 뽑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개성공단 직원 역할에 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미나와는 쉽게 연락이 닿지 않았다. 소속사가 없는 그녀의 연락처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한참 후 양 감독은 2016년 무한도전의 ‘무한상사’ 영화 버전에 그녀가 출연했다는 사실을 떠올렸고 PD를 통해 겨우 연락처를 받아낼 수 있었다.


한 통의 전화 이후 안미나의 인생은 달라졌다. ‘내 이름은 김삼순’ ‘라디오스타’ 이후 잊혀진 배우였던 그녀는 ‘강철비’에 출연하면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소속사와 매니지먼트 계약도 맺었고, 최근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실검에도 오르고 있다. ‘강철비’는 배우 안미나의 인생에 터닝포인트가 된 것이다.


지난 5일 충무로의 한 카페에서 배우 안미나를 만나 그 동안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Q. 정말 오랜만에 영화에 출연했다. 그것도 157억원이 투입된 대작 ‘강철비’다. 캐스팅 과정이 궁금하다.

A. 당시에 소속사가 없는 상태였다. 성격상 연락을 잘 안 받는다. 제가 워낙 연락이 안 되니 양우석 감독님이 저에게 SNS 친구 신청도 하시고, 여러 루트로 알아보셨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는 무한도전 측에 연락해서 PD님 통해 연락하셨다더라. 저는 전화를 받고 너무 의외여서 오디션을 보라는 말씀이신 줄 알았다. 바로 그날 저녁 8시까지 올 수 있겠냐고 물어보셔서 가겠다고 했다. 추운 날이었는데 두꺼운 내복 껴 입고 버스 타고 갔다. 그런데 막상 가니까 책(시나리오)에 제 이름이 써져 있더라. 그날 의상 치수도 재면서 바로 촬영 준비가 시작됐다.


Q. 감회가 남달랐겠다.

A. 전혀 예상치 못한 캐스팅이었다. 지금도 얼떨떨하다. 포기하지 않고 연락해주신 감독님에게 감사드린다.


'내 이름은 김삼순'


'라디오스타'


Q.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선배 파티쉐 김선아를 동경하는 사투리 소녀 이인혜 역으로 데뷔해 단숨에 떴다. 스물두살 이른 나이에 성공한 이후엔 그러나 순탄치 않았다.

A. 처음부터 생각보다 너무 잘 됐다. ‘라디오스타’도 잘 되고, ‘서바이벌 오디션’도 잘 되고, ‘황금신부’도 잘 됐다. 그런데 조금 어른이 됐다고 느낀 건 어느 순간 내가 준비한 것들이 의도치 않게 바뀌더라. 회사가 사기를 당한 적도 있었고, 드라마 포스터까지 붙였다가 주인공이 바뀌기도 했고, 나를 중국드라마와 연결해 주려던 중국 매니저가 갑자기 시집을 가는 바람에 멈춘 적도 있었고… 그때 깨달았다. 그 동안 사실 내가 노력을 했기 때문에 된 게 아니었구나. 내가 뭘 잘 해서 꽃길을 걸어온 게 아니구나. 주변 축복을 많이 받았구나.


Q. 힘든 시기에 어떻게 지냈나?

A. 조그마한 상가에 딸린 단칸방 같은 곳에서 살았다. 상가라서 명절이 되면 보일러를 다 끊어버린다. 진짜 추워서 이불이란 이불은 다 깔고 옷을 패딩 두겹 세겹 껴 입고 덜덜 떨면서 지냈다. 되게 웃긴 건 그래도 그게 그나마 마음이 편하다는 거다. 집에 가면 부모님이 걱정하시니까.


'청춘예찬'


Q. 학창 시절 어떤 아이였나?

A. 고교 때 방송부였다. 그래서 점심시간에 방송하고 연기에도 관심이 많아서 대본 쓰고 연기도 하고 그랬다. 친오빠가 어릴 때 아역배우를 시작해 20대 초반까지 모델 활동을 했는데 부모님은 나까지 연예계 활동하는 것은 반대했다. “일단 공부 열심히 하고 나중에 생각해 보자.” 이런 분위기여서 일단 공부해서 대학(연세대 철학과 03학번)에 합격했다. 대학에 가자마자 연극 동아리 ‘연세극우회’에 들어갔다. 첫 번째 연극이 ‘뜻대로 생각하세요’, 그리고 나서 외부에서 ‘미워도 다시한번’이라는 악극을 했다. 이후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으로 본격 시작했다.


Q. 학창시절 공부를 잘했나 보다.

A. 열심히 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점점 성적이 좋아진 케이스다. 선생님이 발전가능성이 많다고 얘기를 해주셨다. 고3 때는 반에서 1등한 적도 있다. 연세대 수시 합격했다. 그날 합격 소식 듣고 엄마랑 많이 울었다.


'남자 이야기'


'2016 무한상사'


Q. 배우가 되고 싶었는데 철학과를 간 것도 특이하다.

A. 처음 연극할 때 저희 연극 연출을 맡으신 언니가 철학과였다. 또 같이 연기한 선배 중 두 명이 철학과였다. 그래서 나는 막연하게 연기를 하려면 철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철학이 연기에 직접적인 도움이 된다기보다는, 철학을 하면 생각하는 그릇이 커지니까 그런 면에서 연기할 때 생각의 루트가 달라진다고 할까. 그런 면이 좋다.


'강철비'


Q. 영화 ‘강철비’ 이야기를 더 해보자. 북한말이 참 자연스러웠다. 어떻게 연습했나?

A. 탈북자 출신 북한말 선생님이 계셨다. 일주일에 두 번 만나서 서너시간씩 연습했다. 녹음해서 틀어놓고 계속 반복했다. 예를 들면 “요민경이 정신차리라. 이렇게 대사쳐야 하는 거야” 하시면 “요민경이 정신차리라”만 따라하는 게 아니라 전체를 통으로 따라하라고 하셔서 그렇게 했다. 처음엔 잘 안 되더라. 자꾸 타이밍 놓쳤는데 녹음해놓고 계속 따라하다 보니 점점 늘었다.


Q. 배우고 나니 북한말은 우리 말과 어떻게 다르던가?

A. 북한말은 어절이 잘 안 나누어진다. 그래서 문장 하나를 한 단위로 생각하고 빨리 말하는 연습을 했다. 또 입술을 오므리는 발음이 많다. 예를 들어 “여자”를 “요자”로, “영화배우” 대신 “용화배우” 이런 식으로 발음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북한말은 주로 함경도 사투리인데 ‘강철비’의 송수미는 개성공단에서 일하기 때문에 평안도 사투리를 쓴다. 함경도는 억양이 좀 세면서 뒷말을 축약시킨다. “일없습니다”를 “일없음다” 이런 식이다. 반면 평안도는 뒷부분에 조금 더 힘을 주면서 전반적인 억양이 높다.


©Youchang


Q. 남한으로 내려온 송수미는 병원에서 처음 밥을 먹는다. 망설이다가 허겁지겁 먹는 그 장면이 인상적이다.

A. 그때 ‘3분 요리’로 출시된 제품을 먹었다. 컵라면은 북한에도 있는데 3분 요리는 별로 없다고 하더라. 촬영날 점심을 굶고 많이 먹었다. 의상도 거의 폭탄 맞은 수준이었는데 그렇게 입고 엄청 먹었다. 중간에 NG가 많이 나서 힘들었는데 박은혜 언니의 도움이 컸다. 은혜 언니가 탈북자가 출연하는 TV프로그램을 진행해봐서 북한인들의 이야기를 많이 알더라. 예를 들어 “뵤에요 뵤” “뵤가 뭐예요?” “쌀쌀” 이런 대사가 있는데 은혜 언니 경험에서 나온 애드립이다.



Q. (스포일러 경고) 아쉽게도 송수미는 중반부에 총에 맞아 죽는다.

A. 원래 그 장면에는 조금 더 감정적인 설정이 있었다. 죽으면서 여민경한테 긴 얘기를 하는 것이다. “고 깍쟁이네 입이 대빡 나왔어” 이런 대사도 있었다. 그 전에 고향에 가져가려고 초콜릿을 막 모으는 장면도 있었다. 완성본을 보니 다 편집됐더라. 속상하긴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그 장면이 빠져서 더 세련되어지고 담백해진 것 같아서 좋다.


Q. 정우성 배우와 공연했다. 가까이서 본 정우성은 어떤 사람인가?

A. 현장에선 정우성 선배님과 항상 북한말로 연습하듯 주고 받았다. 요즘도 가끔 안부 문자 보내주시는데 "동무, 잘 지냈나" 이런 식이다. (웃음) 개봉 후 무대인사 돌고 회식하는데 선배님이 영화 ‘라디오스타’ 잘 봤다고 말씀해 주셨다. “영화 쪽에서 안미나 하면 연기 잘하는 배우로 알려져 있고, 기대 많이 하고 있었는데 그동안 왜 안 나왔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을 거야”라고 말씀해 주셔서 힘이 많이 됐다. 나를 기억해주고 계셨구나. (울먹) 처음 해보는 대작이고, 또 정우성 선배님은 제가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톱스타인데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강철비' 촬영 현장의 정우성과 안미나


Q. 한여운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다가 이름을 바꿨다.

A. 안미나가 본명이다. 신앙심이 생기면서 한여운이라는 활동명을 쓰고 싶지 않았다. 어찌보면 오랫동안 배우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니까 진솔한 느낌으로 나 자신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그런데 안미나로 바꾸니까 거의 아예 신인처럼 되더라. 오디션도 처음부터 봐야 하고.


©Youchang


Q. 요즘 책을 쓰고 있다고 들었다.

A. ‘TV 책을 보다’라는 프로그램에 패널로 출연한 게 계기가 됐다. 제 전공에 맞게 그날 철학 책을 소개했다. ‘걷기로 철학하기’라는 입문서였다. 걷는 것과 명상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그걸 좋게 보셨던지 출연 섭외가 또 왔다. ‘독한습관’이라는 프로그램에도 잠깐 출연해 책에 관한 강의를 조금 했고, ‘문제적 남자’라는 프로그램에도 나갔다. 그 이후 ‘문제적 남자’ 팀과 책을 내기로 했다. 또 아무 것도 안 하던 시기에 한겨레 장편소설 공모전에 응모한 적도 있는데 그때 좋은 결과는 없었지만 지금 그걸 손봐서 책으로 낼 준비를 하고 있다. 약간 서스펜스가 들어간 드라마다. 추리소설 같은 느낌이랄까.


Q. 지금 읽고 있는 책 중 추천할 책이 있다면?

A. ‘한나 아렌트의 말’과 ‘82년생 김지영’이다. ‘한나 아렌트의 말’ 중 인상 깊었던 부분은 유태인들이 히틀러가 권력을 잡기 전부터 외국으로 이주를 시작했다는 부분이었다. 세상이 변하는 걸 다들 감으로 느꼈다는 거다. 히틀러가 나오지 않았어도 다른 누군가에 의해 그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을 거라는 저자의 말을 읽다보니 여러 생각을 하게 됐다. 생각이 많아지게 하는 책이라서 추천한다.



Q. 글쓰기를 좋아하나?

A. 저는 제 자신을 회사원이라 생각하고 아침에는 꼭 글을 쓴다. 하루에 분량을 정해 놓고 그만큼 쓴다. 글을 쓰는 이유는 많은 질문을 제기하는 사람이고 싶기 때문이다.


Q. 연기와 글쓰기는 안미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A. 저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연기를 굉장히 좋아한다. 연기할 때는 제가 생각하지 못한 모습이 많이 나온다. 연기가 끝나면 ‘내가 제정신이었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다. 연기를 하면서 사람에 대해 더 많이 배우게 되는 것 같다. 연기로는 캐릭터의 삶을 보여주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면, 글로는 “이런 건 어떻게 생각해”라고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Youchang


안미나(34) 출연작

영화: 강철비, 청야, 네모난원, 원더풀 라디오, 마을금고 연쇄습격사건, 전설의 고향, 라디오스타

드라마: 무한상사-위험한 회사원(MBC), 그 형제의 여름(KBS), 엄마의 정원(MBC), 내 손을 잡아(MBC), 역전의 여왕(MBC), 청춘예찬(KBS), 남자이야기(KBS), 황금신부(SBS), 내 이름은 김삼순(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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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창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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